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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세상을 가로지르는 선禪만해 한용운의 수행정신
  • 박재현
  • 승인 2019.02.26 17:30
  • 호수 533
  • 댓글 0

한 세기전 1919년 1월 21일,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였던 고종 황제가 세수 68세를 일기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불과 사흘 만에 완전히 부패했다. 치아가 입안에서 모두 빠져 있었고, 수의를 갈아입히는데 살점이 옷과 이불에 묻어났다는 얘기가 돌았다. 죽은 사람을 여럿 본 사람들은, 시체가 사흘 만에 그렇게 되는 일은 본 적이 없다고 수군거렸다. 황제가 승하하기 전날 밤에 이기용과 이완용이 입직했고, 수라를 담당했던 시녀 두 사람이 돌연히 죽었다는 소문도 뒤따랐다. 

독립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결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불과 하루 전에 장소가 바뀌었다. 2월 28일 해질 무렵에 오세창과 최린 등 6명이 김상규의 집에서 회합했다. 또 밤 10시경에 손병희의 집에서 다시 모였다. 학생들이 대거 파고다 공원에 모일 예정이어서 자칫 집단시위와 폭력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걱정이 오갔다. 그날 저녁 독립선언 장소는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

당일, 독립선언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의 만세 삼창이 끝나자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참석자들은 포승줄에 묶여 차에 실렸다. 차가 군중 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열두세 살 되어 보이는 두 아이가 만해 한용운의 눈에 도드라졌다. 만세를 부르며 호송차를 향해 손을 흔들던 한 아이를 일경이 개천으로 밀어붙였다. 다른 아이는 일경에 의해 팔이 꺾이며 고꾸라졌다. 차량에 같이 탄 헌병이 머리를 숙이라고 고함치며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불교는 무지막지한 세상 속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만해는 답답했다.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도 막막했다. 전래의 선에 대한 그의 진단은 절박했다. “외로운 암자나 쇠잔한 절을 제외하고는 절치고 선실禪室이 없는 곳이 거의 없는 형편이니, 어찌나 그리도 선의 풍조가 떨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반드시 모두가 선을 일으키는 본의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혹은 선실로 절의 명예의 도구로 삼기도 하고 혹은 선실로 이익을 낚는 도구로 삼는 곳도 있어서, 이런 종류의 것이 함부로 나오는데 따라 선실이 차츰 많아지는 것과는 반대로 진정한 선객이 아주 희귀한 현상을 빚어냈다. 그래서 형편상 부득불 신통치 않은 인간들을 몰아다가 수효를 채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선 수행을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만해의 지적은 더 곡진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선객 총수 십분 중에 진정한 선객은 일분에 불과하고, 먹기 위해 들어온 자가 이분이요, 어리석고 게으른데다가 먹기 위해 들어온 자가 칠분이나 된다. 선의 취지의 본말을 모른 채 세월만 끌고, 다만 옛 조사들이 염롱(拈弄, 말을 희롱함)한 몇 마디 말로 구두선(口頭禪, 말로만 하는 선)을 닦아서 금시에 의원수마(意猿睡魔, 마음이 산란하고 잠만 자는 것)의 정다운 벗이 되어 혼침(昏沈, 마음이 답답함), 도거(掉擧, 마음이 산란함) 사이에서 청춘을 보내고 백발을 맞으니, 이는 과연 무엇을 하는 짓이라 하랴.”

세상일에 아랑곳하지 않는 선을 만해는 두고 보지 못했다. 선은 구세의 방편이 되지 못하고 독선과 염세의 변명이 되어 있었다. 세상은 불타는 지옥이요 고통의 바다라는 불가의 세계관은, 불을 끄고 약을 줘야겠다는 자비심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나조차 불타거나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해는 당시에 참선하는 사람들이 참 이상하다고 여겼다. 옛 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가졌는데 비해서 처소處所만 고요하게 가지려고 했고, 옛 사람들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데 힘썼던데 비해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면 염세가 될 뿐이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 하면 독선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을 것이었다. 

