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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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
  • 이이화
  • 승인 2018.08.23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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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
저작·역자 이이화 지음 정가 18,000원
출간일 2018-09-03 분야 역사
책정보

판형 신국판(152×225mm)|두께 26mm 544쪽 | ISBN 978-89-7479-442-2 (0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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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한국불교 1,600년, 그 명과 암을 솔직하게 그려낸
역사가 이이화의 쉽고 재미있는 불교사 이야기!

저자소개 위로

저자 _ 이이화

지은이는 1937년 대구에서 유학자인 야산(也山) 이달(李達)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대둔산에 들어가 한문 공부를 했으며, 청년기에는 민족문화추진회·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근무하며 한국학 연구에 전념했다. 이어 역사문제연구소장·『역사비평』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사업’을 주도하여 이를 학문적으로 재평가하고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와 함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등을 맡아보면서 서울 종로에 전봉준 동상 건립을 이루었다. 서원대 석좌교수를 지냈고,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을 맡아 2018년 가을 개관을 서두르고 있다.

그동안 민족사·생활사·민중사 연구에 열정을 쏟았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 인물을 재평가하는 인물 탐구에 주력했다. 이를 통해 일반인들이 우리 역사를 재미있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여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 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한국사 연구 활동과 더불어, 부친에게 교육받은 유불선 합일사상을 기억해 한국역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온 불교의 정치적·사회적·신앙적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여 『불교신문』, 『불광』 등에 관련 글을 써 왔다. 특히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평등’·‘평화’·‘인권’ 이념과 ‘중생 제도’라는 실천운동은 지은이의 역사관에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저서로는 『한국사 이야기』(전 22권),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10권), 『한 권으로 읽는 한국사』,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전봉준, 혁명의 기록』, 『허균의 생각』, 『위대한 봄을 만났다』, 『민란의 시대』 등 다수가 있다.

목차 위로

머리말. 오늘날 한국불교는 어떤 과제를 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1부. 불교의 전래

1. 불교의 첫 전래, 고구려
2. 왕즉불사상과의 접목
3. 고구려불교와 도교의 충돌
4. 백제의 불교 수용
5. 백제의 미륵불은 국가 수호신
6. 뒤늦게 전래된 신라불교
7. 죽음으로 얻은 불법 공인
8. 남방불교의 요람, 가야

제2부. 화려한 신라의 불교사상

9. 신라 진호불교의 기반
10. 당당히 떠나는 신라의 유학승
11. 원효와 의상의 시대
12. 실천적 포교승, 의상
13. 민중 속으로 퍼진 정토・약사・관음신앙

제3부. 갈등과 새 바람

14. 타락하는 승려, 뒤로 부는 새 바람
15. 선문을 일으킨 선각자들
16. 구산선문 일어나 새 선풍 불다
17. 미륵 현세를 열망한 민중

제4부. 불교정치술

18. 신비에 싸인 도선과 풍수설
19. 궁예와 미륵 세력의 결합
20. 진훤의 불교 세력 이용
21. 다양한 사상을 수용한 왕건
22. 불교는 나라와 임금을 지켜야 한다

제5부. 반성하는 불교

23. 불법과 충돌하는 유학
24. 승려들이 장사를 벌이다
25. 의천과 천태종의 창종
26. 사원 토지의 확대와 지눌의 출현
27. 한뜻으로 전진하는 결사운동
28. 참수행 피우는 백련결사

제6부. 팔만대장경의 힘

29. 바야흐로 맞은 압박과 비애의 시대
30. 화려한 고려문화, 고려미술
31. 불탑의 변화와 불경 인쇄
32. 빛나는 민족유산, 팔만대장경의 조성

제7부. 불교와 성리학

33. 불교의 침체와 성리학자의 부상
34. 왕사 보우와 신돈의 개혁 정치
35. 신돈의 죽음, 이단론의 등장

제8부. 불교는 이단이다

36. 부처는 정신계의 주인이 아니다
37. 극렬해진 불교 이단 논쟁
38. 고려불교가 길들인 생활문화
39. 무학과 이성계의 만남

제9부. 불교정책의 이중성

40. 궁중불교와 유불선 합일사상
41. 세종 불교정책의 겉과 속
42. 세조가 편 불교진흥정책
43. 본격적인 불교 압제의 시작
44.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소용돌이
45. 문정왕후의 승과 부활

제10부. 호국불교와 민중불교

46. 조일전쟁과 호국불교의 전통
47. 조일전쟁・조청전쟁 뒤의 사정
48. 조선 후기 민중불교의 확산
49. 불안한 사회의 변혁 세력이 되다
50. 위경의 등장과 원당 금지

