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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에세이] 수많은 유적 발굴 현장에서 치열하게 학문의 기초를 다지다

1976년 여름에 귀국하여 박물관과 경주 일대를 둘러보니 문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 박물관 조직과 시설이나 학계직도 나 혼자뿐이라 너무 빈약했고, 도서실도 없고 보존 처리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경주 시민의 무관심이 더 두려웠다. 지난 1년간 나는 세계의 엄청난 작품들을 보았고, 불상 조각 공부도 시작하여 가기 전보다 부쩍 성숙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1년 전의 이곳저곳 어수선한 발굴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도 조직이 빈약하여 대체로 임시직이 중요한 발굴의 실질적 책임자들이어서 허술한 점이 많았다.

한 해 만에 서라벌 분지를 둘러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남쪽으로는 금오산(金鰲山, 흔히 남산이라 부르지만 속칭)이 저 멀리 나지막이 누워 있는데 옆으로 보면 남북으로 우람하게 길다. 서쪽으로는 어머님 품처럼 아늑한 아름다운 삼각형 모양의 선도산(仙桃山)이 자리 잡아 저녁 해 질 녘 붉은 해가 걸리는 광경이 감동적이라 경주 팔경 중 첫째로 꼽는다. 동으로는 멀리 명활산(明活山)이 자리 하고, 북쪽으로는 소금강산(小金剛山)이 있어 분지를 이루고 있다. 남북으로는 형산강 줄기가 흐르고 북에는 북천이, 남쪽으로는 남천이 월성(月城, 半月城은 속칭)을 끼고 굽이쳐 흐른다. 집이 서부동에 있어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하고 걸어서 가기도 했다. 걸어서 가면 왕릉들 사이를 지나 첨성대를 바라보며 계림에 들러 박혁거세의 금궤가 걸렸음 직한 고목을 둘러보고, 월성에 올라가 궁궐터를 가로질러 남천을 내려다보면 가파른 성벽 아래 숲 사이로 내가 유유히 흐르는데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리라. 내려가면 바로 박물관 정문이 나오고 들어서면 바로 우람한 성덕대왕 신종이 보이고 옆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높은 석등이 신종과 잘 어울리고 있다. 마당에는 크고 작은 불상 조각품들이 즐비하고, 옮겨온 탑신들에는 뛰어난 솜씨로 조각한 사천왕상들이 아침 햇살에 보석같이 빛나고 있었다. 박물관 정문은 불가피하게 동북쪽에 나 있어서 들어서면 남쪽으로 박물관이 펼쳐지고, 그 끝에 다다르면 저수지 공사로 물에 잠기게 된 고선사 터에서 옮겨온 원효대사 석비가 서 있던 용부(龍趺, 龜趺가 아니다)와 우람한 고선사 석탑이 서 있다. 그 너머로 수많은 계곡이 있고 계곡의 바위마다 수많은 불상이 새겨진 금오산이 코앞이다. 파란 하늘이 끝도 없이 높고, 천혜의 자연은 1,000년 신라인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득히 품고 있으니, 그 대지를 매일 밟고 거니는 행복을 어디에 비하랴. 이런 곳이 세계에 어디 있으랴. 신라 1,000년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니 훗날 인류가 창조한 조형 예술품 일체를 풀어내게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한 마을이 되었으니, 신라 문화에 고구려와 백제 문화가 융합되었기에 고구려 무덤 벽화도 완벽히 풀 수 있었으리라.

