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에세이] 수많은 유적 발굴 현장에서 치열하게 학문의 기초를 다지다
상태바
[강우방 에세이] 수많은 유적 발굴 현장에서 치열하게 학문의 기초를 다지다
  • 양민호
  • 승인 2019.07.01 17: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76년 여름에 귀국하여 박물관과 경주 일대를 둘러보니 문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 박물관 조직과 시설이나 학계직도 나 혼자뿐이라 너무 빈약했고, 도서실도 없고 보존 처리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경주 시민의 무관심이 더 두려웠다. 지난 1년간 나는 세계의 엄청난 작품들을 보았고, 불상 조각 공부도 시작하여 가기 전보다 부쩍 성숙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1년 전의 이곳저곳 어수선한 발굴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도 조직이 빈약하여 대체로 임시직이 중요한 발굴의 실질적 책임자들이어서 허술한 점이 많았다.

한 해 만에 서라벌 분지를 둘러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남쪽으로는 금오산(金鰲山, 흔히 남산이라 부르지만 속칭)이 저 멀리 나지막이 누워 있는데 옆으로 보면 남북으로 우람하게 길다. 서쪽으로는 어머님 품처럼 아늑한 아름다운 삼각형 모양의 선도산(仙桃山)이 자리 잡아 저녁 해 질 녘 붉은 해가 걸리는 광경이 감동적이라 경주 팔경 중 첫째로 꼽는다. 동으로는 멀리 명활산(明活山)이 자리 하고, 북쪽으로는 소금강산(小金剛山)이 있어 분지를 이루고 있다. 남북으로는 형산강 줄기가 흐르고 북에는 북천이, 남쪽으로는 남천이 월성(月城, 半月城은 속칭)을 끼고 굽이쳐 흐른다. 집이 서부동에 있어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하고 걸어서 가기도 했다. 걸어서 가면 왕릉들 사이를 지나 첨성대를 바라보며 계림에 들러 박혁거세의 금궤가 걸렸음 직한 고목을 둘러보고, 월성에 올라가 궁궐터를 가로질러 남천을 내려다보면 가파른 성벽 아래 숲 사이로 내가 유유히 흐르는데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리라. 내려가면 바로 박물관 정문이 나오고 들어서면 바로 우람한 성덕대왕 신종이 보이고 옆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높은 석등이 신종과 잘 어울리고 있다. 마당에는 크고 작은 불상 조각품들이 즐비하고, 옮겨온 탑신들에는 뛰어난 솜씨로 조각한 사천왕상들이 아침 햇살에 보석같이 빛나고 있었다. 박물관 정문은 불가피하게 동북쪽에 나 있어서 들어서면 남쪽으로 박물관이 펼쳐지고, 그 끝에 다다르면 저수지 공사로 물에 잠기게 된 고선사 터에서 옮겨온 원효대사 석비가 서 있던 용부(龍趺, 龜趺가 아니다)와 우람한 고선사 석탑이 서 있다. 그 너머로 수많은 계곡이 있고 계곡의 바위마다 수많은 불상이 새겨진 금오산이 코앞이다. 파란 하늘이 끝도 없이 높고, 천혜의 자연은 1,000년 신라인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득히 품고 있으니, 그 대지를 매일 밟고 거니는 행복을 어디에 비하랴. 이런 곳이 세계에 어디 있으랴. 신라 1,000년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니 훗날 인류가 창조한 조형 예술품 일체를 풀어내게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한 마을이 되었으니, 신라 문화에 고구려와 백제 문화가 융합되었기에 고구려 무덤 벽화도 완벽히 풀 수 있었으리라.

신라 최대의 목탑과 함께 삼국통일을 염원하여 지은 대표 호국사찰 황룡사가 643년 세워졌다(도1). 1976년 4월에 이미 황룡사 대찰 터를 발굴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대형 크레인으로 30톤의 심초석을 들어 올리는 것을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다(도2). 심초석을 들어 올리니 그 밑에 사리함을 삼은 거대한 바위 표면이 다듬어져 있었다. 황룡사 터에는 작은 마을이 있어서 원래 그 심초석 위에는 초가집의 담이 지나고 있었다. 그 담 때문에 도굴할 수 없어서 사리함이 온존할 수 있었다. 1964년 문화재위원회가 이 담을 치우자고 결정하는 자리에 동행했다. 그런데 문화재위원 원로 한 분이 도굴꾼 한 사람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의아했다. 곧 담을 헐자 도굴꾼들이 심초석을 들고 사리장엄구를 탈취했으니, 마음대로 도굴하라고 담을 헐어준 셈이 되었다.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었다. 작키(작은 기중기)를 이용하여 심초석을 들어 올리고 사리장엄구만 이미 탈취했는데, 심초석을 크레인으로 올리고 보니 사리함 돌 뚜껑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사리함은 텅 비어 있었다. 황룡사 발굴은 1983년에 끝났으며, 발굴의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황남대총 발굴은 1973년 시작해서 1975년에 마쳤는데, 그 과정을 다 지켜보고 일본 연수를 떠났다. 천마총 발굴과 함께 황남대총 발굴을 살펴보는데 왕의 장신구와 부장품들이 항상 경이적이었다. 훗날 나는 금관의 비밀을 풀어낸 「옥룡론과 금관론」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고고학자들은 그런 상징을 풀어낼 수 없어서 형이상학적인 해석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고고학과 미술사학 사이에 있는 철벽을 부숴버리리라 결심했고, 고고학의 연구 대상을 논문들로 썼지만 고고학계는 침묵뿐이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