만해는 ‘선외선禪外禪’이나 ‘활선活禪’이라는 말로 선의 본령을 나타냈다. 그는 1937년 7월에 발표한 「선외선」이라는 글에서, 기존의 선을 상도常道의 선에 불과하다고 했다. 타성에 젖은 선이고 묵습된 선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선에 종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선의포단(禪依蒲團, 형식상의 참선수행)으로 시심마是甚麽를 찾는 중에 유명有名의 속물이 적지않다고 그는 지적했다.  

만해의 선은 통상의 선과 구별된다. 그의 선은 수행자의 철저하고 면밀한 자발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묵습된 선과 달랐다. 화두 참구參究와 인가印可 그리고 법맥과 문중을 골격으로 해온 기존의 선 전통과는 뚜렷이 구별되었다. 선외선과 활선에는 선 근본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경계警戒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선은 특정 종교의 전유물일 수 없으며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일종의 정신수양법이라는 열린 관점에서 봐야 진정한 선의 정신에 부합된다고 만해는 생각했다. 

외형적으로 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선이 아닌 것이 많다. 반면에 외형적으로 선과 무관해 보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선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선외선이고 활선이다. 단적인 예로 석존이 그러했고 영운靈雲과 향엄香嚴이 그러했으며, 왕양명이 그러했고 심지어 배추장수조차도 그러하다고 만해는 말했다. 덧붙여 이러한 사실을 아는 자가 없는 것이 천고의 유감이라고 덧붙였다. 

1928년 여름, 만해는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있었다. 건봉사와 그 말사들의 사적史蹟을 마무리 짓는 데 달포가 조금 넘게 걸렸다. 주지 이대련의 요청은 간곡했다. 그는 조선 사찰의 역사적 불완전함을 많이 아쉬워했다. 기껏 남아 있는 기록조차도 단편적인 것들뿐이어서 계통적이지도 통일적이지도 못하다고 그는 말했다. 사찰 역사의 결함은 곧 불교 역사의 결함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고 그가 말할 때, 만해는 더 거절하지 못했다. 

그 후 얼마 뒤 건봉사에서 사적 편차 기념법회가 있을 예정이니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굳이 법상에 올라 설법하기를 청하기에 격식을 차려 만해는 입을 열었다.

“무無!”

주장자를 내리치며 한 마디 질렀다. 무! 한마디는 법당 전체를 공명통 삼아 울리면서 웅웅거렸다. 진화하지 못한 원시의 음성은 벽에 부딪쳐 무-, 무-, 무- 하고 울리면서 귓전을 다그쳤다. 만해는 다시 주장자로 쿵, 쿵, 쿵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내리찍으며 소리질렀다.

“이 소식을 아는가? 어서 일러라. 이르면 30방이요 이르지 못해도 30방이다.”

풍경소리가 처마 끝을 감돌았고 상단의 촛불이 흔들렸다. 

“대중이 만일 이 소식을 안다면 설법은 이로써 마치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뱀을 그리고 발을 붙이지 않을 수 없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금 기다렸다가 만해의 설법이 이어졌다.

“이익이 사람을 부림이 심하다. 이익이 있는 곳이면 천 길 산도 올라가지 않는 데가 없고 깊은 연못도 들어가지 않는 데가 없다. 상인은 이익을 좇아 천리 밖을 이웃처럼 여기고, 어부는 이익을 좇아 백 길 바닷물과 부딪치고 싸운다. 학문하고 수행하는 것 또한 도道에서 이익을 찾는 것에 다르지 않다. 도는 마음 가운데 있으니, 가깝고 쉬우면서 또 멀고 어렵다. 운수납자는 마음에 내 것이 있으면 공부가 안 된다. 버려야 부처의 지혜가 생긴다. 무는 미혹한 마음을 조복시키는 의심이다. 무는 다 버리는 것이니, 무 한 글자 속에 가장 큰 이로움이 있다. 대중들은 알겠는가?”

젊은 날의 만해가 승려의 육식肉食과 취처娶妻를 허용해야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만해가 단단히 미쳤다고 했다. 사람들은 불교의 순결성이나 파계 같은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 주장은 위반이거나 일탈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기는 세상을 떠나는 것인 동시에 등진 세상으로 되돌아오는 열쇠다. 금기는 파괴되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구원을 현실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만해의 선은 종교가 세상을 가로질러 가는 그 아득한 길을 엿보았던 어느 한 수행자의 흔적이었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

박재현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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