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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4.참나가 아니어서 좋은 나홍창성 교수의 마음의 이해 4 : 참나는 없지만 나는 편리상 있다 -

참마음과 마음

이번 글이 내가 불광미디어에 기고하는 <마음의 이해> 시리즈 네 번째 에세이인데, 더 늦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마음은 없다’라는 다소 드라마틱한 주장을 펴 왔는데, 이는 아무 마음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참마음’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친숙한 마음이 아니라 그런 마음의 깊고 깊은 곳에 따로 자리 잡고 있다는 어떤 근사한 본성(自性)을 가진 실체(實體)로서의 참마음이 실재(實在)하지 않는다는 말일 뿐이다. 그래서 마음이 참마음으로서 상주(常住)하지 않는다고 해서, 끊임없이 생멸하며 이어져 오는 의식의 과정으로서의 마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斷滅) 또한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마음에 대한 논의를 몇 번 더 진행한 다음에 다시 논하겠다. 

 

참나와 나

이번에는 그 대신 한국불교계 주류에서 제대로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대해 논의해 보겠다. 그런데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나를 나이게끔 하는 참된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이게 해 주는 참된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아(無我)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참마음은 없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논의의 구조가 거의 일치한다. 

 

불교의 무아론

무엇보다 먼저, 불교의 무아론은 자성(自性)을 가지고 실체로서 존재하는 참나의 존재를 부정할 뿐이지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가상(假像)의 현상적(現象的) 존재자로서의 나의 존재조차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밝혀 둔다. 한국불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참나와 그것의 유식학적(Yogacara) 변형인 참마음은 원래 인도에서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에서 가르치던 '나의 진정한 존재적 바탕'이라는 아뜨만(Atman)에 해당된다. 무아(無我)에서 ‘아(我)’가 이 아뜨만이다. 대승불교 일부에서는 이 아(我)는 진아(眞我, 아뜨만, 참나)가 아니라고 하며, 무아(無我)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나(我)가 없다는 의미이지 진아(眞我)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고 정반대로 오해하기도 한다. 석가모니께서 들으시면 무척 어리둥절해 하실 일이다.

불교의 탄생 훨씬 이전 그 옛날 인도사람들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가 보여주듯이, 스스로의 존재의 바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물었다. 이 몸이 참나일까? - 그럴 리가 없다. 몸은 그저 소화된 음식에 불과하니까. 그러면 오감(五感)을 통해 느끼는 감각이 참나일까? 감각은 그래도 정신현상에 속하니까 몸보다는 근사하지만, 언어능력과 논리적 추론 능력이 더 고차원의 정신능력이기 때문에 사고(thinking)나 사고력이 참나가 되기에는 더 좋은 후보가 되겠다. 이 <마음의 이해> 시리즈 첫째 글에서 논의했듯이, 17세기 서양의 데카르트도 여기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3,000년 전 인도인들은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에 의하면, 사고 자체가 아니라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그 근본바탕으로서의 무엇,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적 근원, 진정한 나의 주인공으로서의 절대적 주관성, 명료하게 빛나는 지혜 그 자체 - 바로 이것이 참나인 아뜨만이라는 것이었다. 주1)  아뜨만에 대한 힌두교도들의 이해는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참나와 불성에 대한 표현과 완전히 일치한다. 선문분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일 수밖에 없겠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런 '아뜨만'은 없다는 무아의 진리를 가르쳤다. 주2) 나는 7년 전 <서양철학으로 논증하는 불교의 무아론>이라는 제목의 불교철학 에세이를 『불교평론』 45호인 2010년 겨울호에 기고했다. 불교를 거의 모르는 미국인들을 상대로 진행했던 강연에 기초해 작성한 이 에세이는 불교 고유의 논증을 전혀 쓰지 않고 미국인들이 더 친숙히 여기는 서양철학의 논의들을 통해 그들에게 불교의 무아론을 가르치려 했던 시도였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2

