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에세이] 통일 신라 문화를 활짝 연 걸출한 예술가, 양지(良志) 스님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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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에세이] 통일 신라 문화를 활짝 연 걸출한 예술가, 양지(良志) 스님과 만나다
  • 강우방
  • 승인 2019.07.2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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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중앙상(복원도: 필자)

일본에서 돌아와 왕릉과 사지 발굴 현장을 분주히 다니던 중 사천왕사 터에서 출토된 소조사천왕 부조상(塑造四天王 浮彫像)의 단편들을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조각들이 매우 뛰어나서 조형적으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서로 쟁투하면서도 눈부신 문화를 이룩했던 삼국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당나라는 바다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신라를 정복하려 했지만, 신라는 신유림(神遊林) 터에서 명랑법사에게 청하여 밀교의 문두루(文豆婁) 비법을 베풀어 적을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바야흐로 통일 신라 문화의 화려한 개막이 임박하고 있었다.

당나라 대군을 물리쳤던 바로 그 장소에 호국사찰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기념비적인 사천왕상을 만들었다. 문무왕 19년 679년 사천왕사를 낙성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문무왕 10년 도교의 오방신을 나무로만들어 그 위력으로 당나라 대군을 두 차례나 물리쳤고, 이 오방신을 불교의 방위신인 사천왕상으로 대체해 만들어 모신 곳이 바로 사천왕사니 670년부터 이미 창건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서라벌의 분지 남쪽에 있는 낭산(狼山) 남쪽 기슭에 사천왕사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나라의 개막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사천왕사 폐허에서 흩어졌던 사천왕상 파편들을 오랫동안 수집해 모두 한곳에 모았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여러 사립대학박물관과 개인 소장 등에서 일체를 모아 파편들을 연구실 한 자리에 펴놓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모두 60개였다. 유약 색과 경도(硬度)와 조형들을 살펴 조각상을 분류해 보니 제1상이 18종류, 제2상이 22종류, 제3상이 19종류, 제4상이 1종류였다. 제4상에 해당하는 파편이 거의 없어서 이상했다. 사천왕상이라면 제4상에 해당하는 파편들도 여럿 있어야 하는데 겨우 하나만을 분별했을 뿐이었다.

당시 이점에 대해 참으로 이상한 수수께끼라고 논문에 써놓았는데, 훗날 그 전모가 드러났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하면 발굴 결과 ‘북방 다문천(北方 多聞天)’을 제외한 세 개의 상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세 개의 상으로 사천왕상을 만든 예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그렇다고 삼천왕상이라고 쓸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사천왕상 범주에 든다. 그러면 왜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을 만들지 않았을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한편 각각의 조각상은 진흙을 이용해 틀에서 같은 상 20개 이상을 떠내 만든 것으로, 두께가 비교적 얇고 진흙으로 만들어 구운 것이라 파손되기 쉬웠다. 아마도 이처럼 산산조각이 난 것은 고려 시대까지 대표적 호국사찰로 문두루 비법을 계속 베풀어 온 이곳을 몽고가 침입해 사찰의 중심인 목탑을 파괴하면서 함께 훼손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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