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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에세이] 통일 신라 문화를 활짝 연 걸출한 예술가, 양지(良志) 스님과 만나다

일본에서 돌아와 왕릉과 사지 발굴 현장을 분주히 다니던 중 사천왕사 터에서 출토된 소조사천왕 부조상(塑造四天王 浮彫像)의 단편들을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조각들이 매우 뛰어나서 조형적으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도1 중앙상(복원도: 필자)

 

도2 좌측상(복원도: 필자)

 

도3 발구 후 복원도로 채색분석(강우방)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서로 쟁투하면서도 눈부신 문화를 이룩했던 삼국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당나라는 바다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신라를 정복하려 했지만, 신라는 신유림(神遊林) 터에서 명랑법사에게 청하여 밀교의 문두루(文豆婁) 비법을 베풀어 적을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바야흐로 통일 신라 문화의 화려한 개막이 임박하고 있었다.

당나라 대군을 물리쳤던 바로 그 장소에 호국사찰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기념비적인 사천왕상을 만들었다. 문무왕 19년 679년 사천왕사를 낙성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문무왕 10년 도교의 오방신을 나무로만들어 그 위력으로 당나라 대군을 두 차례나 물리쳤고, 이 오방신을 불교의 방위신인 사천왕상으로 대체해 만들어 모신 곳이 바로 사천왕사니 670년부터 이미 창건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서라벌의 분지 남쪽에 있는 낭산(狼山) 남쪽 기슭에 사천왕사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나라의 개막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사천왕사 폐허에서 흩어졌던 사천왕상 파편들을 오랫동안 수집해 모두 한곳에 모았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여러 사립대학박물관과 개인 소장 등에서 일체를 모아 파편들을 연구실 한 자리에 펴놓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모두 60개였다. 유약 색과 경도(硬度)와 조형들을 살펴 조각상을 분류해 보니 제1상이 18종류, 제2상이 22종류, 제3상이 19종류, 제4상이 1종류였다. 제4상에 해당하는 파편이 거의 없어서 이상했다. 사천왕상이라면 제4상에 해당하는 파편들도 여럿 있어야 하는데 겨우 하나만을 분별했을 뿐이었다.

당시 이점에 대해 참으로 이상한 수수께끼라고 논문에 써놓았는데, 훗날 그 전모가 드러났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하면 발굴 결과 ‘북방 다문천(北方 多聞天)’을 제외한 세 개의 상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세 개의 상으로 사천왕상을 만든 예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그렇다고 삼천왕상이라고 쓸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사천왕상 범주에 든다. 그러면 왜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을 만들지 않았을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한편 각각의 조각상은 진흙을 이용해 틀에서 같은 상 20개 이상을 떠내 만든 것으로, 두께가 비교적 얇고 진흙으로 만들어 구운 것이라 파손되기 쉬웠다. 아마도 이처럼 산산조각이 난 것은 고려 시대까지 대표적 호국사찰로 문두루 비법을 계속 베풀어 온 이곳을 몽고가 침입해 사찰의 중심인 목탑을 파괴하면서 함께 훼손되었을 것이다.

 

도4 좌측상 원 작품, 파편 모은 것
도5 중앙상 원 작품, 모은 것
도6 우측상 원 작품, 파편 모은 것


나는 1977년 혼신을 다해 이 사천왕상 복원도를 그렸다. 작품 위에 가로세로 줄을 쳐놓고 1mm도 틀리지 않게 방안지에 정교하게 그렸다. 그렇게 6개월 걸려 복원도를 완성하고, 이후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사천와상의 복원적 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이 후에 『미술자료』 제25호(1980년)에 실렸다. 나의 대표 논문 가운데 하나인 이 논문을 쓰는 동안 사천왕상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재탄생했고, 통일 신라 문화를 화려하게 열어젖힌 걸출한 조각가 양지(良志)스님과 나는 영적(靈的)으로 교류하는 듯했다.

