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해서 그린 초상화인 ‘자화상(self-portrait)’이라는 용어는 끄집어내다, 발견하다, 밝히다, 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portrahere’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뜻의 ‘portray’가 되었고, 자아라는 의미의 self와 portray가 합하여 자화상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자화상은 간단하게 ‘자기를 끄집어내다, 밝히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굵직한 세 명의 화가 서용선, 유근택, 최진욱의 자화상을 한데 보여주는 ‘TRAHERE-화가의 자화상’전(2018.03.02.~05.20.)이 열린 경기도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을 찾았다.
| 그림의 시작
예술가들은 자화상을 언제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까? 서양에서는 14세기 말과 15세기 전반에 걸쳐 탄생한 르네상스의 바람을 타고 ‘인간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자 척도’임을 강조하는 인간 중심적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이전 화가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보다는 의뢰받은 종교화, 역사화 등을 제작하는 장인에 가까웠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작가의 서명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화가들이 점차 서명 혹은 넓은 화면 한구석에 작게 그려 넣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나, “나 자신이 내 책의 유일한 소재입니다.”라고 밝히며 오직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아 글을 쓴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수상록(隨想錄, Essais)』, 자화상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등장 모두 르네상스의 바람을 탄 사회문화적 흐름 안에서 이루어졌고 발전했다.
신을 담았던 화폭에 화가가 자기 자신을 담기 시작한 것은 분명 커다란 혁명이었다. 화가는 스스로를 더 이상 주문 받은 그림을 제작하는 장인이 아닌 ‘창조자’의 자리에 위치시켰고, 세계를 창조하는 인간 주체로서의 그림이 시작된 것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최진욱 작가의 <그림의 시작>은 쌓아 놓은 캔버스부터 난로, 주전자, 석고상 등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작업실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가만히 그 혼돈을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 그리고 작업실 한 편에 세워둔 거울을 통해 보이는 응시자로서의 작가의 모습. 작가는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며 세상을 창조하려는 그 “처음”의 순간에 서 있는 자신을 포착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 내가 나를 바라보니
서용선 작가의 <자화상-파리>에는 작가와 거울에 비춰진 작가의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캔버스 안에서 오고가는 그 둘의 시선이 재미있다. 거울 속 작가는 거울 밖 작가를 노려보다시피 쳐다보고 있다. 거울 속 작가가 응시하고 있는 자기 자신은 한 손으로 세면대를 집고 어깨는 약간 웅크린 듯 구부정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왠지 지쳐 보인다. 거울 속 매서운 눈이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지쳐서는 안 돼, 정신 차리고 어서 너의 종착점을 향해 달려야지’ 하는 듯하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 안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기 위한
삶을 조작해 내는 행동으로 이루어지는데,
나를 그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나의 위치를 거울 속으로 끌어가려는 것이다.
끌려가지 않는 나와
끌려간 것처럼 보이는 거울 속의 내가
아크릴 물감으로 변해 천 위에 버티고 있다. - 서용선
| 절벽의 끝에서
유근택 작가는 <끝에 서 있는> 시리즈에서 어떤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을 표현했다. 짙은 무명無明 속 실상을 짚어가듯, 호분과 템페라를 이용한 두꺼운 질감과 비 오듯 세로로 연이어 그어진 선들 사이로 어렴풋하게 사람의 형상이 보인다. 우뚝 서 있는 작가의 그림자는 살금살금 낮춘 자세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이다.
항상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화가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그린다는 행위는 어쩌면
거의 유일한 현존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 유근택
|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힘
“나는 누구인가.” 수많은 사상가들, 종교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천착하고 저마다의 답을 내놓았던 이 물음은 해답보다는 물음 자체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답에는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해 나가고자 하는 노력, 그 과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화상은 어쩌면 이 질문의 예술적 표현이지 않을까. 법정 스님이 던진 유명한 화두가 떠오른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날 때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에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 법정 스님
이달의 볼 만한 전시
내가 사랑한 미술관 : 근대의 걸작展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 2018. 5. 3. ~ 10. 14.
대표적인 한국 근대미술작가들의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건축학적 역사와 함께 재조명하는 전시. 근대 한국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중식, 한국 최초의 유화가인 고희동 등의 작품으로 한국 미술 격변의 시기를 느껴보자.
DECISION FOREST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서울 | 2018. 5. 3. ~ 8. 26.
공공장소에서 관람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인터렉티브 프로젝트를 해온 멕시코 태생의 캐나다인 라파엘 로자노 헤머의 전시. 그저 바라보는 일방향적 감상을 넘어 작품에 참여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작품이 되어보는 특별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One Minute Forever : 에르빈 부름展
현대카드 스토리지, 서울 | ~ 2018. 9. 9.
에르빈 부름은 조각, 퍼포먼스, 비디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유머러스한 접근법으로 일상적 시선을 붕괴시키는 작업을 지속해온 작가이다. 선禪수행하듯 기존의 문법을 뒤엎으며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그의 작업을 만나보자.
길이 된 사람들 - 김순임展
발렌시아 갤러리, 인천 | ~ 2018. 8. 10.
김순임은 걷다 보면 발에 쉽게 차이는 돌멩이들, 먹고 버린 굴 껍질들 등 흔하고 버려지는 소재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작업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삶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부드러운 양털 덩어리를 이용해 따뜻하게 표현하여 무심코 지나쳐버린 인연의 소중함을 전하고자 한다.
마인드디자인
한국불교를 한국전통문화로 널리 알릴 수 있도록 고민하는 청년사회적기업으로, 현재 불교계 3대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서울국제불교박람회·붓다아트페스티벌을 6년째 기획·운영하고 있다. 사찰브랜딩, 전시·이벤트, 디자인·상품개발(마인드리추얼), 전통미술공예품유통플랫폼(일상여백) 등 불교문화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며 ‘전통문화 일상화’라는 소셜미션을 이뤄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