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누구 안에 있는 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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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구 안에 있는 벽일까?
  • 권이진
  • 승인 2019.02.12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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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싣지 못한 옮긴이 글

 

《무슨 벽일까?》 존 에이지 지음, 권이진 옮김

 

아들 녀석과 만난 지 일곱 해째 되었어요. 녀석과 지내면서 답답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아기 때는 말을 못 하니까 답답했는데, 말문이 트인 뒤로는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요. 으이구, 이 청개구리 같은 녀석.
그런데 말을 안 듣는 것보다 더 가슴 답답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어요. 바로 작은 도전 앞에서도 녀석이 뒤로 물러날 때예요. 그럴 때면 ‘저렇게 용기가 없어서 세상을 잘 살아갈 수나 있을까?’ 하는 오지랖이 앞서서 녀석이 포기하지 못하게 추근거리죠. 그래도 녀석이 계속 뒤로 물러서면 저도 모르게 화를 내게 돼요. 그러다 결국 제 화를 못 이기고 윽박을 질러서 아들 녀석이 엉엉 운 적도 있어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다가 저도 함께 울었지만요.

‘어떻게 하면 아들 녀석이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책과 관련한 일을 하는 저는 책 속에서 힌트를 찾아보았어요. 좋은 책들이 많았지만, 뭐랄까, 제가 만난 책들은 교훈을 가르치는 데만 정신이 팔린 것 같아서 조금 거부감이 들었어요. 아들 녀석도 시큰둥해했고요. 그러던 와중에 불광출판사 편집부에서 번역을 부탁한다며 책을 한 권 내밀었는데 글쎄 제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런 책이지 뭐예요.
《무슨 벽일까?》는 일단 구성이 아주 기발해요. 책을 펼치면 좌우 양쪽 면이 만나는 곳에 두터운 벽이 턱 하고 서서는 벽 이쪽 세계와 벽 저쪽 세계를 나누고 있죠. 귀여운 꼬마 기사가 나와서 말하기를, 자기가 있는 벽 이쪽은 안전하고 저쪽은 위험하대요. 그도 그럴 것이 벽 저쪽에는 호랑이도 있고, 고릴라도 있고, 코뿔소도 있거든요. 생쥐 한 마리에 놀라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겁쟁이들이지만요.
벽 저쪽에는 거인도 있는데, 꼬마 기사는 거인이 자기를 잡아먹을 거라고 말해요.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벽 저쪽으로 넘어가서 거인을 만난 적도 없는데 어찌 그리 굳게 믿는지. 이런 꼬마 기사를 보며 제 아들 녀석이 떠오르지 뭐예요. 이 겁쟁이 녀석 같으니라구.
그런데 안전한 줄로만 알았던 벽 이쪽에 물이 점점 차올라요. 꼬마 기사는 물에 빠지고, 물고기 떼가 꼬마 기사를 덮치려는 순간... 앗! 스포일러 그만해야겠다.

영어로 된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왜 나는 도전 앞에서 주저하는 아들 녀석에게 화를 내는 걸까?’ 아마도 제가 겁쟁이라 그런 것 같아요. 아들 녀석에게서 제 부끄러운 모습을 보는 게 불편하기도 하고, 녀석만은 저 같은 겁쟁이가 아니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고 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버럭 지른 게 아닐까 싶어요. 이런, 녀석에게 또 미안해지네요.

《무슨 벽일까?》는 제 아들처럼 도전 앞에서 머뭇거리는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에요. 책을 보며 가슴이 뜨끔거리는 부작용을 감수하셔야 하는 어른들도 적잖이 있겠지만요. 자기 안의 겁과 마주해서도 그렇고, 아이에게 따스한 손을 잘 내밀지 못해서도 그렇죠. 저처럼 말이죠.

오늘 저녁에 퇴근해서는 어제보다 더 힘껏 아들 녀석과 끌어안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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