다시 말하지만, 인도 전통에서 아뜨만(self 참나)이란 나를 나이게끔 해 주는 것, “나”라는 말이 가리키는 진정한 그것, 나의 본성 또는 자성(自性)을 말한다. 서양종교에서 말하는 영혼(self)과 다를 바가 없다. 아뜨만이나 영혼이나 모두 불변불멸(不變不滅)이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여서 연기(緣起)에 구속되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이런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분석적인 논증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 개개인(person)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몸과 네 가지의 의식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경험적으로 증명된다. 그런데,
색(色) - 몸은 불변불멸(不變不滅)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어서  연기(緣起)에 구속되며 따라서 무상(無常)하다. 그래서 아뜨만의 속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수(受) - 지각은 불변불멸(不變不滅)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어서 연기(緣起)에 구속되며 따라서 무상(無常)하다. 그래서 아뜨만의 속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상(想 생각), 행(行 의지), 식(識 의식) 모두 마찬가지로 불변불멸(不變不滅)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어서 연기(緣起)에 구속되며 따라서 무상(無常)하다. 그래서 이 가운데 아무 것도 아뜨만의 속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이외에는 우리 개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다른 요소는 없다. 
그러므로 아뜨만(참나)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철저히 경험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합리적으로 차근차근 이치를 따져가며 아뜨만의 존재 여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기만 하면 석가모니가 위와 같이 논증한 결론을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요청되는 나의 존재

그런데 불교에서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를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 일상생활에서 논리적으로 그 존재가 요구되는 개개 인격체(person)로서의 나의 존재조차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인격체(person)로서의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사회에서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통한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순신장군을 지칭하려고 할 때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그를 일단 ‘이순신’이라는 개인인격체(person)로 보지 않고 그때그때마다 “이러저러한 몸과 그러그러한 지각, 생각, 의지 그리고 의식의 집합체”라는 길고 장황하고 어색한 표현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을 지칭할 때 그래야 한다면 일이 너무도 번거로워져 결국 우리의 언어생활이 곤란하게 되어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실은 인격체뿐만 아니라 부분들로 이루어진 모든 사물도 자성(自性)이 없어서 실재(實在)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단순체(simple)를 제외한 존재하는 모든 복합체(composite) 사물들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길고 장황하고 어색한 언어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언어생활 및 사회생활이 전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주3)  이점에 대해서는 필자가 『월간불광』 2018년 6월호에 기고한 <열반은 있지만 열반하는 것은 없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사고체계 대부분을 지배하는 언어사용과 관련된 규칙을 지금과 같이 유지하는 한 개인인격체(person)로서의 나의 존재가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나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요청된다 (logically required).  

 

실용적으로 요청되는 나의 존재

한편 인격체(person)로서의 나의 지속적인 존재는 실용적으로 요구된다.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신한 내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집합체뿐이어서, 오늘밤에 잠자리에 들 이 다섯 요소의 덩어리는 내일 아침 이 자리에서 깰 다섯 요소 덩어리와 전혀 다르고 아무 상관이 없다. 따라서 피곤하고 졸린데 현재의 이 복합체와는 상관없는 다른 복합체가 내일 아침에 상쾌하고 건강하게 일어나라고 지금 굳이 이를 닦고 샤워를 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무아(無我)를 깨달아 번뇌에서 벗어나서 좋은데, 현재에 만족하면 되었지 왜 내일 아침에 일어날 다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복합체 좋으라고 지금 굳이 치실까지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이를 닦고 몸을 깨끗이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의사들이 권장하는 건강한 생활 습관과는 정반대되는 엉터리 같은 소리인데, 이런 생각은 나의 존재에 대한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다.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불교사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고뇌하지 말고 현재를 만끽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마치 깨달은 사람들이 보이는 멋진 삶의 모습인 것처럼 가르치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불교에서도 고통이 줄고 행복이 늘면 좋다는 점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적 삶은 근시안적으로 현재의 행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누적된 결과로서의 고통과 행복의 총량을 고려하며 설계해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행복의 총량이 더 많아지는 데는 상주(常住)하는 참나(self, 아뜨만)가 존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복합체로서의 인격체(person)가 존재하고, 이 인격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더라도 오늘밤 이 복합체로서의 인격체가 내일 아침에 깨어날 좀 다른 복합체로서의 인격체와 인과적(因果的)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상, 오늘밤 현재의 복합체가 이를 닦고 치실을 하며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주는 것이 내일 아침 좀 다른 복합체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일어나도록 도와주어 이 세상에 행복의 총량을 증가시켜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장기적으로 행복의 총량을 증가시켜줄 행위를 지속적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나’라고 불리는 인격체(person)가 존재하고 또 수십 년 동안 내가 동일한 인격체로서 존재한다고 가정하면서 사는 것이 여러 모로 편리하고 좋다. 사람들은 그래야 좀 더 적극적으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보험도 들며 노후생활에 대비도 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현재를 충만하게 살겠다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고뇌에 시달리는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인격체로서의 나의 가상적 존재는 실용적(實用的 pragmatically)으로도 요청된다.

