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죽어 육도의 나루터 건너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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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죽어 육도의 나루터 건너지 않기를
  • 박재현
  • 승인 2018.10.0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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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이은영

도서관 사서는 머뭇거리며 고문헌실 열쇠를 풀었다. 굵은 쇠사슬 줄이 늘어지면서 묵직한 소리를 내며 헐거워졌다. 쇠사슬을 걷어낸 그는 이번엔 전자 카드를 도난방지시스템에 가까이 가져갔다. 기계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 다시 카드를 바꿔왔다. 기계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함께 온 다른 직원이 카드를 대자 쥐 소리 같기도 하고 새 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내며 잠금이 겨우 해제되었다. 고문헌실에 들어가서도 사서는 내가 요청한 문헌을 쉬 찾아내지 못했다. 함께 한참이나 쭈그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면서 책꽂이를 훑어나간 다음에야 겨우 찾아냈다.

 

단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그 책이 보관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나는 구한말 선암사에 거처했던 경운擎雲 원기(元奇, 1852~1936) 화상에 대해 살펴봐야 할 일이 생겼고, 이런저런 관련 정보를 주워 모으고 있던 차였다. 웬만한 내용은 얼마 전 출간된 『화엄종주 경운원기 대선사 산고집』에 다 실려 있어서 따로 품을 들여 찾아다니지 않아도 살펴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근래 몇 년 사이에 관련 주제로 한두 번 학술발표회도 있었다. 그러니 연구자의 식견으로 좀 속되게 말하면, 써먹을 만한 정보는 벌써 다 써먹었을 것이 뻔했고, 다시 들춰봐야 별로 나올 게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던 차에 그곳에 경운 화상이 저자로 되어 있는 『사문일과沙門日課』라는 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문헌이 늘 그렇듯이 전산상으로 검색되어도, 있어야 있는가 보다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직접 확인해보면 전산상에 나타나는 것과 전혀 다른 문헌인 경우도 있고, 저자가 다르거나 서지사항이 다른 경우는 부지기수다. 그래서 어떻게 생긴 책인지는 차치하고 그런 책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게 고문헌이다. 겨우 날을 잡아 나는 헛걸음을 각오하고 뙤약볕 속을 걸었다. 내가 가진 정보라고는 단 하나, 단국대학교 퇴계기념도서관 5층 고문헌실에 구한말 경운 화상이 쓴 『사문일과』라는 제목의 목판본木板本 문헌이 소장되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대학의 중앙도서관은 대개 그냥 중앙도서관이다. 그런데 죽전에 있는 단국대학교는 퇴계기념 중앙도서관이 공식 명칭이다. 또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있는 도서관 이름은 율곡기념도서관이다. 왜 이렇게 특이한 명칭을 붙이게 되었는지 따로 알아보지 않았다. 알 만한 사람들만 알지만, 단국대학교는 국학國學 분야에 상당한 전통과 내공을 가지고 있는 대학이니 그런 까닭이 아닐까 짐작한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는 무려 30년에 걸쳐 한자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해서 지난 2008년 10월 28일에 전질 제16권 규모의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을 완간한 바 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작업인지는 소식을 접한 중국 측의 반응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가장 완벽한 한자 사전은 중국학자를 부끄럽게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먼저 중국 국내 신문에 소개되었다. 또 “한국의 한 사립학교가 어떻게 30년을 하루같이 한자 사전이라는 무미건조한 영역을 묵묵히 가꿔 왔는지 흥미롭다. 중국 학술계에서는 명예와 이익으로 뒤덮인 ‘누런 서적’을 마주하는 자는 봉황의 털과 기린의 뿔만큼 귀하다. 누가 고요히 마음을 내려놓고 일심전력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있는가?”라며 중국 학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낡고 해져서 찢어질 것 같은 『사문일과』의 표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백 년도 더 된 종잇장이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속내를 드러냈다. 불빛을 만난 글자가 공기 속으로 휘리릭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돋보기를 들이대며 한 글자 한 글자 살펴 내려가는 동안, 도서관 사서는 갑자기 찾아온 낯선 이가 고서古書를 훼손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길로 표나지 않게 힐끔거렸다.

첫 장을 여는 순간 나는 소름이 끼쳤다. 목판본으로 인쇄된 첫 면의 한 귀퉁이에 누군가 정갈한 필체로 암호처럼 적어둔 몇 글자가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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