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번쩍번쩍 간다. 엊그제 돼지띠 새 달력을 걸었는데, 벌써 입춘이 지났다. 우수 넘으면 개구리 잠 깨는 삼월이다. 금년 겨울은 비도 드문 눈도 드문, 가물다. 지리산도 정초에 큰 눈 한번 내리고는 통 소식이 없다. 눈이 와도 새벽녘에 잠깐 흩날리다 마는 정도, 겨울이 이러다 말고 봄으로 직행하는가 싶다. 어릴 때는 그리도 안 가더니, 머리 희끗해지고는 세월 가는 것이 보인다. 유년에 기다가 청년에 걷다가 장년에 이르러 달려간다. 노년의 시간은 날아가려나? 금년 한 살 더 자시는 팔순 노모님 말씀.
“하루가 번쩍 가버리고, 일 년도 금방이고, 십 년도 금방이더라.”
“세월이 그렇지요?”
“칠게 잡아 놓은 대통발이 엎어지면 뚜껑이 열려 가지고 게가 쏟아져 나오지 않냐. 그것들이 살라고 뻘밭을 뻘뻘뻘뻘 빨리도 기어가잖어, 세월이 그런 거 같어”
1년이 365개의 날을 가지고 열리는데, 시작하자마자 열린 뚜껑 밖으로 도망치는 칠게처럼,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는 얘기다.
‘기어 다니는 것들이 / 날아다니는 것들을 / 잡아먹으려고 하네 / 세월이 그런 것 아닐까?’라고 했던, 세월에 관하여는 황지우의 절창이 있지만, 하루하루 뻘뻘뻘뻘 사라지는 칠게도, 결국은 우리가 쫓아갈 수 없는 곳으로 아득하게 사라져버리는, 그런 느낌을 준다.
상선암 올라가는 길에 천은사 종고 스님에게 들러 차 한 잔 얻어 마셨다. 스님은 위쪽 견성암에 터 잡고 사는 천은사의 노장님.
“상선암에 젊은 수좌가 살고 있는데, 가 봐야 얻을 것도 없고, 헛걸음일 거라. 개문칠건사라고 하잖아요? 스님 사는 게 그래요. 차나 한잔 얻어 마시면 잘한 일일 거고.”
아침에 일어나 대문을 열면서 걱정해야 하는 일곱 가지의 일이 ‘개문칠건사開門七件事’다. 중국 남송시대 오자목이란 사람이 쓴 말이다. 매일 먹고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 땔감 곡식 차 기름 간장 소금 식초를 말한다. 7가지 중에 ‘차茶’가 들어간다. 그 곤궁한 삶에도 ‘차’가 있어, 나른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 수 있다. 토굴살이 스님의 삶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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