 

도덕적 법률적으로 요청되는 나의 존재

인격체(person)로서의 나의 존재는 도덕적 및 법률적으로도 반드시 요청된다. 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줄리어스 시이저를 칼로 찔러 죽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복합체(브루투스)가 여러 날 동안 이 색수상행식에 일어나는 끊임없는 생멸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색수상행식의 복합체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되는 과정을 상상해 보자. 그런데 이때 전자의 색수상행식 복합체와 후자의 색수상행식 복합체가 동일한 인격체(person) 브루투스가 아니라면, 법정은 후자의 복합체로서의 브루투스를 살인죄로 처형할 근거를 잃게 된다. 후자는 전자와는 다른 존재자인데 전자가 저지른 살인죄에 대해 후자를 처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밀린다왕문경』에서 들판에 난 불의 예로 설명한 것처럼 이 두 복합체가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법정에 선 여러 날 뒤의 브루투스를 처벌할 수 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참나(self)는 없지만 색수상행식 복합체로서의 인격체(person)가 오랜 시간에 걸쳐 동일한 인격체로서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 삶 안에서의 도덕적 및 법률적 목적을 위해 효과적이다. 그래서 인격체로서의 나의 가상적 존재는 도덕적 법률적으로도 요청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불변불멸(不變不滅)의 자성(自性)을 가지고 실체(實體)로서 실재(實在)하는 영혼과 같은 참나(self, 아뜨만)는 존재하지 않지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복합체인 인격체(person)로서의 가상적 존재인 나는 수십 년 동안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실용적, 도덕적 및 법률적으로 동일한 존재자로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말하자면, 참나는 없지만 나는 편리상 있다. 나는 참나로서 상주(常住)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무(無, 斷滅)도 아니다. 나는 묘(妙)하게 있다. 

 

자아(自我, self)와 인격체(person)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에서도 자아(self)와 인격체(person)가 개념적으로 구분이 잘 안 되는 방식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내 미국학생들은 물론이고 동료 교수들도 자아와 인격체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고 그냥 둘이 같은 것으로 쉽게 생각하곤 한다. 실제로 일상 영어에서는 self와 person을 서로 바꾸어 써도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다음의 예를 제시하면 모두가 나와 동의하면서 self와 person은 구분되어야 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He has become a different person after the war. 
전쟁을 겪고 난 후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OK)

He has become a different self after the war. 
전쟁을 겪고 난 후 그는 다른 자아(참나)가 되었다. (불가능 impossible)

전쟁에서 수많은 일을 겪고 난 군인의 경우 성격, 품성, 감성 등 인격을 결정하는 많은 요소들이 변하게 되어 그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표현은 동서양 모두에서 종종 쓰인다. 이와 같이 인격(personality)은 변할 수 있고, 따라서 어떤 이가 다른 person이 되었다는 말을 쓰는데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다른 자아(self)가 되기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Self의 개념은 서양종교의 영혼(soul) 개념과 연결시켜 보면 쉽게 이해되는데, 어떤 사람도 다른 영혼을 가질 수 없듯이 어떤 이도 다른 self를 가질 수는 없다. 자아(self), 영혼(soul), 아뜨만 그리고 참나는 기본적으로 모두 같은 것이다. 

자아(self)와 인격체(person)가 엄밀하게는 구별되지만, 서양역사의 대부분 이 두 개념은 잘 구분되지 못하고 상호교환되며(interchangeably)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서양인들은 이 둘을 모두 실재(實在 real)하는 실체(實體 substance)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로 보았다. 그들은 참나로서의 자아(self)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인격체(person)라는 대상은 실체가 없이 단지 현상(phenomenon) 또는 허구(fiction)로만 존재하지만 그 개념이 실용적으로 편리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가설적으로(hypothetically)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불교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졌다. 

 

서양철학사에서 전개된 자아(self)와 인격체(person)에 대한 논의

서양철학사에서 인격체동일성(personal identity)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 왔는가를 살펴보면, 불교의 가르침이 그들의 논의보다 최소 2,300년 정도 앞서 있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는 서양철학자들이 인격체동일성의 문제를 다룰 때 서양철학사에서의 관련된 논의를 모두 끝낸 다음 마지막으로 불교의 견해를 소개하곤 하는데, 시기적으로 수천 년 앞섰는데도 이런 순서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불교의 견해가 그들의 어떤 견해보다도 앞서 있기 때문이다.  