신라 최대의 목탑과 함께 삼국통일을 염원하여 지은 대표 호국사찰 황룡사가 643년 세워졌다(도1). 1976년 4월에 이미 황룡사 대찰 터를 발굴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대형 크레인으로 30톤의 심초석을 들어 올리는 것을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다(도2). 심초석을 들어 올리니 그 밑에 사리함을 삼은 거대한 바위 표면이 다듬어져 있었다. 황룡사 터에는 작은 마을이 있어서 원래 그 심초석 위에는 초가집의 담이 지나고 있었다. 그 담 때문에 도굴할 수 없어서 사리함이 온존할 수 있었다. 1964년 문화재위원회가 이 담을 치우자고 결정하는 자리에 동행했다. 그런데 문화재위원 원로 한 분이 도굴꾼 한 사람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의아했다. 곧 담을 헐자 도굴꾼들이 심초석을 들고 사리장엄구를 탈취했으니, 마음대로 도굴하라고 담을 헐어준 셈이 되었다.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었다. 작키(작은 기중기)를 이용하여 심초석을 들어 올리고 사리장엄구만 이미 탈취했는데, 심초석을 크레인으로 올리고 보니 사리함 돌 뚜껑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사리함은 텅 비어 있었다. 황룡사 발굴은 1983년에 끝났으며, 발굴의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황남대총 발굴은 1973년 시작해서 1975년에 마쳤는데, 그 과정을 다 지켜보고 일본 연수를 떠났다. 천마총 발굴과 함께 황남대총 발굴을 살펴보는데 왕의 장신구와 부장품들이 항상 경이적이었다. 훗날 나는 금관의 비밀을 풀어낸 「옥룡론과 금관론」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고고학자들은 그런 상징을 풀어낼 수 없어서 형이상학적인 해석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고고학과 미술사학 사이에 있는 철벽을 부숴버리리라 결심했고, 고고학의 연구 대상을 논문들로 썼지만 고고학계는 침묵뿐이었다.

귀국하여보니, 통일신라가 열리면서 월성을 확장해 월지(月池, 속칭 안압지)를 조성하고 부속 궁궐 건축들을 지었던 그 월지 발굴이 한참이었다. 동궁(東宮) 터라 하나 규모는 끝없이 이어져 딱히 동궁지라고만 말할 수도 없다. 월지 부근을 모두 발굴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최근까지도 이어진 유적이 끝이 없어서 아직 끝나지 않은 발굴이다. 월지는 인공으로 만든 신라의 원지(苑池)로 그 기원은 중국 한(漢) 시대로 올라간다. 규모는 작지만, 중국 것을 재현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부족으로 발굴이 아닌 준설 작업으로 일을 진행했는데,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크레인으로 바닥을 훑어 내고, 300여 명의 작업인이 투입돼 준설 작업을 실시하는데 마치 전쟁터 같았다. 그러다 불쑥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나를 감독관으로 임명하는 공문서를 보내왔으나 거절했다. 이미 파괴된 유적이기 때문이다. 준설 작업 과정에서 놀란 것은, 인공으로 만든 원지 가의 높은 축대 위에 서 있던 건물들이 화재로 쓰러져 내렸던지 연못에 떨어진 기와들이 즐비했다. 예를 들면 수막새와 암막새가 한 세트가 된 채로 그대로 드러나 있기도 하여 감격했다. 수많은 와당과 금동불상이 출토되었고 건물 목재도 발견되고 목간도 출토되었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1층 ‘월지관’ 전시관에 들어가 보면 얼마나 중요한 유적인지 절감할 것이다.

금동판불(도3)은 처음 보는 형식이었고 통일신라 초기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뛰어났다. 발굴이 끝나고 월지 출토 불상들에 대한 보고서를 필자에게 의뢰했다. 보고서를 쓰면서 처음으로 ‘보주’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주‘라는 말은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일본은 물론 동서양 학자들 누구도 그 본질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자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구슬 주(珠)를 쓴 것이나 구슬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당시 월지에서는 매우 작은 불상들이 대량 출토되었는데, 여래가 있을 자리에 보주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보주가 곧 여래’라는 확신을 처음 가졌다. 그로부터 40여 년 그 상념이 지속되어 보주의 실상을 철저히 증명하며 파악해가는 과정이 있었다. 결국 연구 대상이 넓어지는 과정에서 세계의 조형 예술품을 모두 풀어내는 데 보주가 결정적인 열쇠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필자의 학문적 역정은, 보주의 실상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밝혀나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도 4-1, 도 4-2). 앞으로 보주에 대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한편 통일신라 초의 가장 오래된 석탑이 있는 감은사 터 발굴은 1975년 시작돼 1년 만에 끝났는데, 너무 성급하게 발굴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사역은 넓지 않으나, 사후 동해의 용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유언을 남겼던 문무왕과 관련된 곳이라 의미가 큰 곳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 밑에 들어와 머문다고 쓰여 있는데, 발굴해 보니 과연 금당 밑에 다른 사찰에 없는 넓은 공간을 석조로 꾸며 놓아서 놀랐다. 그렇게 감은사가 세워진 지 900여 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이 우리 강토 전역을 유린하고, 1,200여 년 후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가. 역사 교과서에는 ‘일제강점기’라 하나 ‘일본 식민지 시대’라고 솔직히 말해야 한다. 그 호국용은 지금 나의 연구원에서 20년째 연구해오며 세계의 모든 조형 예술 작품들을 풀어내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신라용이 세계 문화 위에 군림하고 있으니, 아마도 문무왕의 소원이 더 크게 이루어져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이렇게 경주에서의 나의 삶은 수많은 유적 발굴을 통해 출토된 작품들을 매일 생생하게 바라보고, 혹은 놀라고 감격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바쁘게 살았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은총이었다. 언제 또 그런 시간이 올 것인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경주를 택한 것은 운명적이었고 훗날 세계 문화를 선도하게 되리라고는 물론 상상도 못 했다.

