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이 얕은데 말이 깊으면 허물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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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이 얕은데 말이 깊으면 허물을 부른다”
  • 박재현
  • 승인 2018.09.0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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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사귐이 얕은데 말이 깊으면 허물을 부른다”
그림 : 이은영

“옛날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귐이 얕은데 말이 깊으면 허물을 부른다(交淺而言深 招尤之道也).’ 나와 그대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이 경전으로 나에게 인증認證받고 만세에 유포하여 중생들에게 부처의 종자를 심으려 하니 이것은 제일 좋은 일입니다.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을 인증받기에 적합한 인물로 생각하고, 진실한 소식으로 형식을 벗어나기를 기대하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혜 선사의 『서장書狀』이라고 하면 흔히 미묘한 선禪의 도리를 어려운 말로 남긴 편지글 정도로 생각한다. 게다가 출가수행자가 배우는 주요 교재이고, 간화선을 정통 수행법으로 하는 한국불교의 상황에서 『서장』의 위상은 가히 절대적이다. 이런 책이지만 너무 무겁고 어렵게만 대하면 늘 낯설고 멀게만 느껴진다. 남의 편지를 살짝 들춰보듯 좀 가벼운 마음으로 살펴보면, 또 다른 맛깔이 느껴진다.

앞의 내용은 『서장』 가운데 손지현이라는 인물에게 보낸 답장의 첫머리다. 경박하다고 욕먹을지 모르지만, 이 편지는 『서장』 가운데 킥킥거리고 웃으며 읽어도 좋을 만한 편지다. 이름 같아 보이만 ‘지현’은 관직명이다. 손지현의 이름은 여與이다. 지현이라는 관직은 중국 송나라와 청나라 때 지방 행정구역인 현縣의 수장首長이니, 손여는 요즘으로 치면 도지사쯤 되는 사람이었다. 사대부로서 학문적 역량도 상당했을 것이고 지방 정부 최고수장의 자리에 있었던 만큼 자부심도 강했을 것이다.

그는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모양이다. 당시에 유통되는 『금강경』의 여러 판본을 가다듬고 고쳐 편지와 함께 대혜 선사에게 보냈다. 손여는 대혜 선사와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사이는 아니었다. 당시 대혜 선사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수정 보완한 『금강경』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서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선사가 답장에서 “사귐이 얕은데…”라고 옛말을 인용하여 말문을 연 것이다.

손여는 내심 훌륭하다는 평가를 기대하며 보냈을 것이지만 선사로서는 좀 뜬금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손여는 함께 보낸 편지에서 당시 이름난 고승들의 『금강경』 번역을 두고, “참됨을 잊었고, 근본 진실을 어지럽혔으며, 문장과 글귀를 더하거나 덜어내어 부처의 뜻에도 어긋난다”고 야박하게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잘못을 교정하여 새로운 『금강경』 번역을 완성했다고 적어 보냈다.

얼떨결에 사대부가 번역한 『금강경』을 받아든 선사는 일단 고마움을 표하는 말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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