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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나도 모르는 이 감정, 어떻게 할까?] 자연스러운 망각, 혹은 비움

 

 


머릿속이 복잡할 때, 온갖 잡념과 들끓는 감정으로 삶이 어지러울 때, 그럴 땐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쉬는 게 상책이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머물수록 더 좋다. 마치 소로의 숲속처럼.

“이따금 여름날 아침이면 나는 여느 때처럼 미역을 감은 다음 양지 바른 문간에 앉아서 동트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소나무와 호두나무와 옻나무에 둘러싸인 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독과 적막 속에서 조용히 공상에 잠기곤 했다. 그러는 동안 새들은 내 주위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 없이 집 안을 들락거렸다. 그러다가 햇빛이 서쪽 창문으로 비쳐들거나 멀리 떨어진 간선도로에서 여행자의 마차 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야 나는 시간이 흘렀음을 깨닫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중

전나무숲길이 유명한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이어지는 길. 절 일주문에서 걸어서 반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오대산자연명상마을(옴뷔, OMV)을 찾았다. 시원한 계곡이 흐르고, 인적이 드물고, 말소리는 더욱 멀고, 휴대전화 와이파이 신호마저 잡히지 않는 그곳에서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하루를 보냈다. 철저히 느리고 정해진 일 없던, 그날의 기록이다.

오전
자연에서 맞는 아침은 느긋하다. 귀를 잡아당겨 자리에서 벌떡 일으키는 알람 대신 마냥 듣고 누워 있고픈 새소리가 아침을 열어준다. 산들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도 가늘게 들려온다. 주변의 소리에 넋 놓고 귀 기울일 수 있는 여유로운 아침,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다. 보통 때, 바로 어제만 해도 아침은 전쟁터 같았다. 스마트폰 알람에 이불을 박차고 나와 욕실로, 쏜살같이 씻고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회사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흘러가는 것이 익숙한 도시의 아침 풍경이다. 거기서 한 발짝 벗어나 보니 분명히 알 수 있다. 내 몸이, 머리가, 마음이 매일 얼마나 숨 가쁘게 하루를 시작했는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걱정에 에너지를 소비해 왔는지. 지금 이곳에선 숨 가쁘지 않다.
편안하다.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몸과 마음과 머리가 가볍고 맑아지는 게 느껴진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나섰다. 정해진 시간도 목적지도 없다 보니 사방이 길이다.
우선 명상마을 안쪽 정원길을 천천히 돌고 발길을 월정사로 향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전나무숲 길을 못 본 체할 수는 없으니까.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걸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일주문을 지나 들어선 울창한 숲길, 제일 먼저 다람쥐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그러고 보니 눈뜨고 지금까지 불쑥 내 시간에 끼어든 존재라곤 이 녀석들이 처음이다. ‘그래, 너희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어’라고 내 안의 누군가 말하는 듯하다. 목적 없는 순수한 마주침에 마음이 풀려서일까. 한 녀석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렇게 아침 산책은, 소란하지 않은 만남의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계곡과 숲이 주는 청량감은 덤이었다.

오후
정오에 가까워 숙소로 돌아와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워 지친 다리를 쉬었다. 혼자만의 시간은 모든 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있어서, 무엇보다 충분히 쉴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지친 몸과 마음이 ‘이제 됐어, 충분해’라고 말할 때까지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까. 바쁜 일상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자연에선, 혼자 있는 시간에는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오후 일정은 두 가지로 정했다. 책 보기와 스님께 차 한잔 얻어 마시기. 먼저 가지고 간 책을 펼쳐 들었다. 역시 이런 곳에선 잔잔한 에세이가 제격. 창가에 기대어 앉아 나른한 오후의 독서 삼매경에 빠져본다. 문득, 언제부턴가 책 읽기가 힘들어졌던 건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낯선 주변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별일 없는 바깥 풍경, 그 곁에서의 독서는 시선을 다른 곳에 빼앗길 일이 없었다. 한참 있다 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산과 나무, 달라질 것 없으니 안심하라는 듯 눈길을 재촉하지 않는다. 책장이 넘어간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책을 덮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신선한 공기를 한 모금 들이켜자 다시 몸에 활기가 돌았다. 때마침 마실 나온 스님을 만나 함께 걸었다. 바깥세상 사는 얘기, 절집 사는 얘기를 서로에게 들려주며, 서로 하는 이야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걸었다. 다실에 마주 앉아 스님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둘 사이엔 여백이 많았다. 그래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할 말이 떠오르면 하고, 상대방이 말하면 잠자코 들어준다.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에 공감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게 꼭 맞장구치는 말이거나 덧대는 말로 돌아올 필요는 없지 않을까. 때론 가만히 들어주는 침묵만으로 도 깊은 위안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가끔은 이렇게 쉬세요.” 스님의 말씀, 손에 쥔 커피잔처럼 따듯하다.

그리고, 밤
산중의 밤은 빠르게 깊어간다. 해가 산마루를 넘자마자 재깍 어둠이 깔린다. 방 한편에 명상하라고 만들어둔 작은 공간에 좌복을 깔고 앉았다. 평소에 하지도 않던 명상을 해보겠다고 폼 잡고 앉은 것은, 물론 아니다. 짧지만 오늘 하루 동안, 내안에 쌓여 있던 뭉치들이 얼마나 비워지고 가벼워졌을까 따져볼 요량이었다.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 화, 그리고 머릿속을 맴돌던 온갖 상념들을 돌아볼 참이었다. 편하게 앉아 숨을 고르고, 고요하게 ‘나’를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없다. 텅빈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많던 생각과 감정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매일 무겁게 짓누르던 삶의 무게와 피로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루 사이에 그 많은 것들을 단숨에 날려버렸단 말인가. 그럴 리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 그렇다면 그걸로 된 거다. 굳이 더 파고들 이유가 없다.
그러고 보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언제고 일상을 떠나 익숙하던 것들과 멀어진 채 텅 빈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테다. 그곳이 어디든, 숲이든 바다든, 낯선 공간이든 익숙한 공간이든, 그곳에 완전히 젖어 들어 그저 행복하고 편안한 감정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느끼지 않았던 적이. 그래서 다들 일탈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망각이라 부를 수도,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공(空)함을 체험하는 순간이라 말할 수도 있는 그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물론 그 경험의 끝은 어김없이 현실이고, 시간이 지나 다시 수많은 응어리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러다 넘쳐 흐르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지면? 다시 떠나자. 자연으로. 자연은 언제든 선뜻 제 품을 선뜻 내어줄 테니까.

 

문의 

오대산자연명상마을 옴뷔(OMV)
www.omv.co.kr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312
033)333-6500

 

 

양민호  bulkwan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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