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에세이] 코지마 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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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에세이] 코지마 만다라
  • 강우방
  • 승인 2019.02.2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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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만다라에 숨은 의미를 밝히다

스님들은 문자언어로 쓴 경전들을 공부한다. 그러나 원효보살元曉菩薩은 경전이 아니라 밤에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으니 최초의 선승禪僧 아닌가 중국유학을 향한 발길 되돌려 서라벌로 왔네. 『화엄경』 덮어버리고 분황사를 떠나 일상에서 마지막 실천 행을 이루지 않았는가. 불교는 제2의 길인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택하여 혁명을 이루었지만, 나는 조형언어라는 제3의 길을 개척하여 깨달음을 이루며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삶의 전선戰線에서 얼마큼 공헌을 이룬 사람들이 대개 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매일 매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극적인 나날인데 언제 먼 과거를 뒤돌아볼 틈이 있겠는가. 그래서 8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아직도 내 삶을 뒤돌아볼 여가가 없다. 자전적 에세이를 쓰는 까닭은 오늘날의 나의 작업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제3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게 되었는지 알리기 위함일 뿐이다. 퇴임하고 난 후 학문을 계속하는 분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것은 평생 연구하여오던 학문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인문학이나 예술은 퇴임하고 난 후에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앞세대의 미국 학자들이나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에서 보아왔지만. 이제는 미국이나 일본도 학교에서 퇴직하고 나면 더 이상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니 더욱 씁쓸해 진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인문학은 더욱더 세분화되어 평생 그 작은 주제만 다루다 보니 얼마가지 않아 연구할 주제가 고갈될 뿐만 아니라 세분화된 주제들도 만족스럽게 풀리지 않으니 퇴임 후 아무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다못해 전시가 열려도 가지 않는다. 취미로라도 살려서 가봄 직한데 전시도 가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니 가슴이 더욱 아프다. 그러다 보니 만나보면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의 이야기 등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되풀이할 뿐이다. 바야흐로 제3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지금, 무슨 회고록이나 자서전인가. 

1999년에 국립박물관을 퇴임하고 난 후 곧바로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로 부임하여 강단에 서자마자 학문적 변화가 점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몇 년 가지 않아 ‘변화의 확실한 궤도’에 올라갔음을 확신했고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시에 이화여대 뒷문 근처에 작은 개인 연구원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새로운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2005년이었다. 그러니까 서기 2000년, 즉 21세기는 내게는 기원전 전후만큼이나 나에게는 역사적 전환기임을 알고 연구원을 열었고 그즈음부터 지금까지 매일 매일 앞으로 앞으로 미래로만 나아갔지 과거를 되돌아볼 틈이 없어서 과거란 점점 더 멀어져 아스라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이야기를 쓰노라니 80년 삶이 800년, 아니 8000년은 지나온 것 같다. 이제 시간상으로 차례대로 쓴다면 대학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될 터이지만, 요즘 일주일간 일어난 큰 사건을 지나칠 수 없어 다시금 1960년에서 훌쩍 뛰어넘어 2019년으로 와서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쓰고자 한다. 그러니까 평생 한 일이 옳은지 일본학계의 반응을 보는 일이어서 운명적인 발표자리였다. 지난해 10월 1일 문득 일본 문화청과 교토국립박물관 공동 초청장과 함께 나의 연구 성과를 강연해 달라는 이메일이 왔다. 놀랐고 기뻤으나 한편 슬펐다. 현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들어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있을 터인 학자들은 보통 초청하지 않는다. 하여튼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둘러야 했다. 왜냐하면 기왕의 성과를 한국미술로 발표한다면 준비할 것도 없지만, 그러나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는 성격이라 새로운 주제를 찾아야 한다. 한국 학자가 일본에 초청되면 흔히 한국의 불교미술에 대하여 강연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평생 우리나라의 불교미술을 연구해왔다면 일본 미술도 연구할 수 있어야 나의 이론은 보편적인 것이 된다.

우리나라는 한국 불교미술만 연구하지 중국이나 일본, 더 나아가 티베트 불교나 불교미술 전공자가 없다. 그만큼 시야가 좁다. 일본의 스님 쿠우카이(空海 774~835)는 견당사遣唐使 일행과 함께 804년 장안에 도착하여 청룡사 혜과惠果로부터 밀교를 전수 받아 806년 귀국하여 고야산高野山 금강봉사金剛峯寺를 밀교도량으로 삼으며 밀교를 널리 펴며 적멸에 들기까지 지낸다. 823년 천황으로부터 교토의 도오지(東寺)를 하사 받아 일본 진언밀교의 총본산이 된다. 반면 통일신라는 40여 년에 걸친 유학생활을 마치고 821년에 귀국한 도의道義가 교학 중심의 불교계의 배척을 받았지만, 그 당시에 많은 승려가 830년과 840년 사이에 중국에 가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받아 돌아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열게 된다. 도의는 현재 한국 조계종의 조종祖宗이다.

일본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독특한 표현을 한 국보 만다라 그림 한 점을 택했다, 바로 10세기와 11세기에 걸친 제작시기가 설정되어 있는 <코지마(子島) 만다라>였다. 나라奈良 근처 코지마데라(子島寺) 소장이어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고후꾸지(興福寺)의 스님 신고우(眞興 935~1004)가 진언밀교의 한 류파인 코지마류(子島流)를 창시했으므로 그의 원력으로 만들어진 만다라이기 때문에 10세기 후반의 제작이라 해도 무난하리라.

만다라는 거의 다 양계兩界 만다라로 금강계 만다라와 태장계 만다라 두 폭이 세트를 이루는데, 코지마 만다라도 양계 만다라로 금강계 만다라는 크기가 세로 352, 가로 298센티미터이며, 태장계 만다라는 세로 351.5, 가로 306.2센티미터로 대작이다. 밀교만다라 회화를 연구한 적이 없는 나는 과감히 그 작품을 선정하여 발표주제를 일본에 보내 놓고 연구에 돌입했다. 평생 불교미술을 연구해오며 연구대상을 전 세계의 미술, 즉 인류가 창조한 일체의 조형예술품을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이란 이론으로 풀어내며 그 이론이 ‘보편적’이라 큰 소리쳐왔다면, 일본 밀교의 만다라도 풀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도오지(東寺)라는 진언종의 총본산이 있는 교토에서 일본 미술의 대표적 만다라를 발표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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