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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에세이]불상 조각 연구의 기틀을 마련해 준 1년간의 일본 연수 생활

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조형 예술 작품의 채색분석법(彩色分析法)은 한국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내는 ‘작품해독법’이다. 저 삼국 시대부터, 아니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석기 시대 이래 인류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다! 문자 언어와 상대하는 ‘조형 언어’를 찾아내는 그 기적의 과정을 자전적 에세이로 쓰고 있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조국의 산하는 삭막해서 산악의 나라이지만 헐벗은 민둥산뿐이어서 눈물이 났다. 현해탄을 건너 일본 땅이 나타나자 온 산이 푸른 숲이어서 더욱 비감해졌다. 당시 해외에 나가는 것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의 몫이었다. 1975년 6월 일본행은 내 생애에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비행기도 처음 타보고 외국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전공을 불교 조각으로 정하여 놓았으나 막막했다. 강의를 들은 바도 없었고 작품을 본 바도 그리 없었다. 망망대해에 나침판도 없이 쪽배를 타고 헤매는 격이었다. 먼 훗날 생각해 보면 그런 절박한 상황에 처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오류 위에 세워진 고정된 신기루 같은 상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행히 일본에는 한국의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의 금동불이 다수 있었다. 가방에 항상 삼각대와 카메라 두 대와 조명등을 넣고 다니며, 개인 박물관 소장 금동불을 나 혼자 한 손으로 조명을 하고 다른 손으로 카메라 릴리즈를 누르며 촬영했다. 카메라가 두 대인 까닭은 흑백 필름과 컬러 필름 두 가지로 찍었기 때문이다. 한국 불상 조각은 물론 일본에는 훌륭한 중국 불상 조각품들이 많았고 인도 불상도 적지 않게 있었다. 게다가 고대 일본 불상 조각 역시 아주 많아서 고대 동양 불교 조각을 연구하기에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동양 불상 조각 연구자도 많았다. 한국 불상만 있는 우리나라 사정과는 하늘과 땅 차이었다. 불상 조각을 조사하는 방법은 당시 교토국립박물관 자료 실장인 이노우에 타다시(井上正) 선생으로부터 어깨너머 배웠다. 그의 전공이 바로 고대 동양 불상 조각이었다. 굳이 동양 불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동이 쉬운 작은 금동불이라 영향 관계가 뚜렷해서 동양 여러 나라의 불상을 함께 ‘비교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고실장 스즈끼 과장은 약주를 좋아했는데, 매일 근무 시간이 끝나면 시계 초침을 보고는 곧장 냉장고에서 맥주와 치즈을 들고 와서 간단히 흥겨운 자리를 펼치곤 했다. 그 자리엔 꼭 자료 실장 이노우에 타다시 선생이 참석했다. 그 까닭은 내가 불상을 전공한다고 하니까 이미 나의 초보적 상태를 간파한 터라 도움을 주려는 깊은 배려였다. 박물관은 월요일이면 휴관이어서 진열품을 교환하거나 작품을 조사했다. 이노우에 선생은 불상 조각품을 조사할 때, 소금동불 작품을 손에 들고 여러 면을 돌려보며 직접 조명하면서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그러고는 본 것을 반드시 기록했다. 그렇게 나는 그가 작품 조사하는 방법을 어깨너머 배운 것이다.

이노우에 선생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나에게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한국 학자들은 작품을 그리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문을 즐기면서 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니 얼마나 행운인가. 열 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마치 친구처럼 동생처럼 대했으며 항상 존댓말을 썼다. 그는 특히 고구려 벽화에 관심이 많았다. 나도 원래 고구려 벽화에 관심이 많아서 경주에 있을 때 이미 북한 학자 주영헌(朱榮憲) 씨가 쓴 『고구려의 벽화 고분』을 일역(日譯)한 것을 읽으려고 노력했으나 작품을 본 바가 없는지라 몇 페이지 못 읽고 그친 적이 있었다. 이노우에 선생이 쓴 논문에도 고구려 벽화에 관한 것이 많았지만 내용이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었다. 먼 훗날 그것이 나의 이론의 바탕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금동 사유상 상반신의 역동적 움직임
금동 사유상 하반신의 역동적 옷주름

 