안타까운 점은 새 시대 첫 걸작품의 복원도를 겨우 두 상만 그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머지는 파편이 넉넉지 않아 전체 복원도를 그리기가 불가능했다. 한 점이 파손되었다면 짜 맞추기가 쉬우나 틀을 만들어 한 상을 수십 개로 만든 것이라 파편이 중복되어 복원도를 그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충분한 파편들이 있어 복원 가능했던 두 상의 복원도는 다음과 같다(도1, 도2). 복원도에 비어 있는 부분은 파편이 없어서 그대로 빈 공간으로 남겨 두었다. 아무도 몰랐던 통일 초의 기념비적인 조각품의 복원도가 세상에 나타나자 학계에 탄성이 가득했다. 크기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략 높이 90센티미터, 폭 70센티미터, 두께 8센티미터이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나 2006년부터 2012년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하며 수많은 파편이 출토되었고 동시에 나의 논문도 새삼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7년에 걸친 발굴 결과로 수많은 사천왕상 파편이 발견되어 완벽한 복원도가 가능하게 되었다. 완벽한 복원도를바탕으로 채색분석이 가능했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도3). 사천왕상은 녹유를 사용해 제작한 것이라 색이 한 가지여서 복원해 놓아도 시각적으로 조형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도4, 도5, 도6). 그래서 개발한 해독 방법이 채색분석법이다.

나는 지금까지 15년간 채색분석법을 통해 1만 점이 넘는 작품을 해독해 왔다. 이 채색분석으로 단계적으로 분석할 때 비로소 작품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나는 문양화한 작품에서 시작점과 종착점이 있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고, 이 채석분석을 통해 단계적으로 작품 설명이 가능해진다는 것 역시 알아냈다. 이는 세계 미술사학 연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써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채색분석법으로 해독한 사천왕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원래는 수십 단계를 거쳐 채색분석을 해 실어야 하는데, 지면의 한계로 마지막 단계만 싣는다.“시작점은 먼저 위 양쪽에 있는 ‘제3영기싹 영기문’이고, 그다음이 ‘영기창’의 용과 마카라[한국과 중국의 용에 해당하여 만물 생성의 근원이므로 입에서 만물 생명이 모두 나온다]이다. 거기에서 모든 조형이 화생(化生)한다. 사천왕 도상은 허상이고 사천왕상
으로부터 강력한 영력이 발산한다는 것이 실상이다.”

이처럼 설명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 필자가 사람들이 무엇인지 모를 모든 조형에 나의 이론에 따라 부여한 이름들이고 해석이다. 처음 듣는 설명이고 용어들이지만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작품의 둥근 위 테는 두 용으로 구성되어있어서 양쪽 용의 입에서 각각 기둥이 나오고, 밑 부분에는 인도의 마카라가 둘 있어서 역시 양쪽 입에서 기둥이 나와 오르고 있어서 용의 입에서 나와 내려오는 기둥과 만나 하나가 된다. 윗부분 두 용이 만나는 자리에서 강력한 영기문(靈氣文), 즉 생명 생성의 근원이 위로 솟구친다. 그 테
를 필자는 작은 것은 영기창(靈氣窓), 큰 것은 영기문(靈氣門)이라 부른다. 중간중간에 있는 빨갛고 둥근 것은 모두 보주다. 보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보석이 아니고 우주를 압축한 핵과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임을 필자가 처음 밝혔다. 그 아치 모양 영기문에서 사천왕상이 현신한다. 이 상을 보면 두 악귀를 깔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온몸에서 여러 갈래의 천의가 날리고 있다. 왼손으로는 활을 쥐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화살을 쥐고 있다.

투구나 갑주, 다리의 무장도 모두 영기문으로 이루어졌고, 악귀마저 영기문으로 영화시켰다. 이런 낯선 용어로 모든 조형을 설명하게 될 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동아시아의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뛰어난 백미(白眉)로 꼽힌다. 복원도를 그릴 때는, 이 사천왕상이 목탑의 초층 내부 네 면에 장엄됐으리라 생각했고, 각각 10개 이상 찍어내어 만들었으므로 사찰 내 여러곳에 봉안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는 탑 아래 팔부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통 석탑 기단에 팔부중을 조각하기 때문에 어느 학자는 지금도 기록을 중시하여 팔부중을 고집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발굴이 끝나고 사천왕상의 복원도를 완성하고 발굴단에서 복원한 쌍탑 목조탑의 기단부를 보니, 기단부는 모두 벽전과 부조상으로 이루어졌고, 한 기단부 면의 가운데에 계단을 두고 양쪽에 각각 오직 3상만 배치했다(도7). 기단전체를 보고 여덟의 사천왕상이 세트로 배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세 상은 중앙상이 정면을 보고 있으며 좌우상은 얼굴을 좌우로 향하여 방위신임을 알 수 있다. 여덟 세트는 모두 같으므로 한 세트 3상을 채색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으며 사천왕상들 사이의 벽전 무늬도 모두 영기문으로 생명생성 근원을상징한다(도8).

