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개론] 윤회 세계에 있으면서 윤회를 초월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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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불교개론] 윤회 세계에 있으면서 윤회를 초월하는 길
  • 장휘옥, 김사업
  • 승인 2019.03.27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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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는 동기론과 결과론의 조화를 꾀한다

아프리카 오지의 한 마을에 전염병이 번졌다. 그곳에는 신앙심이 깊고 마을 주민을 지극히 위하는 성직자 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의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었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염병 소멸을 위해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아 놓고 기도회를 열었다. 결국 기도회에 참가한 성한 사람까지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는 등 마을 전체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기도회를 연 이 성직자의 행위는 선일까, 악일까? 불교는 이 행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윤리학에서는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어디에다 기준을 둘 것이냐를 두고 입장이 나뉜다. 동기론과 결과론이 그것으로, 전자는 행위의 동기에 의해 그 행위의 선악이나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고 하는 반면, 후자는 행위의 결과에 의해 그것이 결정된다고 한다.

문제의 성직자는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안위를 도모하려는 선한 동기로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전염병 확산과 사망자의 증가, 죽음의 공포만 불러왔다. 따라서 동기론의 입장에 선다면 이 성직자의 행위는 선업이 될 것이며, 결과론의 입장이라면 악업이라 할 수밖에 없다.

불교는 동기론과 결과론 중 어느 입장에 서 있을까? 불교는 행위를 일으키는 의도(cetanā, 思)가 행위의 본질이라고 보기 때문에 동기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래에는 불교의 업설은 동기론의 입장이라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원하는 과보(is.t.avipāka)’를 가져오는 것을 선(善)이라 하고, ‘원하지 않는 과보’를 가져오는 것을 악(惡)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동기론에 좀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기는 하나 결과론의 입장도 동시에 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동기론과 결과론,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자의 조화를 꾀하는 중도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불교는 선한 동기와 바람직한 결과를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동기의 청정함을 도외시하면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결과론도 아니고,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지혜로운 묘안은 강구하지 않은 채 동기의 순수성만 믿고 여기에만 매달리는 동기론도 아니다.

한편, 불교는 탐(탐욕)・진(증오)・치(어리석음)의 3독은 그 자체로서 악이고, 그 반대인 무탐・무진・무치(=지혜)는 그 자체로서 선이라고도 한다. 나아가서는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소멸된 열반이야말로 궁극적인 선이며, 미혹한 중생의 삶은 본질적으로 악이라고 보기도 한다.

얼핏 보면 불교는 위와 같이 선악에 대해 여러 갈래의 언급을 하고 있어서 정연한 체계를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직전 호에서 밝힌 것처럼 불교의 선악관은 여러 차원이 포개져 있는 중층(重層)적 구조로 되어 있다. 쉽게 말해 낮은 차원의 선을 설하는가 하면, 높은 차원의 선도 설한다. 단순하지는 않지만 정연한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 

불교는 낮은 차원의 선도 무시하지 않으면서, 더 높은 단계의 선으로 승화되어 가는 것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낮은 단계의 선을 지양하여 거기에서 초탈할 것이 요구된다. 선한 의도 하나만 보더라도 여러 차원이 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하되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으려는 의도’ →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내면에는 그 대가에 대한 기대가 깔린 의도’ → ‘구제한다는 흔적도 없이 타인을 구제하는 행위를 일으키는 의도’ 등이다. 

결과론의 견지에서 “불교는 어떤 결과를 가져와야 선이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에 대해서도 불교는 여러 차원에서 내용을 달리하며 답할 것이다. 이에 맞추어 불교는 각 단계별 차원에 맞는 교리를 다양하게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교리가 불교 전체의 선악관 내지는 가르침을 다 나타낸다고 오인해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은 무엇일까? 동기(=의도)의 측면에서는 일체의 번뇌, 특히 탐・진・치 3독심이 없는 동기가 최고의 선이라 할 수 있다. 결과의 측면에서는 열반・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이 두 측면을 연결해서 ‘일체의 번뇌를 떠난 마음, 3독심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행위는 열반의 경지 그 자체이고, 이것이 최고의 선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자신의 열반뿐만 아니라, 사회를 정화하고 중생을 교화하여 나와 남이 함께 열반을 성취하는 것(自他一時成佛道)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다.

3독심은 달마(dharma), 즉 진리를 알고 깨달아야 소멸된다. 따라서 낮은 차원의 선에서 높은 차원의 선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온갖 번뇌로 물든 중생이 진리에 대한 불교의 다양하고 중층적인 가르침을 알고 스스로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불교의 진리는 외부에서 주어진 명령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므로,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누구라도 마음을 열고 기존의 고착된 생각에서 벗어난 청정한 눈으로 보면 납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석가모니는 이 진리에 눈뜨도록 하기 위해 듣는 이의 눈높이에 맞춰 진리를 설했다.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신 것이다. 듣는 이의 능력이 다양한 만큼 그 가르침도 여러 차원으로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다양하고 중층적인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진리를 알고 발견하게 하여 자율적으로 진리에 부합한 실천을 행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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