일본의 나라(奈良), 도쿄(東京), 규슈(九州) 등 여러 국립박물관과 사립박물관을 섭렵하며 우리나라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금동불, 중국 북위(北魏) 시대나 동위(東魏)와 서위(西魏), 북제(北齊)와 북주(北周), 수(隨), 당(唐) 시대 등의 불상 조각, 그리고 인도의 마투라와 간다라 불상 조각 등을 조사했다. 교토국립대학교 부설 인문학 연구소에서 격년으로 간다라 지역을 발굴 조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간다라 불상 조각을 조사하기도 했지만, 물론 간다라 불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침 당시에 천황 황궁인 평성궁(平城宮)의 드넓은 터를 발굴하고 있던 터여서 가끔 자전거를 타고 발굴 현장을 찾았다. 경주 신라 유적의 발굴과는 발굴 방법을 비롯하여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여기서 잠시 ‘불상 조각’이라고 굳이 말하는 까닭을 이야기해야겠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불상(佛像)’이라 하면 ‘불상 조각’을 가리키며, 그림을 말할 때면 ‘불화(佛畵)’라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불상은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조각품과 회화 작품 모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조각품을 말할 때는 반드시 ‘불상 조각(佛像彫刻)’이라 불러야 하고, 회화를 말할 때는 반드시 ‘불상 회화(佛像繪畵)’라고 불러야 한다. 불상은 영어로 ‘Buddhist image’로 번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토에는 끊임없이 동서고금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서양의 근현대 화가들이나 조각가들, 예를 들어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같은 화가나 마리노 마리니(Marino Marini) 같은 조각가의 회고전 등도 자주 찾았다. 근대와 현대의 어느 특정한 회고전에 가보면 첫 작품에서부터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전시하고 있어서 감동적이었다. 한 예술가의 주제나 양식의 필연적인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고, 특히 마지막 작품 앞에서는 삶의 끝에 다다른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숙연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생활은, 수많은 동서고금의 훌륭한 작품 전시를 쫓아다니느라 바쁜 나날이었다.

광륭사 목조 사유상 상반신의 고요한 모습
광륭사 목조 사유상 하반신 옷주름의 고요한 흐름

 

1976년 2월 27일에 일본 전역을 순회하는 <한국 미술 5,000년> 전시회가 바로 교토국립박물관에서 역사적인 막을 열었다. 해방 후 갖은 진통 끝에 맺었던 한일 문화 교류 10주년을 맞이하여 교토국립박물관 마쓰시다 다카키(松下隆章) 관장이 한국 미술전의 일본 순회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 전시는 교토에서 시작하여, 도쿄와 후쿠오카 등 모두 세 도시에서 5개월간 열렸으며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출품작이 348점으로 해외에서 전시했던 최대 규모의 한국 미술전이었다. 신석기 시대부터 근대까지 이르는 전 시기를 망라한 것으로 그 전시품만으로도 한국 미술사의 개설을 쓸 수 있으리라. 이 전시는 일본인들에게 한국 미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으며 재일 교포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했다. 일본 박물관 측과 한국에서 오신 최순우 관장님 일행과 개막 날 점심을 함께 하고 다실(茶室)로 갔다. 일본은 어느 박물관이나 조용한 곳에 일본 건축풍의 다실이 반드시 있다. 벽에는 조선시대 문인화를 걸어놓고, 다기는 고려청자이고, 소반은 조선 것이었으며, 가야금을 일본 여성이 뜯고, 마쓰시다 관장이 손수 말차를 만들어 모든 손님에게 주었다. 그들은 격조 높은 한국 미술품을 감상하며 차를 마셨다.

그런데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한국 미술 연구의 주도권을 일본이 쥐고 있어서 지금까지도 일본 유학은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낮추어 보고 있으니 크게 반성할 일이다. 일본에는 한국의 모든 장르에 걸친 전공자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한국 미술에 대한 연구 성과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항상 자랑하는 금관이나 고려청자나 금동 사유상 같은 걸작품에 대해 올바로 쓰인 논문 하나 없다. 우리는 항상 일본 학자들의 논문을 인용하거나, 미국의 한국 미술 전공자들 글을 인용해야 실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앞다투어 일본 각 대학에 유학생들이 수백 명씩 가서 그릇된 지식을 배우고 오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심지어 불교학도 일본에 가서 학위를 받는다.