존 로크
(John Locke, 1632 ~ 1704)

17세기 영국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인격체동일성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기억(memory)을 제시했다. 주4)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90], Bk II, ch. 27, §§ 9-19, 22-3. 이 책은 P. H. Nidditch의 것(Oxford: Clarendon, 1975)을 비롯해 여러 다른 에디션으로 출판되어 있다.

내 의식 속에 있는 기억이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근거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상식적으로 와 닿는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과거의 모든 일들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고, 따라서 나의 나에 대한 기억이 나를 나이게끔 해 주는 기준이라는 점은 설득력이 있다. 로크 스스로 예로 들고 있기도 하지만, 똑같이 생긴 왕자와 거지 각각의 정체성(identity)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이 의식 속에 가진 기억들일 뿐이다. 그래서 만약 이 두 사람이 서로의 기억을 모두 바꿔 가지게 된다면 (memory swapping) 원래 왕자는 거지가 되고 원래 거지는 왕자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격체동일성을 결정하는 것이 몸이 아니고 의식 속의 기억일 것이라는 점은 꽤 수긍이 간다. 그래서 기억을 모두 상실한 사람은 더 이상 동일한 인격체가 아니며 또 의식 없이 코마 상태에 있는 식물인간은 법적으로 인격체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죠셉 버틀러
(Joseph Butler, 1692 ~ 1752 )

그런데 영국 교회의 주교를 지낸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가 로크의 주장이 선결문제요구의 오류(the fallacy of beginning the question)를 범한다며 날카롭게 지적한다. 주5) 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Joseph Butler, The Analogy of Religion [1736], appendix 1, reproduced in J. Butler, Works, ed. W. E. Galdstone (Oxford University Press, 1896).

버틀러는 기억이란 언제나 누군가의 기억이기 때문에 6) 내가 기억하는 나에 대한 기억이란 언제나 나의 기억이어서 나의 동일성이 먼저 확보된 다음에야 기억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6)  불교는 이 점에 반대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 상세한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그래서 인격체동일성(personal identity)의 기준을 확보하려고 내 놓은 기억이란 것이 이미 인격체동일성이 확보된 다음에야 말할 수 있는 것이어서 로크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오류라는 것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버틀러의 논증은 로크의 주장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결정적이다.

그런데 다른 철학자의 주장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비판을 이겨낼 자신의 이론을 스스로 제시하기는 언제나 어렵다. 인격체동일성(personal identity)과 관련해 버틀러는 동일성 개념을 느슨한 동일성(loose identity)과 엄밀한 동일성(strict identity)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인격체동일성이 해당된다는 둘째 것이 문제다. (1) 느슨한 동일성(loose identity) - 이 세상 모든 것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무 것도 동일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냥 느슨하게 동일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집 앞에 있는 아름드리 50년 된 소나무가 50년 전 그 자리에 심어진 작은 소나무와 동일한 (identical) 소나무인가? 상식적으로 대충 말할 때는 같은 소나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크기와 생긴 모양, 색깔,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채우고 있는 물질 등이 모두 다른 둘이 정말로 동일할 수는 없다. 시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바위, 산, 집, 자동차, 동물 등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함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시간선상에 존재하는 나무, 바위, 산, 집, 자동차, 동물 등은 그냥 느슨하게만 동일할 뿐이다 (loose identity). (2) 엄밀한 동일성(strict identity) - 버틀러에 의하면, 다른 모든 존재자와는 달리 인격체(person)는 엄밀한 의미에서도 동일한 존재자로 남는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직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person’이라는 개념이 가장 원초적인(primitive) 개념이어서 어떠한 정의(定議 definition)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빨강, 차가움, 건조함 등은 가장 기본적인 원초적 개념이어서 더 이상 개념분석이 불가능하여 이것들을 말로 정의(定義)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그 개념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접하게 되며, 오직 그런 방식으로 직관적으로만 그 개념들을 배우게 된다. 즉 이것들은 말로는 설명이 안 되고 직접 경험해 봐야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버틀러에 의하면 person도 개념적으로 분석해서 정의하거나 설명할 수 없지만 person의 존재는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명백하다. 그리고 person은 시간이 경과해도 결코 변치 않기 때문에 person이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하다는 점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person이 엄밀한 의미에서도 언제나 동일하다는 버틀러의 주장은 내게는 직관적으로 하나도 명백하지 않다. 왜냐하면,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이 다른 person이 되어 있기도 하니까. 그런데 영국 교회의 주교를 지내며 영원불변불멸의 영혼을 매일같이 가르쳤을 버틀러에게는 그것이 분명했던 모양이다. 좀 냉소적으로 비판해 보자면, 그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명백한 직관’으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person의 동일성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그의 직장인 교회의 영혼 불변불멸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self(soul)와 person을 구별도 하지 않고 있다. 로크의 철학을 비판할 때는 그토록 날카롭게 논리를 전개하더니, 자신의 주장은 스스로의 직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밀고 나가며 ‘직관적으로 명백’하다고만 하고 있다.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 ~ 1776)

