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만해 한용운과 금강산, 그리고 통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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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만해 한용운과 금강산, 그리고 통일시대
  • 김윤길
  • 승인 2019.02.2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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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천봉! 무양하냐 금강산아

|    3,1혁명 백주년, ‘풍란화 매운 향내’를 기억하며

1944년 6월의 마지막 날, 성북동 심우장에서는 전날 입적한 만해 한용운 선사를 추모하는 조촐한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시조 한 수를 스님의 영전에서 읊었다.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게 견줄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아 돌아오소서

이 시조는 1945년 12월에 발간된 『해방기념시집』에 위당의 「십이애十二哀」라는 연작시조 중 하나로 “고 용운당 대선사를 생각하고”라는 덧붙임 말과 함께 실렸다. 66세 나이에 돌아가신 만해선사의 부고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두어 달이 지나서 스님이 한때 책임을 맡았던 잡지 『(신)불교』 64집에 ‘열반계涅槃界’라는 제목의 “만해 한용운 대종사는 지난(去) 유월 이십구일 성북정町 심우장 자택에서 입적하시였다”는 단신만이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만해는 해방공간의 소용돌이와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대중들로부터 잊혀져갔다. 뒤늦게 70년대에 후학들의 노력으로 『한용운전집』이 발간되고 난 뒤에야 ‘풍란화 매운 향내’는 만해를 상징하는 말로 회자되었다. 일찍이 청년시절 가슴 한가운데서 타오르기 시작한 초심의 불꽃을 평생 꺼트리지 않은 채 온 생애를 뜨겁게 살았던 만해의 마지막 세상사는 그렇게 평범했다. 그럼에도 또 한 생애를 훌쩍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매운 향내는 더 진하게 사람들의 가슴에 묵직하게 스며든다.   

꿋꿋한 지조와 절개의 독립지사로서, 불교철학의 요체를 터득한 선사이자 격조 높은 시인이요 문장가였던 만해 한용운. 그는 격동의 난세 속에서 불교를 비롯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허물어져가는 지적 전통을 아궁이로 삼아 스스로 어둠의 시대를 밝히는 불길이 되어서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지펴주었다. 

|              청년 만해의 가슴 속 불같은 마음과 금강산

만해는 1930년 5월에 잡지『삼천리』에 실린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글에서 ‘불같은 마음’으로 출가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나의 앞길(前程)을 위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것과 또 인생 그것에 대한 무엇을 좀 해결하여 보겠다는 불같은 마음으로 한양 가던 길을 구부리어 사찰을 찾아 보은 속리사로 갔다가 다시 더 깊은 심산유곡의 대찰을 찾아간다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까지 그곳 동냥중 즉 탁발승이 되어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아무리 명산대찰이라도 그를 알아보고 그의 ‘불같은 마음’을 다잡아 줄 선지식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회고는 만해가 속리산 법주사와 오대산 월정사 등지를 거쳐서 마침내 설악산 백담사를 출가의 인연처로 택하게 한 귀한 인연들을 암시한다. 

만해의 출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만해용운은 백담사 오세암에서 불목하니 행자생활을 하다가 1905년에 백담사 연곡화상蓮谷和尙에게 사미계를, 영제泳濟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으며, 금강산 건봉사 학암鶴庵스님에게 기신론·능엄경·원각경·반야경 강의를 듣고, 금강산 유점사 월화月華스님에게 화엄경 강의를 들었다.’는 것이 출가 초기 행적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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