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에세이] 인연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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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에세이] 인연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 강우방
  • 승인 2019.03.2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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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의 배움 끝에 국립박물관에 들어가다
1968년, 결혼 사진

탈을 아무리 한다고 해도 유년기와 청소년기에는 학교에서 틀에 박힌 생활을 해야만 한다. 같은 자리, 같은 교과서, 같은 담임선생님, 같은 짝 등 대부분 고정된 생활이다. 창의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얼마나 어리석은 교육 방식인가. 1960년 봄 대학생이 되었는데 4·19혁명에 연이어 5・16 쿠데타가 일어나 매일 데모에 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 생활을 보내야 했다. 내 삶에도 혁명이 일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러나 교양과목이라고 하여 다시 국어와 영어 등을 같은 교실에서 독문과, 불문과, 영문과 학생들과 한 해 동안 들어야 했다. 당시에는 문과와 이과가 함께 한다는 의미로 문리대(文理大)라고 하여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해 5월 어느 날, 짐을 챙기고 정처 없이 경부선 3등 열차를 탔다. 부산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간 곳이 부산 범어사(梵魚寺)였다. 미리 알고 간 것은 아니고, 무턱대고 산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범어사에 도착했다. 정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누가 틀어놓고 갔는지 트랜지스터에서 차이콥스키의 비창(悲愴) 교향곡이 비장하게 계곡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다시 정처 없이 걸어 올라가다 마지막 암자에서 짐을 풀었다. 내원암(內院庵)이었다. 그때 나는 시계 초침 소리에도 잠이 들지 못해 장롱 깊숙이 숨겨 놓아야 했고, 형수님이 건강을 걱정하여 삼계탕을 끓여 주어도 한 숟갈도 들지 못할 만큼 예민한 상태였다. 하지만 계곡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내원암에서는 밤새 흐르는 계곡물이 천둥소리 같았음에도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꼭두새벽 사발에 고봉으로 담은 밥도 거뜬히 먹어 치웠다. 가끔 뒷산에도 올랐다.

그 당시 나는 폐결핵을 앓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아랫마을에 내려가 작은 마을의 보건소에서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 주사를 맞아야 했다. 하루는 늦은 저녁에 논밭만 있는 인적 드문 벌판에서 절을 향해 산을 오르다 밤이 되었는데, 반딧불이를 처음 보았다. 처음 보는 것이라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고작 반딧불이를 보고 놀라다니, 서울 촌놈이 따로 없었다.

옛날 사람들을 귀양 보냈던 깊은 산곡 무주(茂朱) 구천동에 간 적이 있다. 1960년대만 해도 인적이 드물어서 33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한참 올라가는데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계곡 끝에 관음암이 나타났다. 그곳에 짐을 풀고 한여름을 지낸 적도 있다. 독서도 하고 법당에서 명상도 하며 어릴 때부터 가끔 하듯 그림도 그렸다. 그러다 어느 날 뒷산 덕유산을 올랐다. 하염없이 올라가 해발 1600미터 향적봉 정상에 오르니 아무도 없고 비바람에 자랄 수 없는지 나무도 없었다. 거기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장엄한 운해(雲海)를 보았다. 운해 위 곳곳에 낮은 산의 정상들이 보였다. 운해를 내려다보니 장대한 광경이어서 마음이 벅차 아직도 그 광경이 마음에 새겨진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큰 절에 묵을 때마다 뒷산이 아무리 높아도 정상까지 오르곤 했다. 땀에 젖은 온몸으로 정상에서 맞이하는 청량한 바람을 잊을 수 없다. 마음이 항상 이처럼 청량했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었다. 청량사(淸凉寺)라는 절 이름이 있는 까닭도 알았다.

일탈의 시간이 끝나면 항상 대학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문리과 대학에는 명강의가 많았는데, 박종홍 철학 교수의 열강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시인이었던 영문과 송욱 교수는 하도 깐깐하여 모든 학생이 머리를 숙이고 질문을 피했다. 어느 날 그는 칠판에 sein[독일어로 ‘존재(存在)’라는 뜻]이라고 써놓고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생성(生成)’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고 물었다. 철학 용어라 영문과 학생들은 알 리 없었다.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교수도 한참 답을 기다렸다.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나는 ‘werden’하고 말했다. 아마도 그는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먼 훗날 하버드 옌칭 도서관에서 그가 말년에 해설한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본 적이 있다. 서양 시에 몰두했던 그가 만해의 작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인상을 받고는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1960년대 초에는 실존철학이 풍미했다. 조가경 교수는 『실존철학』이란 두툼한 책을 내고 강의도 했는데 건물 모서리에 있는 대강의실은 항상 수강생들로 가득 찼다. 한 번은 이두현 민속학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1912년 영국에서 출간된 제인 엘렌 해리슨(Jane Ellen Harrison)의 『Ancient Art and Ritual』란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곧장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꽤 난해한 책이었지만 원서를 읽으며 번역하다시피 노트에 메모했다. 그리스 고대 의례에서 서양미술의 모든 장르가 탄생하는 과정을 예리하게 추구한 책으로 감명이라기보다 큰 충격을 받았으며, 미술사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마도 첫 번째 개안(開眼)이었으리라.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의 『인간론』도 큰 감명을 주었다. 당시 독문학 강의는 거의 듣지 않았는데, 문학을 하려고 독문과에 입학한 것이 아니었기에 평생 무엇을 할 것인가 탐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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