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에세이] 폐사지 그대로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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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 에세이] 폐사지 그대로 두라
  • 양민호
  • 승인 2019.07.0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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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서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100년 동안 탑신을 짓누르고 있던 콘크리트를 벗겨내고 해체·복원하는 데 무려 20년이 걸렸다. 공사 관계자들은 ‘석탑의 진정성을 확보하는 데 노력했다’고 자부했다. ‘진정성’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속 미륵사의 진정성도 확보했을까.

아니다. 우선 문화재 복원 역사에 최악의 사례로 꼽히는 동탑이 우뚝 서서 가람의 진정성을 훼손시키고 있다. 동탑은 서탑의 형태를 흉내 낸 모조탑이다. 졸속 공사로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면 좋겠다.”는 극언까지 들어야 했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는 당시 최고의 건축·공예 기술이 동원되었다. 신라 진평왕까지도 백공을 보내 도왔다.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어 완성한 미륵 신앙의 구심점이었다.

서탑이 제 모습을 찾았다지만 (여전히 원형 훼손 논란이 있지만) 1,400년 전의 신성한 공간 미륵사의 진정성은 찾아볼 수 없다. 막연하게 적당히 꾸며서는 공명을 일으킬 수 없다.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아 ‘탑이되 탑이 아닌’ 동탑의 운명 또한 기구하다. 하루빨리 동탑은 해체해야 마땅하다. 졸속으로 복원된 것들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

폐사지 보원사를 찾은 적이 있었다. 보원사는 서산마애삼존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 초입에 드넓은 터만 남아 있다. 보원사는 통일신라 시대 화엄십찰 중 하나였다. 고려 광종 때 왕사였던 법인국사 탄문 스님도 이곳에서 입적했다. 탄문 스님이 보원사로 떠나던 날, 광종은 태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개성의 교외까지 나와 스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본찰인 보원사를 포함 99개 암자로 이뤄진 화엄도량이었고 1,000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보원사가 언제 어떤 이유로 쇠락했는지 알 수 없다. 지금은 석탑과 석조, 당간지주, 법인국사보승탑과 비(碑) 등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출토된 국내 최대 고려철불좌상과 철조여래좌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앉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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