제11부. 승려의 자유와 실천

51. 정조의 타협적 불교정책
52. 탄압받는 서학·동학, 자생하는 불교
53. 개화운동과 승려의 현실 참여
54. 이동인과 탁정식의 죽음
55. 친일불교와 새로운 시련

제12부. 식민지 시기 불교와 해방 이후의 불교

56. 식민지 초기 불교의 친일화 과정
57. 민족불교와 친일불교의 갈등
58. 해방 뒤 비구-대처의 분쟁
59. 오늘날의 한국불교

주요 참고문헌
도판 출처
별지. 연표로 보는 한국불교사

상세소개 위로

불교가 국가 통치 시스템으로 작동했던 삼국시대부터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수모를 겪었던 격동의 1980년대까지
한국불교사 전반을 다룬 새로운 역사교양서

한국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맥락 하나가 있다. 바로 불교사이다. 불교는 고대 고구려에 처음 전래되어 백제, 신라, 가야에 전해졌고, 고려, 조선에 이어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불교사에 대한 시각은 주로 사상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춰져왔다는 점, 그리고 학술적인 측면으로 다루어져왔다는 점으로 인해 대중들이 접근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불교가 지나온 유구한 세월을 이 책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역사적 실체로서 불교를 바라보다

이 책은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내는 재야학자” 이이화의 저서이다. 저자는 우리 불교사를 한국사 전체의 틀에서 통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특유의 이야기체로 풀어낸다. 그리하여 그동안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불교사를 한층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바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일반 역사물에 있어 불교는 단독의 주제로 다루어지기 쉽지 않았다. 몇몇 대표적인 인물, 혹은 현존하는 문화재(유물)에 대한 서술 등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한국불교사를 단독의 주제로 다루고 있는 역사물도 대부분은 사상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결국 우리는 불교를 역사적 맥락의 종합적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일반의 역사에서 따로 떨어진 존재로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불교사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불교는 우리 역사 속에서 문화와 사상의 측면은 물론 정치, 경제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불교가 걸어온 길은 한국사 번외의 맥락으로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이 책 전체에 포진해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저자는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흐름 속에서 불교사를 조명한다. 그리하여 불교사의 명과 암을 꾸밈없이 서술해나간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한국불교사의 민낯

불교가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을 아주 일반적인 경우의 예 몇 가지로 살펴보자.

고대 삼국시대의 불교는 모든 계층이 섬기는 국가 종교이자 통치 이념으로 작동하며 강력한 왕권의 형성과 유지를 위한 결정적인 도구로 이용되었다. 일련의 흐름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원동력이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고려시대 3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온 몽골과의 혹독한 전쟁에서도 민심을 모으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는 불교의 힘이 컸다. 그 증거가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한편 억불의 기치 속에서도 왜란 당시 승군의 활동상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유정은 전쟁 이후에도 외교사절로 활동하며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왕실에서 이러한 점을 높이 사 해남 대흥사에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고 제향하게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불교사에 이와 같이 빛나는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는 역사 속에서 부패와 정화를 반복했고, 존경과 핍박을 번갈아 받아왔으며, 시대에 참여하기도 시대를 외면하기도 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그동안 빛에 가려져 알 수 없었던 어두운 면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 불교의 부패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한 가지는 고려 말 정치가들의 상소문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유학자인 당시 정치가들이 불교 배척 상소를 올린 것은 불교를 이단으로 바라보았던 그들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상소에는 당시 불교계의 부패상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절에 하사된 토지의 도조나 노비를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고, 귀족들과 뇌물을 주고받기도 하며, 일반 사회의 풍속을 해치는 등 상소문에 열거된 불교계의 부패상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또한 고려의 어느 시기, 귀족 세력의 재산 도피처로 절이 이용되었다는 점 또한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맥락 중 하나이다.

한편 불교가 핍박을 받았던 것은 비단 조선시대의 일만이 아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고려 무신정변으로 권력이 무신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종(敎宗) 세력들이 정권에 반기를 들게 되는데, 승려들의 무력 대항은 번번이 실패로 이어졌고, 일련의 한 사건으로 인해 고려 희종은 당시 권력의 중심이었던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기도 한다. 결국 오랜 세월 맥을 이어온 교종 세력은 무신정권에 의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도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불교사의 어두운 면 중 하나이다.


