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평화를 보는 선禪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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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평화를 보는 선禪의 시선
  • 박재현
  • 승인 2018.08.2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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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이은영

세상일에 마음을 쓰지 않거나 세상과는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 선禪의 도리인 양 생각되던 때도 있었다. 반대로 세상일에 무신경한 태도가 조선불교를 망쳐버렸다고 비판받던 때도 있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격동의 세월 속에서 특히 그랬다. 그 시기의 선사들은 입전수수入鄽垂手가 선의 본령임을 잊었느냐고 목청을 높였고 직접 실천하기도 했다. 입전수수는 단순히 몸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일을 남의 일인 양 도외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판단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 세상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지난 남북정상회담 취재에 참여한 언론사만 내외신 총 372개사 3,051명이나 되었다. 남북과 세계 평화의 문제를 시사로 보도하는 매체는 많고 뉴스도 넘쳐난다. 누가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했다느니, 어디서 언제 만날지도 모른다느니, 결국 만나지도 못하고 결실도 없을 거라느니,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라느니, 출처도 근거도 없는 별의별 말만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정작 통일과 평화의 방향성을 담은 굵고 큰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불교계에서도 별다른 메시지를 내지 못하고 있다. 

출가자가 줄어든다, 신도 수가 줄어든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지 오래다.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해법도 가지가지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사태가 초래된 근본적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세상일에 먼 산 바라보듯 하는 태도가 반복되고 길어지면,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왜 불교가 있어야 하는 건지 소리 없이 물을 것이다. 몇 번 물어봐도 신통한 대답이 들리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더 묻지 않고 아예 관심을 꺼버릴 것이다. 종교는 박해나 탄압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멸自滅해갈 뿐이다.

다시 한반도 전체의 정세가 꿈틀대기 시작하고 있다. 살기 어린 막말이 대륙을 넘나들다가 별안간 터진 대화의 물꼬를 보며 평화란 무엇이고, 한반도에서 평화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 남북은 평화로운 상태일까, 갈등하는 상황일까.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라는 사전적 의미로 평화를 이해하면 그만일까. 총소리가 멈춘 것이 평화라면 지금의 이 정전停戰 상태는 다툼일까 평화일까. 정전상태가 다툼이라면 다툼의 현상은 어디에 있는가. 정전상태가 이미 평화라면 왜 또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을 말하는 것일까. 다툼의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쪽이 제압되어 다툼 현상이 사라진다면, 그 상태는 평화일까 평화가 아닐까.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8.29~1944.6.29)은 평화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데 가장 좋은 단서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의 생애가 근현대 전쟁사의 한복판을 관통해 있고, 그 속에서 그는 두드러지게 평화를 모색하고 말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등 놀랍게도 이 모든 전쟁이 만해의 생애와 겹쳐져 있다. 그는 관군과 동학, 전통과 근대, 제국주의와 민주주의가 부딪치는 현장에서 생명生命의 보편성을 통찰했다. 그리고 이 생명성에 반하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그에 항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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