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개론 ]석가모니를 만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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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불교개론 ]석가모니를 만나는 길
  • 장휘옥, 김사업
  • 승인 2018.08.28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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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法)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상윳따 니까야』 22.87)

 

“예나 지금이나 나는 단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알릴 뿐이다.”

 (『맛지마 니까야』 22)” 

 

|    석가모니를 만나는 두 가지 길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그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20세기 전반기에 세계 지성계의 스타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대 최고의 석학들만 교단에 서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였으며, 철학자로서는 드물게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 있던 그는 나치가 제공하는 특권을 거부하고 청빈한 생활을 이어 갔다고 전해진다. 그는 석가모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은 석가모니를 따랐을까? 그는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지만, 수중에는 이미 다 얻고 있다.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다. 그가 존재해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좋다. 그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가 곧 설법인 석가모니. 그를 만날 수는 없을까? 길은 있다. 하나는 전해 오는 그의 전기나 말씀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온몸으로 직접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간접적으로 석가모니를 만나는 데서 그친다. 이 만남에서는 석가모니는 석가모니이고, 나는 나다. 내 입장에서 석가모니를 만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가계나 시대 상황, 가르침 등을 읽고 자기의 기준에서 석가모니를 판단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를 만나는 또 하나의 길은 직접 만남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미 고인이 된 분을 무슨 수로 만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형체 있는 뭔가를 면전에서 마주하는 것만이 ‘직접 만남’일까? 

당나라 때 무착無着 스님이 중국 산서성山西省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았다는 게송이 있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부처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아서 변함이 없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내 마음이 티 없이 깨끗해 진실하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음과 욕망, 집착과 망상이 종적을 감춘 마음이 바로 석가모니의 마음이다. 내가 그 마음이 되었을 때 나는 석가모니가 본 세계를 직접 내 몸으로 똑같이 본다. 힘들어하는 눈앞의 사람들, 저 멀리 들리는 뻐꾸기 소리도 마음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로 보이고 들린다. 석가모니와 같은 마음 상태에서 같은 세계를 볼 때, 그때 석가모니와 나는 다른 사람일까? 내가 곧 석가모니고 석가모니가 곧 나다.

이렇게 석가모니와 나 사이의 구분이 붕괴되었을 때를, 불교, 그중에서도 특히 선禪에서는 ‘석가모니를 온몸으로 직접 만난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석가모니 그 자체가 되는 것으로, 석가모니가 아닌 내가 저기에 있는 석가모니를 직접 만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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