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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작가들의 한 물건] 커피, 그리고 피넛버터 토스트

아름다운 꿈을 꿨다. 그곳은 바다처럼 넓은, 어쩌면 바다와 이어진 수영장이었고, 청록색 맑은 물에서 나는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헤엄쳤다. 잠수를 해 깊이 가라앉았다가 이내 수면까지 올라와 잘게 부서진 햇살 조각들을 바라봤다. 물속에는 커다란 나비들이 꽃처럼 떠다녔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웃고 있었다. 물속에서의 부드러운 움직임. 그 여운을 몸 안에 오래 붙잡아두고 싶었다. 한동안 그렇게 누워 있다 꿈속의 감각들이 달아나기 전에 ‘꿈 일기’를 썼다. 오래전, 높은 언덕에서 그네를 타며 황금빛 바다를 내려다보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것과 함께 오래도록 아름다운 꿈으로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꿈을 꾸는 날도 있지만 대개는 불면의 밤이다. 세포가 분열하듯 도무지 멈출 줄 모르고 끊임없이 가지를 뻗어대는 ‘생각들’ 때문에 잠이 들지 않고, 어떤 날은 ‘그때 왜 그랬지’ 하는 후회와 반성으로, 어떤 날은 미래가 두려워서, 어떤 날은 갑자기 심장이 멈춰버리지 않을까 겁이 나서, 어떤 날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감으로, 어떤 날은 원인이 명확한 우울감으로 잠을 잘 수가 없다.

또 어떤 날은, 왜 어떤 인간들은 도무지 부끄러움이라는 걸, 반성이라는 걸 모르고 뻔뻔하게 살아가는 걸까. 왜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타워크레인에 올라가야 하고, 왜 어떤 젊음들은 컵라면이 담긴 가방을 남긴 채 허망하게 세상을 떠야 하는 걸까. 왜 어떤 아이들은 전쟁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자라야 하고, 왜 보호받아야 마땅한 작고 여린 생명들이 학대를 당해야 하는 걸까. 왜 어떤 동물들은 실험실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해야 하고, 빠른 것과 편리한 것만이 답이 아닌데도 왜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숲이 그토록 처참한 죽임을 당해야 하는 걸까… 이렇게 ‘왜, 왜, 왜’ 하는 슬픔과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피곤하다.
그렇다. 나는 참, 피곤한 인간이다.

좋은 꿈을 꾼 날이든, 서서히 동이 터오는 것을 지켜본 날이든, 어쨌거나 아침은 온다. 이불에서 빠져나와 가볍게 몸을 풀고, 기도를 한다(나는 가톨릭 신자다. 매주 성당에 가지는 않지만, 매일 같은 기도로 아침을 시작한다). 가족 모두 평안한 하루를 보내기를. 작고 여린 생명들이 고통받지 않기를. 세상이 평화로워지기를. 기도가 끝나면 노래를 튼다. 한창 소설을 쓸 때는 매일 아침 같은 노래(최근에 들은 곡을 적어보자면 이런 것들이다. Rodrigo Leão의 Pasion이라든가 Mercedes Sosa의 Alfonsina Y El Mar 같은 노래)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기분 따라 매일 다른 노래로 하루를 시작한다.

선곡도 끝났으니 이제 아침 식사 시간. 먼저, 올 10월이면 열다섯 살이 되는 나의 늙은 강아지 ‘체리’와 작년 어린이날에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온 서너 살쯤 되는 ‘망고’에게 사료를 준다. 녀석들이 밥그릇을 다 비우면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칭찬을 하고 간식을 나눠준다. 강아지 물그릇을 비우고 깨끗이 씻어 새 물을 채워주고 나면, 이제 나를 위한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다.

빵을 좋아하는 나는 식빵의 경우 늘 냉동실에 꽉 채워둔다(냉장고에 식빵과 계란이 가득하면 어쩐지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식사 준비는 꽁꽁 언 식빵을 꺼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빵 두 조각을 꺼내 토스터에 가지런히 넣고 버튼을 누른다. 이 토스터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의인화하게 되는 몇 안 되는 무생물 중의 하나인데,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디자인에 우아한 빛깔, 거기에 빵까지 잘 굽는 녀석이니 사랑할 수밖에. 세상에는 실용적이며 합리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토스터가 널렸지만, 이 녀석을 처음 본 순간 집에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받을 토스터가 빵을 굽고 있는 동안, 이번에는 느긋하게 커피콩을 꺼낸다. 핸드밀에 커피콩 두 스푼을 넣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린다. 이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중 하나이다. 음악이 흐르고, 빵이 구워지는 냄새가 퍼지고, 그 사이로 희미한 커피향이 스며든다. 마음의 결을 순하게 해주는 냄새. 그 다정한 냄새를 맡으며 같은 방향으로 손잡이를 돌리는 단순노동을 하다 보면, 불면의 피로도, 삶에 대한 불안도 서서히 사라진다. 세상 곳곳에 고통과 악이 널려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하던 밤의 시간이 멀어지고, 그런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작게나마 세상에 도움이 될 만한 힘, 그 희망으로 아침이 가득해진다.

빵이 구워지는 냄새와 커피향이 주는 치유의 시간.

이것은 수행의 시간, 기도의 시간.

미움과 분노와 슬픔과 무기력과 우울과 불안을 곱게 갈아내는 시간. 

무엇보다, 소설을 구상하는 시간. 

삶을 단단하게 다지는 시간.

그러는 동안 다 구워진 빵이 경쾌하게 튀어 오르고, 햄·치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을지, 계란과 토마토와 치즈와 양상추를 넣은 샌드위치를 해 먹을지, 아니면 프렌치 토스트는 어떨지 잠시 고민해보지만, 역시 따끈따끈한 빵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피넛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시나몬파우더를 솔솔 뿌린 다음, 마지막으로 꿀이나 바나나를 얹어 접시에 올린다. 접시 옆에는 한 잔의 뜨거운 커피가 준비돼 있다. 커피와 피넛버터 토스트. 단지 이것만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얻는다.

단순하다.
그렇다. 나는 참, 단순한 인간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피넛버터 토스트를 먹는다. 고소한 피넛버터 사이로 매콤달콤한 시나몬향이 퍼지고, 거기 잘 어울리는 진한 블랙커피를 마신다. 식사가 끝나면 남은 커피를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에 괴로워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 그것이 ‘글’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조수경
글, 그림, 여행, 세상 구경 실컷 하고, 아이들과 동물들을 사랑하면서 살다 가고 싶은 소설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젤리피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 장편소설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가 있다.

조수경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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