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개론] 행위와 과보, 그리고 불교의 선악관
상태바
[다시 쓰는 불교개론] 행위와 과보, 그리고 불교의 선악관
  • 장휘옥, 김사업
  • 승인 2019.02.26 15: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 원수처럼 행동한다.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악업을 행하기 때문에.” (『상윳따 니까야』 2.22)

“말을 삼가고, 생각을 잘 제어하라. 몸으로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이 [신・구・의] 3업의 길을 청정히 하면, 선인(=붓다)들이 설한 길에 도달할 것이다.” (『법구경』 제281송)

|    행위와 과보가 일어나는 과정과 그 교훈

우리가 하는 행위, 즉 업은 다음 세 가지 중의 어느 하나다. 첫 번째가 몸으로 행하는 신체적 행위로 이것을 신업身業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입으로 하는 행위, 즉 말(언어)이다. 이것을 구업口業이라고 한다. 세 번째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 즉 생각(정신 작용)으로 이것을 의업意業이라고 한다. 이 셋을 모두 합쳐 3업三業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이 행위를 다시 선악을 기준으로 셋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선한 행위를 선업, 악한 행위를 악업,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아닌 중성적인 행위를 무기업無記業이라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신업・구업・의업 가운데 어느 하나인 동시에 선업・악업・무기업 중의 어느 하나다. 가령 아무런 사심 없이 타인의 짐을 대신 들어 주었다면 그것은 신업인 동시에 선업이다.

불교의 업사상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원칙으로 한다. ‘선인락과, 악인고과’와 ‘자업자득’이다. ‘선인락과善因樂果’는 선업에는 좋은 과보(=행복)가 따르고, ‘악인고과惡因苦果’는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불행)가 따른다는 뜻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은 행위를 한 당사자가 그 행위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선・악・무기업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한다. 행위는 그 행위를 일으키려는 의도에 의해 일어난다. 불교는 의도가 행위, 즉 업의 본질이며, 중생에게는 ‘의도의 자유’가 있다고 인정한다. 선・악・무기업 중에서 어느 것이라도 행할 수 있지만 그 중의 어느 하나를 행하는 것은 ‘의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한 행위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행위의 당사자에게 그 행위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올 힘이나 영향력을 남기고 사라진다.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 따르면 이 힘이나 영향력은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보존된다. 아뢰야식은 우리 마음의 뿌리에 해당하며 일종의 무의식에 가깝다. 땅속에 있는 뿌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듯이, 아뢰야식은 그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작용한다. 단 1초도 멈추는 일 없이 언제나 작용한다. 

적당한 온도와 영양분이 주어졌을 때만 씨앗에서 싹이 트듯이, 자신이 행한 행위가 남긴 힘이나 영향력에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본인에게 행・불행의 과보가 찾아오거나 그 힘의 성질에 맞는 새로운 행위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악업이 남긴 힘에 적당한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불행이 찾아오거나 또다시 새로운 악업을 행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절도 행위를 하면 적당한 때에 형벌 등의 과보를 받는다. 또한 적절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이전의 절도 행위가 남긴 힘에 의해 또다시 절도를 포함한 악업을 행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악업을 반복하면 그것으로 인해 남겨지는 악한 힘은 더욱 강성해질 것이고, 또다시 악업을 행할 가능성이 높아짐과 동시에 더 강력한 과보가 도래할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행・불행의 과보든 동일한 성질의 새로운 행위든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은 본인의 ‘의도의 자유’에 의해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출퇴근 만원 지하철만 타면 소매치기 하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하는 절도범이라면, 의도적으로 붐비는 지하철 승차를 피하는 것도 더 이상 소매치기 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사업 실패를 반성과 도약의 계기로 삼겠다는 의도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불행은 더 이상 불행이 아닐 것이다.

윤회를 통하여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선업만 행한 사람도 없고, 악업만 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선업과 악업이 남긴 힘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선업과 악업 중 어느 쪽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며, 행・불행의 과보 중 어느 쪽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가능성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실제의 행위나 과보로 실현된다.

조건은 ‘의도의 자유’에 의해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으므로, 노력과 정진으로 바람직한 조건을 만들면 선업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고, 그 결과 좋은 과보가 찾아온다. 따라서 과거의 어느 행위 때문에 운명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거나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은 부정된다. 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일어난다는 ‘신의론’도 부정되고, 아무런 원인 없이 만사는 일어나므로 행위에는 과보가 없으며 선업을 행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우연론’도 부정된다.

석가모니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붓다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업론자이고 행위론자이며 정진론자라고 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며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은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거나 방심하지 말고 정진하라”였다. 불교가 ‘의도의 자유’에 근거해 노력・정진하는 것에 얼마나 큰 의의를 부여하는가를 잘 보여 주는 대목들이다.

과거의 행위가 남긴 힘과, 자유로운 의도에 의해 형성되는 현재의 조건들에 의해 모든 행위가 일어나고 과보가 나타난다. 과거의 행위를 한 자도 본인이며 현재의 조건을 만드는 자도 본인이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와 과보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조건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행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 현재 본인의 상황은 직전까지 본인이 행한 행위의 총체적 결과다. 그러니 남 탓하지 말고 정신 차려 정진해야 한다. 다음의 경전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둘 필요가 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