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세상은 꿈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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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세상은 꿈이어라
  • 박재현
  • 승인 2018.11.2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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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이은영

한 해가 깊어간다. 멈춰 서 있는 듯이 보이던, 혹은 어서 지나갔으면 싶었던 기억들이 밀려나고 또 밀려든다. 내 국민학교 같은 반이었던 방앗간 집 딸은 책을 또박또박 참 잘 읽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은주였다. 병장 말호봉 때, 김해가 고향이었던 내 군대 동기생은 전역을 불과 보름 앞두고 휴가를 명받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수송부였던 그는 겨우내 기름때에 손이 터 있었는데, 내가 지금껏 보아 온 사람 중에 가장 착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다가, 빵집에서 딱 한 번 만났던 여고생도 있다. 문경이 고향이었던 그이는 이제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가을에 도토리나무에서 꿀밤이 떨어지고, 대추나무에서 벌레 먹은 대추가 비틀어지고,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듯 그렇게 기억은 흘러나가고 또 흘러들어온다. 시간을 시간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문득 돌아보면 세월은 너무 낯설어서 남의 기억이거나 남의 시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짠한 시간의 기억들이 섬뜩하니 겨드랑이를 스쳐 지나갈 때 소스라치듯 몸이 떨린다. 한 번만, 한 번만이라고 외쳐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 또한 가망 없고 하릴없는 짓임을 모르지 않는다.

형편이 닿으면 기억을 좀 잊고 살고 싶다. 내 기억인지 아니면 남의 기억인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실려 오면, 아주 낯선 표정으로, ‘누구세요?’ 하고 수줍게 물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겪지 않은 남의 일처럼, 가을 저녁 바람이나 까마득한 별처럼 내 기억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짠하게 여겨지는 아무것도 없어서, 낙동강 어귀의 비릿한 민물고기 냄새처럼 바람에 그냥 떠다녔으면 좋겠다. 그렇게 애당초 세상에 오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 없이 바람처럼 다녀갔으면 좋겠다.

어제, 꿈을 꿨다. 깨고 나서 온종일 께름칙했다. 젊은 날의 꿈은 깨고 나면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는데, 나이 들어서 꾸는 꿈은 온종일 찜찜하다. 기억과 꿈과 실재가 뒤죽박죽되는 느낌이랄까, 그런 찜찜함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기억이나 꿈도 지금 현재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실재일 것이다.

향백공向伯恭이 대혜 선사의 유배지로 편지를 보냈다. 대혜의 나이 61세 되던 1149년의 일이다. 그가 보낸 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혜의 답장만 볼 수 있다. 『서장書狀』에 있는 내용을 보면, 향백공은 대혜 선사에게, 깨달은 때와 깨닫지 못한 때 그리고 꿈꾸고 있을 때와 깨어있을 때가 같아야 하는 것이냐(悟與未悟, 夢與覺一)고 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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