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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 어떤 졸업, 유예된 시작

“기껏 여기저기 자료 뒤적이고 분석해서 가나다 군별로 지원 대학 배치해 줬더니, 뭐라구? 정시 지원 자체를 아예 안 했다고? 그럴 거면 정시 상담은 뭐하러 했냐?”

“죄송합니다.”

“나랑 상의 한 마디 없이 니 맘대로 한 것도 문제지만 설령 그랬더라도 바로 그 뒤에 얘길 했어야 할 거 아니냐. 너 앞으로 내 얼굴 볼 생각 없지?”

“아닙니다, 선생님.”

“명색이 내가 니 담임인데, 니가 나를 담임으로 생각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니냐. 지금껏 전화 한 통 없다가 정시 합격상황 파악하려고 연락하니까, 뒤늦게 전화해서 뭐가 어째? 정시 포기하고 재수하기로 했다고? 일 년 간 널 담임했던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냐?”

“……….”

Y는 더 이상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나는 조금 격앙된 어조로 화풀이하듯 얼마간 더 그를 몰아붙이다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시 가나군 합격자 발표에 이어 마지막으로 다군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밤, 열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Y는 수시전형에 지원하지 않고 오로지 정시전형을 바라보며 수능 준비에 모든 걸 걸었던 학생이다. 그랬던 그가 정시전형마저 아예 포기해버렸다. 그것도 담임과 애써 상담한 내용을 다 뭉개버린 채 사전에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자신의 수능 성적이 못마땅했던 그는 결국 대학 진학을 내년으로 유예해버린 것이다. 그런 사실을 원서 접수 기간이 훨씬 지나서 정시 합격자 발표가 마무리되던 날 밤 늦은 시간에야 알게 되었으니, 담임인 내가 그의 행실을 괘씸하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더구나 정시 원서 접수할 때 임의로 변경한 사항이 있거나 군별로 합격자가 발표되면 꼭 알려 달라고 겨울방학 들어가기 전에 학급생들에게 신신당부하고 SNS에 학급 단체방을 개설해 몇 번씩 공지까지 했던 터라 그의 전화를 심상한 마음으로 받고 있기가 더 어려웠다.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려야 했으므로 그에게 담임교사에 대한 도리를 지키는 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화가 난 것은 바로 그 점, 그러니까 Y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지 않았던 일’, ‘하지 않았으나 해야만 했던 일’ 때문이다. Y는 적어도 정시 다군 합격자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자신이 결단한 내용을 담임인 나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다. 다음날 오전 통계 담당 선생님한테 제출하기 위해 내가 휴대전화도 없는 Y와 연락을 시도하며 학급의 대학 지원 상황과 결과가 기록된 미완의 원서발행대장 파일을 들여다보던 그날 밤이 되기 전까지는.

그날 밤 늦게 Y가 걸어온 전화를 그렇게 끊어버린 후 내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그에게 뾰족하게 날이 선 감정을 배설하듯 퍼부어댔지만 마음이 후련하기는커녕 자꾸 뭔가 해서는 안 될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께름칙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정시 원서접수를 포기하고 재수를 선택한 것은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무섭도록 외로운 실존적 결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남들이 모든 입시 일정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고교 시절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즐기는 동안 혼자 독서실을 다니던 Y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새된 소리로 꾸짖는 거친 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였을 거라는 것.

며칠 뒤 졸업식이 열렸다. 다행스럽게도 Y가 일찌감치 식장에 들어와 자신에게 배정된 좌석 에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나를 보고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연락하라면서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흔히 말하듯,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이다. 이 말은 해마다 2월이 되면 대한민국의 수많은 학교 강당에서 수천 번도 넘게 울려 퍼지는 해묵은 클리셰다. 이 클리셰가 그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격언처럼 빈번하게 애용되는 것은 그것이 삶의 진실을 함축한 희망의 언어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떤 졸업은 시작을 유예하는 선고宣告다. 부디 Y의 유예된 시작이 환한 빛을 품고 있기를, 그리하여 일 년 뒤 유예의 빗장에서 풀려난 그의 시작이 새롭고 찬연하기를!                                     
 

정경수
한때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근무하다, 이십대 중반을 넘어설무렵 교직에 입문해 현재 광주 서석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정경수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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