어떤 목사 집에서 저녁 식사 자리에 놓인 성경을 치우지 않으면 저녁을 같이 하지 않겠다고 고집해서 그 목사가 결국 성경을 치웠다는 일화까지 있는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영국교회의 주교였던 버틀러와는 정반대되는 주장을 내놓았다. 주7) 흄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면 된다: David 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40], Bk I, part iv, section 6. 이 책은 현재 여러 다른 에디션이 나와 있다.

철두철미한 경험론의 입장에서 삶과 세계를 보았던 그는 자아(self, soul)의 존재를 믿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거의 퉁명스러울 정도로 단순한 질문을 한다. 우리에게 self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육체의 일부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의사와 과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우리 몸속에서 self를 발견했을 테니까. 그래서 self가 존재한다면 몸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눈을 감고 스스로의 마음속을 구석구석 남김없이 철저히 내성(內省 introspection)하며 self를 찾아보라. 과연 우리는 self와 마주칠 수 있을까? - 그럴 수는 없다. 우리가 내성하며 마주치는 것들은 언제나 과거의 특정한 경험에 대한 기억이나 상념들일 뿐이지, ‘진정한 나’라는 self는 결코 마주칠 수 없다. 그래서 self는 우리 몸속에도 마음속에도 없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서양철학개론 시간에 이런 논의를 진행할 때마다 미국학생들은 거의 언제나 그런 내성을 수행하는 것, 그런 상념들과 맞부딪치는 것 자체가 바로 self(영혼, 참나)가 아니냐고 질문한다. 실은 이것이 self(아뜨만)의 실재(實在)를 보이려는 힌두교도들이 즐겨 쓰는 논지다. 혜민스님도 이렇게 힌두교도들이 참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고는 내성(內省)하는 바로 그놈이 참나라고 가르치고 다닌다. 그런데 똑똑한 학생 몇몇은 꼭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요즈음은 컴퓨터도 모두 자기 모니터링 (self-monitoring)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가 self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우리에게도 내성의 기능이 있다고 해서 self나 참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똑똑한 학생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경험적으로 self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다. 

데이비드 흄은 우리에게 비록 self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가진 여러 경험과 상념 등이 놀라운 속도로 (찰나마다!) 교체되면서 마치 어떤 동일한 self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이 착각하게 되어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환상 또는 허구를 만들게 된다고 한다. 흄의 주장을 내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 보자면, 우리에게 self는 없지만 우리는 허구로서의 person의 존재를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흄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이러한 person의 존재를 당연시하면서 사는 것이 편리하고 또 유리하다고 추천하기도 한다. 위에서 살펴 본 불교의 가르침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철학적 통찰이다.

데렉 파핏
(Derek Antony Parfit, 1942~ 2017)

20세기 후반 영국 철학자 데렉 파핏(Derek Parfit)도 인격체(person)의 존재란 단지 몸과 의식의 (인과적) 연속성 이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없다고 논하며 서구 전통에서 믿어 온 self의 존재를 부정한다. 주8) Derek Parfit, Reasons and Persons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pp. 279-87.

그러면서 그는 인간은 self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는 살 수 없다고 주장한 성 오커스틴(Saint Augustine)은 틀렸고, 비록 어렵기는 해도 self의 존재를 부정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한 석가모니 부처가 옳았다고 본다는 점을 그의 저술에서 분명히 한다. 20세기 후반 자아(self)와 인격체동일성(personal identity) 연구 분야 서구 최고 권위자였던 파핏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서에서 무아(無我)를 가르친 석가모니가 옳았다는 결론으로 그의 논의를 마무리하고 있다.

