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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 출근길 슬라이딩 사고가 일깨워준 가르침

겨울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초봄의 어느 날 아침 출근길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신문사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다. 집에서 지하철을 타러 가는 시간까지 더하면 출퇴근에만 하루 1시간 가까이 걸을 수 있으니 딱 좋은 거리다. 기자의 필수 덕목인 ‘적자생존(사소한 것이라도 메모하고 기록해야 살 수 있다는 뜻)’ 외에 나이가 들면서 하나 더 추가된 게 ‘걷자생존’이다. 틈나는 대로 걸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30년 가까이 지하철 출퇴근을 선호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이날 따라 마음이 급했다. 며칠째 허리 통증 때문에 걸음이 좀 불편했던 터였다. 걸어가면 1~2분 지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차에 서울역 뒤편 정류장에 서 있는 마을버스가 보였다. “흠, 저걸 타면 늦진 않겠군.” 생각이 먼저였는지, 발이 움직인 게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뛰기 시작했다. 예닐곱 걸음쯤 뛰었을까. 뭔가 강한 충격과 함께 몸이 앞으로 슬라이딩하듯이 엎어져 버렸다. “뭐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누가 볼까 창피해서였을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은 대여섯 걸음 앞으로 날아갔고, 왼쪽 신발은 벗겨진 채 뒤쪽으로 그만큼 떨어져 있었다. 황급히 신발부터 챙겨 신는데 젊은 처자가 핸드폰을 주워 와서 “괜찮으세요?”라고 한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내빼듯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지각은 면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찬찬히 살펴보니 넘어지면서 봄 코트의 소매 단추가 떨어졌다. 소매 부분이 살짝 찢어질 정도로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왼쪽 신발이 벗겨지고 엄지발가락이 아픈 걸 보니 뭔가에 걸려 넘어진 듯했다. 퇴근 후 양말을 벗어보니 엄지발가락 측면이 1㎝가량 찢어진 중상(?)이었다. 넘어지면서 땅바닥을 짚었던 왼손도 긁히거나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엄지손가락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만큼 충격이 컸다.

“도대체 뭐에 걸린 거지?” 다음 날 아침 출근하면서 전날 넘어졌던 곳을 살펴보니 걸려 넘어질 만큼 보도블록이 튀어나온 곳은 없었다. 겨우 1㎝도 안 되는 턱에 걸려서 그토록 화끈하게 슬라이딩을 했단 말인가. 귀신이 내 발목이라도 잡았던 건가. 생각해 보니 기가 찼다.

발가락 상처는 1주일 만에 나았지만 이날의 슬라이딩 사고는 매사에 쫓기듯 살아온 근년의 내 생활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몇 분쯤 늦으면 어때서 그렇게 뛰었단 말인가. 조출(早出)과 초과 근무가 다반사여서 지각 좀 한다고 누가 뭐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밑을 보라)라는 말이 손과 발의 통증과 함께 문득, 강렬하게 떠올랐다. 절집에 가면, 특히 선방의 섬돌 옆 기둥이나 신발장에 붙어 있는 이 말은 작은 행동 하나에도 마음을 비추어 보기를 강조한다. 신발을 신으려면 다리 아래, 즉 발밑을 제대로 봐야 하는 게 이치다. 마찬가지로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마음을 놓치지 않으면 행동거지에 빈틈이 없게 된다.

10여 년 전, 도심 수행처로 유명한 서울 개포동 금강선원에서 수많은 도시인들에게 경전과 참선을 지도해온 선원장 혜거 스님을 뵈러 갔을 때였다. 이런 문답이 오갔다.

“여기 올 때 뭐 타고 오셨습니까?”

“지하철역에 내려서 걸어왔습니다.”

“그럼 여기 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겠군요. 그 사람들 얼굴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길 가다 지나친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기억한단 말입니까?”

“땅바닥만 보고 걷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 얼굴을 봤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기억을 못할까요? 눈만 건성건성 갔을 뿐 마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씀이었다. 혜거 스님은 “눈 가는 데 마음도 가게 하라는 게 참선 공부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때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 이 가르침을 왜 잊어버리고 살았을까. 발걸음 하나, 호흡 하나에도 마음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런 낭패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멀리 있는 목표만 보고 달려가면 그 과정의 즐거움을 놓치기 십상이다. 등산의 즐거움은 정상에 발을 딛는 것만이 아니라 산허리, 산등성이를 두루 살펴보는 데 있다. 소소하고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는 대로보다 골목길에 더 많다. 아직도 통증이 남아 있는 왼손 엄지손가락을 만질 때마다 스스로를 경계하고 다잡는다. “눈 가는 데 마음도 가게 해야지. 식구들, 동료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잘 챙겨야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마음을 잘 비춰 봐야지.”    

 

서화동
한국경제신문 문화선임기자. 30년 가까운 기자 생활 중 문화부 기자로만 25년 가까이 일하며 종교, 출판, 문화재 등을 주로 취재했다. 문화부장을 거쳐 문화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고승 33인을 인터뷰한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 전국의 선원과 선사들을 찾아다닌 『선방에서 길을 물었더니』, 여행기 『하늘로 열린 땅 티베트 타클라마칸 기행』 등의 책을 썼다.

서화동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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