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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통신] 스켑틱skeptic

● 『스켑틱skeptic』이란 잡지가 있다. 1992년 마이클 셔머가 주도하는 미국 스켑틱소아이어티가 창간한 과학 잡지다. 셔머 외에도 『이기적 유전 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나 『총균쇠』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도 간행에 참여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모토는 과학적 회의주의다. 한국어판도 2015년 부터 발간되고 있다. 정기구독자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스켑틱은 한번 읽고 버려지는 잡지가 아니다. 과월호의 판매도 적지 않아, 잡지로는 드물게 재판을 찍는 경우도 있다. 스켑틱 매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스켑틱은 우리를 미혹하는 것들을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태도를 말 합니다”

● 회의주의(skepticism)의 역사는 오래됐다. 서양철학에서는 소피스트 중 하나였던 프로타고라스를 회의주의의 시초로 꼽는다. 동양철학의 노자도 회의주의자였다. 이들은 ‘철학적’으로 의심하면서 세상을 바라봤다. 철학의 시작도 회의주의였을 것이다. 사이비 회의주의도 있다. 사회학자였던 마르셀로 트루지Marcello Truzzi는 사이비 회의주의의 사례를 분석했다. ‘의심하기 보다는 부정하는 경향’ ‘논증을 하는 척 하면서 조롱하고 인신공격을 하는 것’ ‘실험적 증거가 아닌 그럴 듯한 것을 가지고 반대주장을 하는 것’ 등을 사이비 회의주의로 꼽았다. 회의주의는 마틴 가드너에 이르러 과학적 회의주의로 꽃 피운다. 『이야기 파라독스』의 저자로 국내에도 친숙한 학자다. 그는 사이비과학이나 비이성적 주장에 대해 과학적 회의주의에 입각해 반론을 펼치며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선다.

● 붓다의 제자였던 사리풋다와 목갈라나도 회의주의자였다. 그들은 진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회의론과 불가지론을 지녔던 육사외도 중 하나인 산자야 벨라티풋타의 제자였다. 사리풋다와 목갈라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자신들의 스승이었던 산자야의 사상에 회의를 느껴 다른 제자 250여명과 함께 붓다께 귀의했다. 사리풋다와 목갈라나를 움 직이게 한 힘은 역설적이게도 스승 산자야가 가르친 회의주의였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그들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붓다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불교는 믿음信을 맹목적으로 강요하지 않는 종교다. 불교에서 ‘믿음’을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 쉬랏다śraddhā는 진리에 대한 믿음,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의미의 믿음이다. ‘쉬랏다śraddhā’는 ‘믿다, 한결같 다’라는 뜻의 ‘śrat’에 ‘지지하다, 받치다’라는 뜻의 ‘dhā’가 결합해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깨끗한 믿음이라는 의미로 정신淨信, 이해하고 믿는다는 해신解信이라고도 번역된다. 즉 믿음 이전에 진리에 대한 이해와 한결같은 깨끗한 마음이 전제된다.

●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가짜뉴스보다 무서운 건 깊이 따져보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고, 공부하지도 않고 몇 가지 사실이나 느낌만으로 믿는 태도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태의 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속에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마음이 깔려있다. 불교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태도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는 종교다. 진리라고 할지라도 묻고 따지고, 스스로 체험하라고 가르쳐야만 하는 종교다. 다르마에 의지하고, 스스로에게 의지하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불교의 수행법인 명상의 효과가 과학에 의해 입증되고 해명되고 있다고 한다. 불교는 과학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적 회의주의에 대해 자신을 열고 보여주는 종교다. 어쩌면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와 가장 근접한 종교가 있다면 바로 불교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맹신을 넘어 묻고 따지고, 탐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과학의 시대는 현실불교에 대해 그렇게 묻고 있다.

글. 유권준(주간)

유권준  reamo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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