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 개론]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을 부정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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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불교 개론]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을 부정했는가
  • 양민호
  • 승인 2019.07.0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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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뜨만은 있는가, 없는가’라는 질문에 침묵을 지킨 세존(=석가모니)은 그 까닭을 묻는 아난에게] 대답하셨다. “‘아뜨만은 있다(=유아)’고 대답하면 상주론자와 같게 되고, ‘아뜨만은 없다(=무아)’고 대답하면 단멸론자와 같게 된다.” - 『상윳따 니까야』 44.10

“모든 부처님은 ‘아뜨만이 있다’고 잠정적으로 설하셨다. ‘아뜨만은 없다’고도 설하셨다. ‘아뜨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도 설하셨다.” - 『중론』 제18장 관법품 제6게송

불교를 공부하는 바람직한 태도

‘무아(無我)’의 기본적인 뜻은 ‘아(我), 즉 아뜨만(ātman)은 없다’이다. 아뜨만은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의 우빠니샤드 철학에서 그 존재를 주장한 것으로, 우선은 ‘나’·‘자아(自我)’를 뜻한다고만 알아 두자. 석가모니는 무아(無我)를 가르쳤고, 따라서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일반 불교인들은 알고 있다. 석가모니는 과연 바라문교의 아뜨만을 부정했을까?

사람은 처음에 안 것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직전 호에서 동일한 물건을 두고 할머니는 요강이라고 고집하는데 손자는 양념 단지라고 우기는 일화를 이야기한 바 있다. 두 사람의 견해가 이렇게 다른 것은, 할머니는 처음에 그것을 요강이라고 알았던 반면 손자는 양념 단지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최초로 머리에 입력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불교를 처음 배울 때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을 부정했다고 알았다면, 더구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단체와 친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면, 그것과 배치되는 견해는 무시하거나 저항하려 드는 것이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안 것’에 대한 집착은 부와 지위와 명예에 대한 집착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심각할 수 있다. 자신의 가치관, 어떤 사람에 대한 본인의 평가, 늘 해 오던 일의 방식 등을 좀처럼 쉽게 바꿀 수 없지 않는가? ‘안 것’에 대한 집착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죽고 잔상 없는 맑은 눈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 때 진실은 보인다.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셨을까? 이에 대해 쟁쟁한 세계적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그 아뜨만을 부정했다는 주장은 물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는 주장,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초기 경전인 아함과 니까야 등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아함이나 니까야 등에는 동일 주제에 대해 일치된 하나의 내용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치되는 내용도

담겨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사정은 부파불교의 논서 간에도, 대승불교에 속하는 경전이나 논서 간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경전이나 논서 등 1차 자료 간에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있게 된 역사적 이유는 불교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연재들에서 설명했다. 문제는 위와 같이 서로 다른 주장들을 접하게 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에 있다. 어떻게 해야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앞으로 불교를 공부해 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인 ‘중도(中道)’를 실천하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중도는 ‘양극단에 치우침이 없는 바른 길’을 뜻한다. 여기서 치우침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과 저것, 양자 모두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곳에 저절로 나타나는 사고방식이자 삶의 방식이다.

1과 3의 중도는 양자의 단순 평균인 2가 아니다. 1이나 3,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것이 중도다. 허공은 불에도 타지 않고 비에도 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에 대해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새로운 내용,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거기에서 자유롭게 되어 접근하는 것도 중도의 실천이다.

학자 간에 주장이 달라 일반인에게는 다소 까다로울 수 있는 아뜨만의 문제를 굳이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으로 유사한 상황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바람직한가에 대한 단서를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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