역사가 이이화가 들려주는 한국불교사의 거의 모든 장면

지난 2002년 출간되어 현재는 절판된 󰡔역사 속의 한국불교󰡕를 수정‧보완하고 새 옷을 입혀 다시 출간한 이 책은 역사교양서 중 거의 유일하게 불교사를 조명한 도서로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1,600여 년 역사를 편년체의 시간 순으로 서술한다. 또한 불교의 명과 암을 꾸밈없이 제시하면서 한국사와 따로 떼어 놓지 않는다. 그리하여 불교를 우리 역사의 실체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발견되어야 할 또 다른 점은 저자가 그동안 모든 방면에서 일정하게 유지해온 신념이자 역사관이 전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대승불교의 ‘중생 제도’이다. 독자들은 그동안 민중의 삶에 깊은 애착을 지녀온 저자의 역사관으로부터 불교사 속의 명과 암이 더욱 명확해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 말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책은 과거를 반성하는 자료의 하나로 쓰였다.” 이 말은 저자가 그동안 간직해온 불교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화쟁과 총화 등 찬란한 정신 유산을 이어오며 지금까지도 역사의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한국불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깊고 진심어린 조언이기도 하다.

이제 불교사를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일 시간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근인(近因)을 종교 혹은 신앙이라는 이유로 따로 떼어 놓게 된다면 우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일에 이 책은 매우 유용한 교양서가 되어 줄 것이다.

책속으로 위로

그런데 고구려는 왜 불법을 아무 저항 없이 수용했을까? 열렬한 불교도이자 강력한 힘을 가진 부견에게 잘 보이려는 몸짓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부처님이 가르친 중생 제도 같은 자비사상을 전파하려는 목적이었을까? 여기에는 더 큰 목적이 따로 있었다고 볼 정황 증거가 많다.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24쪽)

도림은 바둑을 잘 두었는데 개로왕도 정사를 밀쳐놓고 바둑 놀이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바둑으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도림은 개로왕에게 “백제는 천혜의 요새를 차지하고 있으나 성곽이 제대로 보수되지 않았고 궁궐이 퇴락하여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은근히 말했다. 개로왕은 이 건의에 따라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시켰다. 도림이 도망쳐 이 사실을 장수왕에게 보고하자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했고 개로왕은 포로로 잡혀 한강가의 아차산성에서 처형되었다.(35쪽)

백제 사회를 정토의 터전으로 여기게 하고 무왕 자신이 미륵불의 도움을 받았거나 자신이 현세한 미륵이라는 암시를 풍겨,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현세의 희망을 주고 일체감을 다지며 귀족들을 억눌러 절대 왕권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59쪽)

눌지왕의 한 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으레 하던 대로 무의(巫醫, 무당)를 불러 치료하게 했으나 낫지 않았다. 그래서 묵호자를 불러들여 병을 치료하게 했다. 묵호자가 부처님 앞에서 향을 사르고 서원을 내자 공주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눌지왕은 기뻐하면서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묵호자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묵호자는 왜 행방을 감추었을까? 아마도 임금의 신임을 받은 그의 행동에 무의를 비롯한 샤머니즘 세력이 제약을 걸었을 것이다.(62쪽)

이렇게 해서 이차돈은 형장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처님이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벌어지리라”고 외쳤다. 이윽고 그의 목을 칼로 내리치자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발 높이 솟았고 머리는 북쪽으로 날아가 경주 외곽에 있는 금강산 정상에 떨어졌다 한다. 또 햇빛이 사라져 갑자기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묘화(妙花)가 쏟아져 내렸으며 땅이 크게 울렸다. 사람과 만물이 슬피 울고 동물과 식물도 움직였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두려움에 떨며 서로 마주서서 곡을 했다. 길에는 통곡 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다.(70쪽)

의상은 원효와 헤어진 뒤 661년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 조국 신라는 백제 부흥군과 한참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어 당나라와 연합해 1차 평양 공격에 나섰다. 장안도 고구려 정벌로 소란스러웠다. 의상은 고국의 소식에 귀를 막았을 것이다.(104쪽)

정토신앙은 귀족과 노비에게도 유행을 탔다. 현세에서 부귀를 누리는 귀족들은 죽어서도 극락세계에 가서 영화로운 삶을 연장하고 싶었을 것이요, 노비들은 현세에 찌든 삶에서 벗어나 내세에는 극락세계에서 잘살아보겠다는 염원으로 아미타불을 신봉했다.(115쪽)

한편 왕자, 귀족 중에도 출가하는 이들이 많았으며 서민들도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큰 절에는 수천 명, 작은 절에는 수백 명의 승려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무위도식하는 무리들로, 선방에 누워 배를 긁으며 낮잠을 자고 게으름을 피웠으며 절 옆의 채전 일도 절에 딸린 종이나 신도들에게 맡겼다. 손발 하나 까딱하지 않는 신흥 귀족이었다.(128쪽)

왕실과 귀족의 타락과 갈등으로 지방 호족은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민중도 민활하게 움직였다. 화엄학을 닦는 승려들은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 왕실과 귀족들의 손가락질에 놀아나 어용으로 전락했으며 정토신앙과 관음신앙도 민중과 유리되었다. 이런 승려들은 중생 구제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잿밥에만 마음을 쏟아 평민 위에 군림했다.