날이 갈수록 한국과 일본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 일본을 따라갈 수 있을지 절망감이 점점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교토에서 전시가 끝날 즈음에 맞추어 교토국립박물관 강당에서 한국 미술에 대해 학술 발표를 해야 한다는 사명이 주어졌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한국과 일본에 이른바 수많은 권위자가 있지 않은가.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마쓰시다 관장이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국의 젊은이를 큰 학자로 키우고 싶으니 유능한 젊은이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최 관장님이 나를 천거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재단(Japan Foundation)에서 매달 거금을 받았는데, 그것을 모으면 집을 한 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본에 있는 동안 동양 미술 연구에 그 돈을 모두 쓰리리라 결심하고, 미술사 관련 책을 구입하고 일본 전국을 답사하고 작품 조사하는 데 비용을 모두 썼다. 일본 돈은 일본에서 모두 써버리리라 결심했다. 얼마나 큰돈이었던지, 아무리 써도 지갑에는 항상 돈이 가득했다.

발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삼국 시대 불상을 중심으로 인도, 한국, 중국, 일본의 불상을 폭넓게 연구했으므로 「백제의 금동 사유상과 일본 광륭사 목조 사유상의 비교 연구」를 주제로 밤낮이 없이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말로 원고를 쓰면 고맙게도 이노우에 선생이 일본어로 번역해 주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누구도 이런 주제로 논문을 쓴 바 없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연구 동향은 한 작품을 치밀하게 다루지 않고 여러 작품을 함께 다루는 것이 대세였다. 나는 비슷함 점이 있는 일본의 광륭사(廣隆寺) 목조 사유상과 금동 사유상을 치밀하게 비교하기로 했다. 일본에서 불상 연구를 시작하면서 큰 관심을 가진 것 중 하나가 ‘양식(樣式)의 문제’였고, 그것은 다른 불상과의 비교를 통해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작품의 시대적 순서를 잡아야만 미술사학 연구가 가능한데, 그런 작품 편년은 작품을 양식적으로 파악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양식사가 미술사’라고 확신했다. 이를 실천하려면 수많은 작품을 직접 손으로 들어보고 무게를 느끼고, 만져서 표면 질감을 체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여 작품 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하나의 큰 관심사는 금동불의 제작 기법이었다. 제작 기법을 알면 양식 파악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침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금동 사유상이 전시되고 있었으므로 그 작품의 내부를 살피며 제작 기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의 금동 사유상은 한일 학자 모두 신라 시대 작품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통일신라 문화가 한국 문화의 최절정이라 생각하고 일제 강점기부터 출토지가 불분명한 훌륭한 작품들은 모두 신라 시대나 혹은 통일신라 시대 것이라 여겼으며 한국 학자들도 맹목적으로 그 의견을 따랐다. 그러나 신라 1000년 수도에서 공부해왔기 때문에 신라 양식을 철저히 익혔으므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양식적으로 신라의 작품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신라보다 훨씬 수준 높았던 백제의 작품으로 보았으며, 같은 이유로 신라 시대 작품으로 여겨졌던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역시 훗날 중국 북조(北朝) 불상과 고구려 금동불을 연구하면서 고구려의 작품이라 판단해 그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런데 한국의 금동 사유상과 유사한 일본 광륭사 목조 사유상 또한 신라에서 건너간 작품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비교해 보니 양식적으로 두 상은 전혀 달랐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이래 오랫동안 목조 불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작품 한 점도 없으나, 일본은 처음부터 목조 불상을 많이 만들어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일본의 목조 불상이 질적으로 우수함은 물론 양적으로도 풍부했음을 감안할 때, 일본 작품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양식적으로 봐도 금동 사유상은 ‘기운생동’하지만, 광륭사 목조 불상은 매우 부드럽고 온화하며 우리 작품만큼 역동적인 힘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1976년 4월 10일 교토 전시가 끝날 즈음, 만당한 강당에서 3시간 동안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반향은 컸으며 동년배 일본 와세다 교수들의 일부가 나의 논지를 반박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전시 기간 동안 심포지엄도 없었고 한국의 원로 학자 초청 강연도 없었다. 세 도시에서 전시하는 5개월 동안 한 번도 그런 강연이 없었다. 나는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연구하여 발표했던 것이다. 교토 전시는 4월 18일까지 계속됐다. 이후 후쿠오카 문화회관(당시에는 규슈 후쿠오카에 국립박물관이 없었다.)과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전시가 열릴 때 가서 전시를 도와주었다. 일본 순회 전시는 7월 25일까지 총 5개월간 이어졌다. 그리고 6월 중순 한 해 동안의 격동기를 끝내고 고요한 경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의 1년간의 연구는 나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고 학문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은 이노우에 선생과 쌓은 돈독한 우정이었다.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 

강우방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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