황룡사 구층탑 터를 발굴할 때가 생각난다. 그때 탑 기초를 보고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지역은 서라벌 중심지로 원래 궁궐을 지으려다가 황룡(黃龍)이 나타나 절을 창건하고 황룡사라 이름 짓고 삼국통일을 염원했던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목조 탑! 규모가 그리도 크고 높으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는 얼마나 깊고 넓었을까. 나는 바로 그 기초 발굴 현장에 있었다. 신라 기술자들은 먼저 대지 조성토를 되파기하고 냇돌과 마사토를 층별로 번갈아 가며 20여 층가량 쌓아 다진 판축 기법으로 목탑지 기초 층을 조성했다. 이를 통해 수백 톤의 지상 건조물을 지탱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 판축 기법은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阿非知)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지만 백제에는 그런 대규모 목탑이 없다. 맨 밑으로부터 마사토 층을 만들어 달고(달구)로 다지고, 다시 자갈층을 만들어 다지고, 다시 마사토 층을 만들어 다지기를 20여 층, 그 튼튼한 기초 위에 80미터 높이의 목탑을 세웠으니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인간의 삶이나 학문, 예술도 그렇게 튼튼한 기초가 있어야 그 위에 마음 놓고 얼마든지 계속하여 드높은 삶의 체험 탑을 세워 올릴 수 있다.

나는 그런 기초 작업을 중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기초 작업이란, 어느 시기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닦아야 하는 것이라는 신념에 변함이 없다. 경주에서 수많은 왕릉, 그리고 중류층의 무덤들, 중요한 불교 사찰 터, 왕궁 터 발굴 등을 매일 지켜보며 나의 마음속에도 그런 체험들이 층층이 다져지고 있었다. 그런 유적들은 거의 모두 고고학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당시 모든 발굴을 빠짐없이 살펴본 미술사학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고고학자는 선사 시대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하며, 미술사학자는 유사 시대 유적과 작품을 연구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 둘 사이에 철벽이 세워진 듯 소통이 전혀 없었다. 나는 그 철벽을 부숴버리는 작업을 한 지 오래되었다. 그 일환으로 고고학 연구 대상 작품들에 대한 논문을 계속 써오고 있다. 문자 기록이 있는 역사서를 기준으로 두 분야를 나누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임을 증명해 왔다.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는 조형 예술에 관한 한 연속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금관에 대한 논문도 쓰고, 아무도 풀지 못하고 있는 곡옥(曲玉)에 대한 논문도 쓰고,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 대하여 강연하기도 했다. 나아가 백제의 무령왕릉 발견품에 대한 논문도 다수 썼다.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구별하는 작업은 일종의 학문적 죄악이라 생각한다. 선사 시대 문제는 역사 시대 작품에서 풀리기도 하고, 역사 시대 문제는 선사 시대 작품에서 풀리기도 함을 알았다. 그렇게 나의 학문적 기초는 경주 생활에서 치열하게, 튼튼히 다져지고 있었다.


글_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

양민호  bulkwan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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