선종은 이런 시대 분위기를 타고 일어났다.(132쪽)

농민전쟁의 주도 세력은 기층민이었다. 곧 하층 농민과 노비들이 그 기저를 이루었다. 이들은 산속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산사에도 출몰했으며 교종이나 선종의 사찰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불태웠다. 옥석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선승들은 한탄하면서 “옥석구분(玉石俱焚)”이라 불렀다.(147쪽)

고려 창건의 지배 세력은 도선을 철저히 이용했다. (…) 풍수설이 새 유행을 타는 분위기에서 이에 대한 그의 지식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신라 왕실에서 먼저 그를 초청했을 때 왕건은 보물을 놓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남쪽의 호족을 포용하는 과정에서 도선의 이미지는 이용 가치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선을 고려 건국의 당위성을 설파한 술승으로 만들어나갔던 게 아닐까?(164쪽)

당시 미륵신앙은 교종과 선종에 등을 돌린 민중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 궁예가 미륵을 자처한 것도 이런 경우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미륵을 표방한 것은 시대 사정의 반영이었다. 또 청광보살은 관음보살의 푸른색, 신광보살은 아미타불의 광명을 상징하여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을 미륵의 보처(補處)로 삼은 것이다. 행차에 방포를 입고 향과 꽃과 범패를 공양 받은 것은 바로 부처님이나 임금 또는 고승의 장엄한 나들이를 흉내 낸 것이다. 더욱이 궁예가 영역으로 한 북쪽과 중부 지역은 선종 세력이 약했으니 미륵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정치적 효과가 더욱 컸을 것이다.(168쪽)

부유한 절에서는 베나 곡식 따위를 가지고 장리 놀이를 했다. 중들은 각 고을에 관리인을 보내 해마다 이자를 거두어들였다. 중들은 일을 보려고 다른 지방에 나들이하면서 역관에서 잠자고 먹었다. 벼슬아치가 아닌 승려가 역관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데도 도리어 역에서 일보는 벼슬아치와 백성들에게 접대를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매질을 가했다.(202쪽)

사원전은 사패지(賜牌地)여서 국가에 조세를 물지 않았으므로 승려들은 잉여생산물을 더욱 축적할 수 있었고, 문벌 귀족은 이를 재산 도피처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12세기에 이르러 진짜 사원전과 위장 분산된 사원전은 산천을 경계로 하는 대토지를 점유했다.(218쪽)

이즈음 옛 동지로부터 이제 결사운동을 시작해보자는 편지를 받았다.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는 의욕이 솟아나 곧바로 팔공산 거조사로 나왔다. 이 절은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동료들은 그가 거조사에 오래 머물기를 바랐으며 그도 이 절에서 오랜 숙원인 정혜결사운동을 벌이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223쪽)

승려군들은 시가를 누비며 김덕명의 집을 헐어버렸다. 이어 최충헌의 집을 파괴하려 내달아가는 도중에 저잣거리에 이르렀다. 최충헌이 휘하 군사와 순검군을 거느리고 와서 격전을 벌여 300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최충헌이 성문을 닫아걸고 대수색을 벌여 도망친 승려를 색출해 모조리 죽였다. 마침 큰비가 내렸는데 빗물과 피가 섞여 냇물을 이루었다. 이때 죽임을 당한 승려가 8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시가지에는 시체가 쌓여 있어서 몇 달 동안 길이 막혔다고 한다.(239쪽)

원나라 지배 시기에는 한쪽 다리를 세우고 팔을 그 위에 얹어 편안한 자세를 취한 관음보살상도 등장했다. 이 부처는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구슬 목걸이를 둘렀다. 얼굴 생김새와 몸체, 옷의 매듭이 티베트 양식과 닮은 불상도 있다.(253쪽)

이 일은 시작한 지 16년 만에 완성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헤아릴 수도 없는 물량이 투입되어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대우를 잘해준다고 했으나 강제로 동원된 일꾼도 있었을 테고 눈치를 살피다 마지못해 참여한 이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통에 불사가 번거로워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부처를 믿으면 복을 받고 불사에 참여하면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재산을 털어 보시도 서슴없이 했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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