칸트가 ‘예리한 철학자’라고 여러 차례 칭송한 데이비드 흄이 18세기에, 그리고 데렉 파핏이 20세기에 겨우 도달한 무아(無我)의 결론을 석가모니는 2,500년 전에 이미 훨씬 더 섬세하고 세련된 논증으로 설파했다. 이것이 내가 불교를 최첨단철학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참나가 아니어서 좋은 나

위에서 간단히 살펴본 서양철학사에서의 논의만 보아도 과거로부터 현대로 다가올수록 자아(self)나 변치 않는 인격체(person)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점점 더 많아져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철학자들뿐 아니라 최근의 신경과학자들(neuroscientists)이나 실험심리학자들 가운데 많은 연구자들이 서구 전통의 자아나 인격체 동일성의 관점에서 벗어나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서구 학계에는 이미 상식이 되었다. 그들이 뇌신경체계를 아무리 깊이 들여다보고 연구해 보아도 self나 아뜨만이 들어앉을 자리가 없다고 판단해서 그렇다. 그래서 불교의 무아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과학자들의 지지마저 받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서양종교의 영혼관과 불교의 무아론이 형이상학적으로는 정반대의 이론이지만 우리 삶을 잘 살아가는 지혜와 좋은 가르침을 주는데 있어서 서로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예를 들어, 서양종교에서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은 스스로의 영혼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들 하는데, 불교에서는 무아(無我)의 입장에서 “나”라고 불리는 오온(五蘊) 집합체가 가난하든지 아니면 다른 오온 집합체가 가난하든지 아무 차별 없이 그 가난을 동등하게 구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된다. 내 몸에 난 상처나 다른 사람 몸에 난 상처 모두 같이 치료해 주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도 두 종교관으로부터 똑같이 나올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이타적(利他的)인 행위 실현과 정의(正義)의 구현에 대해 영혼론과 무아론은 서로 별 차이 없이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자아(self)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되새기다 보니, 스스로의 영혼을 돌보아야 한다는 서구종교의 가르침이 오히려 영혼에 대한 무한한 집착을 야기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물음이 떠오르게 되었다. 영혼에 대한 집착도 집착이니까 문제가 될까, 아니면 그것은 말로만 집착이지 집착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집착일까? 영혼을 이롭게 하고 구제하여 천국으로 이끄는 행위는 모두 좋고, 영혼 구제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구제와는 반대방향으로 가게 하는 행위는 모두 멀리해야만 할까? 서양종교의 역사에서 신(神)의 뜻을 따름으로써 영혼을 천국으로 이끈다는 미명(美名) 아래 저질러진 수많은 참혹한 전쟁과 살육 행위들을 상기해 보면, 영혼에의 집착도 분명 집착일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영혼에 대한 너무도 강렬하고 무한한 집착이 없고서야 어떻게 그토록 참혹한 짓을 수천 년 동안이나 지속할 수 있었겠는가?

서구종교들과는 달리 스스로의 영혼의 존재마저 부정하며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깨달을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 아래서는 불법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전쟁과 살육 행위들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또 역사상 그런 적도 거의 없었다는 점이 반갑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한국불교계에서는 힌두교의 아뜨만 또는 서양종교의 영혼과 똑같은 참나를 줄기차게도 가르쳐 왔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현 조계종 종정인 진제스님과 간화선을 가르치는 여러 스님들, 그리고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혜민스님 모두 철두철미 참나주의자들이다. 이분들은 수많은 한국의 불자들에게 참나에 대한 무한한 집착을 심어주어 왔다. 연기(緣起)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다른 이에게 전해 주어 오백생 동안 여우 몸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분들에게는 과연 어떤 과보가 따를지 모르겠다. 영혼이나 참나에 대한 집착은 최악의 집착일 수 있고 그것은 또 최악의 이기주의(利己主義)로 발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불교계 논객들이 설파하고 있듯이, 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자들은 최악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또 최악의 이기주의로 빠지지 말아야 한다. 

무아(無我)라고 해서 즉 참나가 없다고 해서 불자들이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모여 있는 오온(五蘊)의 집합체로서 잠시 (수십 년 동안) 가상(假想)의 현상(現象)으로 존재하는 인격체(person)로서의 ‘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편리상 인정한다. 그래서 좋다. 그리고 내게는 참나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홍창성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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