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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 허수아비의 포상 휴가

드디어 바다가 보였다. 섬들이 수평선을 잡아당기고 있어서 바다는 오늘도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싸우는 듯 억센 사투리 속에서도 진한 소금기가 배어 나왔다. 그렇게 남해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얼마 전까지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하면서 잠시 공백이 생긴 나에게 아내는 ‘남해에서 한 달 살기’를 제안했다. ‘그래, 이 공백은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주는 포상 휴가야.’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친한 후배에게 부탁해서 비어 있는 남해 집(재작년에도 우리가 며칠 쉬어 갔던 집이다.)에 잠시 깃들어 보기로 했던 것이다.

마을 담장 사이 좁은 길을 따라 주욱 들어가서 맨 끝에서 두 번째 집. 오랜 시간 묶여 있던 문과 창문들을 풀어 눅눅한 집안으로 바람을 불러들인 후, 전에 다녀갔을 때 얼굴을 터놓은 윗집 아랫집 동정을 살폈다. 아랫집은 일을 나갔는지 비어 있었지만, 윗집에는 할아버지・할머니(우리는 이분들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가 계셨다.

음료 상자를 들고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먼 길 떠났던 사람 맞이하듯 반가이 맞아 주셨다. 젊어서 배를 타신 할아버지는 6년 전에 풍이 와서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꾸준히 움직이다 보니 이제 어지간한 농사일은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허리가 90도로 굽은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와 한 그릇 가득 따라 주시며 “이거 약식혜라네. 몸에 좋은 거니 다 마시게.” 하고 권하신다. “아들이 셋인데 부산 사는 큰아들 나이가 자네랑 같구먼.” 집을 나오는데 시금치, 두릅 따위 나물을 한가득 싸주신다. “아이들이 오면 이것저것 싸주고 싶은데 차 기름값도 안 나온다고 통 오질 않아.” 자주 찾아뵈는 것이 효도인 줄 어느 자식인들 모르랴. 온갖 채소들이 동네 슈퍼와 할인점에 항상 대기하다가 몇천 원만 주면 바로 우리 집 냉장고로 이사 오는 세상, 팍팍한 현실 앞에 화폐 가치로 평가받지 못하는 엄마의 정은 오늘도 시리다.

마을 뒤편 나지막한 언덕길을 넘었다. 유채꽃이 바람결에 노란 풍선을 날리고, 이름 모를 들풀들이 소풍 나온 듯 줄지어 있었다. 밭 귀퉁이에 허수아비 하나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바람이 불면 견장처럼 늘어진 소매를 흔들며 열심히 새를 쫓던 긴 세월. 이제 낡을 대로 낡은 옷가지를 벗긴 채 꽂혀 있던 자리에서 뽑혀졌다. 저것을 두고 영광의 은퇴라 할까, 유효 기간이 지난 퇴물이라 할까? 내 삶의 유효 기간은 어디에 찍혀 있을까, 새삼 목을 만져 보았다.

길을 내려가자 문득 한적한 마을이 펼쳐졌다. 깨끗한 길로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어디서 왔소?”, “먼 데서 왔구먼. 내 다리가 성했으면 자네들처럼 구경 다녔을 텐데…. 다리가 성했을 때는 일하고 애들 키우느라 딴생각할 시간이 없더니, 자식들 다 키우고 여유가 생기니까 다리가 이 모양이 되었네. 다리 성할 때 좋은 구경들 많이많이 다니소.” 유모차에 기댄 채 한참 동안 우리를 배웅하는 할머니 뒤로 들판 가득 청보리가 초록 바다처럼 일렁거리며 눈으로 흘러들었다. 시나브로 저물어가는 귀로에는 동백꽃이 담뱃불처럼 점점이 붉게 타올랐다. 나무 위에도 나무 아래에도….

윗집 할머니나 이웃 마을 할머니나 평생 바쁘게 일만 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계절이 번갈아 지나가는 길가에 들풀이 피었다 지듯, 조상이 살다간 대지 위에 그들도 살다 저물어 갈 것이다. 윤회처럼 되풀이되는 오랜 삶. 그러나 어쩌랴. ‘인생은 선택’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상은 바람에 날린 풀씨가 내려앉은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올리듯, 우리도 그저 내려앉은 자리에서 악착스레 살아갈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지 별 게 있겠나?” 두 할머니가 말하는 것 같다. 살다 보니 예까지 왔을 뿐, 더 중요한 것도 더 하찮은 것도 없다고. 허리가 굽고 다리가 성하지 못해도 대지에서 바다에서 육체의 힘으로 밀고 온 삶은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다. 그런 힘으로 남해에 새 계절이 오고 세월이 깊어간다.    

 

이은래
시인. 2018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늦게나마 고마웠습니다』가 있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총동문회 수석 부회장, 신대승네트워크 살림지이를 맡고 있다. 30여 년 직장 생활 끝에 잠시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은래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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