당시에 <KBS역사스페셜>에서 통일 신라 문무왕의 출신을 흉노의 후예라고 하는 방송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주에는 왕릉이 많은데, 특히 국민의 숭앙을 받았던 왕릉 앞 용부 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웬일인지 모든 비석을 박살 내서 돌 에 새긴 역사 기록을 의도적으로 지우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발굴해 보면 작은 파편들 몇 개 출토될 뿐인데 반드시 맨 처음 부분에 성한(星漢)이 시조로 되어 있다. 박혁거세가 아니고 ‘成韓’, 혹은 ‘聖韓’이나 ‘成漢’인데 그는 누구인가가 학계의 관심사였다. 김씨 시조가 김알지(金閼智)인데, 그 아들이 세한(勢漢)이어서 성한은 세한의 아버지인 김알지(金閼智)여야 한다. 신화적 인물인 김알
지와 세한은 같은 존재로 보아야 한다. 신화화한 인물의 아들이 태조가 될 리 없다. 문무왕 이래 왕들은 모두 비문의 서두에 성한을 태조로 삼고있다. 그렇다! 바야흐로 김씨 왕조다. 비록 국호는 신라로 같지만 새로운 왕국의 탄생이다. 일찍이 중국은 강력한 흉노족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고 낮추어서 흉악한 이름인 흉노(匈奴)라 불렀지만, 세계사에서는 투르크족이 스텝 지역에 건설한 최초의 제국으로 ‘훈 제국(The Hun Empire)’이라 부르고 있으니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도7 목탑 기단부: 복원 모식도

만리장성은 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1,000년 걸려 쌓은 성으로 훈 제국은 기원전 318년부터 기원후 557년까지 (비록 때때로 명멸이 있었지만) 875년간 존속했던 대제국이었다. 실크로드 무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중국과 각축을 벌여왔던 제국이었다. 훈 제국의 휴도왕(休屠王)이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왕자인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가 포로가 되었지만, 한 무제의 사랑을 받아 산둥 반도 지방의 투후(秺侯, 투지방의 왕)에 봉해진다. 그 후손이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에 정착해서 통일 신라 왕들이 훈 제국의 후예가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역사학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경주에 머물며 체험한 바에 따르면,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런 확신을 가지게 한 것이 바로 사천왕사의 사천왕상이며, 북방 다문천이 없는 불가사의한 사천왕상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새 왕조의 정체성을 정립할 필요를 절감했으리라. 그리고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역사서에 없는 일을 꾸며서 기록한 일이 없었다. 하물며 모든 왕릉 비석에 그렇게 새겨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천왕사의 사천왕상이 그 진실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문득 통일신라 왕들은 북방 훈 제국의 후예이므로 북쪽을 방위할 필요가 없어서 북방 다문천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갔다. 통일 신라 왕조의 첫 왕이 훈 제국의 후손이므로 북방을방어할 필요가 없으며, 만일 만든다면 스스로를 공격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도8 서탑지 한 세트 3상 전체(채색분석)

그나저나 이렇게 뛰어난 조각상을 누가 조각했을까. 『삼국유사』에 양지(良志)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 미술품이 많지만 작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 사천왕상의 작가 이름을 알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가.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오직 선덕여왕 때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라 하는데, 사천왕사의 조각품과 기와들은 모두 그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선덕여왕 때가 아니라 문무왕 때 자취를 드러낸 예술가 이며 고승이었다. 조각가이자 와당의 장인이며, 서예가이자 고승이었고, 걸출한 예술가였던 그는 통일 신라 최초의 새로운 미술 양식을 창조한 혜성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사천왕사를 비롯하여 영묘사, 법림사, 석장사 등과 관련하여 장륙존상(丈六尊像), 사천왕상, 금강역사 등 많은 조각품을 만들었지만 남은 것이 없어 안타깝다. 더구나 그는 와당의 명장으로 통일 초의 화려한 와당은 그의 출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진흙을 잘 다루던 조소(彫塑)의 대가였다.

사천왕상 복원 작업이 끝나자 1978년 최순우 관장님이 서울로 부르셨다. 곧 일본으로 다시 떠나라는 것이다. 일본 교토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3개월 도쿄국립박물관에 가라는 것이었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삭막한 한국의 산하를 내려다보았다.

 

글. 강우방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

 

 

강우방  bulkwan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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