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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코쿠 영장의 남겨진 모습들누가 어디에 어떤 영장들을 조성했나?

앞서 목포 유달산에 시코쿠(四國) 영장이 조성된 시기와 그 연유를 소개했다. 이번에는 영장의 구체적 흔적들과 목포 유달산 이외에 남아 있는 영장의 흔적들에 대해 소개하겠다. 유달산 전체가 영장화되었지만, 많은 이들은 ‘유달산’하면 홍법 대사와 부동명왕만을 상징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유달산에 시코쿠 영장이 조성되었을 때에는 조그마한 석불들이 산 전체를 뒤덮었겠지만, 구체적으로 몇 기가 제작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몇 기가 온전히 남아있는지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시코쿠 영장은 일반적으로 88불이 조성되지만, 근세 이후 확장된 형태로 100기가 넘는 불상들이 제작되기도 한다. 또 당시의 자료를 찾기가 어렵고, 전쟁과 일제의 잔존을 버리고 우리 문화를 찾는다는 지난 시절의 흐름에 의해, 파손하거나 방치해 이들 석불의 이동형태를 알기 어렵다. 여기서 소개하는 유달산 영장 역시 훼손된 모습인 경우가 많으나, 가능한 상태가 양호한 것 위주로 설명하겠다.     

 

|    유달산 영장의 흔적들

영장의 모습은 보통 높이 65~80센티, 폭 35~40센티 크기의 소형석불이다. 신체와 광배가 붙은 일체형으로 광배 안쪽에는 각 석불의 번호와 불상 이름이, 좌대에는 시주자의 이름을 새긴다. 사이고쿠(西國) 영장의 경우, 석불들은 화현한 관음보살의 여러 모습들이 제작되지만 시코쿠는 홍법 대사, 대일여래, 부동명왕 등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이 제작된다. 목포문화원 소장 여래상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좌대에 22번이라는 번호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불상의 수인과 구체적 내용을 새겼을 것으로 보이는 광배 오른쪽을 훼손시켜 그 이상의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일본 시코쿠 영장의 22번 절과 목포 유달산 22번의 불상은 일치할까. 시코쿠의 22번 절은 하쿠스이잔 뵤도지(白水山 平等寺)로 본존은 약사여래상이다. 홍법 대사가 뵤도지에서 수행할 때 오색구름이 일어났고 구름 속에서 황금의 범자梵字가 나타났다고 한다. 또 약사여래가 나타나 사방을 환히 비추었고, 대사는 우물을 파서 얻은 신령한 물로 몸을 씻고 100일을 수행한 후에 약사여래를 조각하여 뵤도지에 안치했다고 전하고 있다. 목포문화원 22번 불상이 약사여래인지에 대해서는 손이 파손돼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대부분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목포문화원을 나와 구동본원사 목포별원에서 옛 일본인들 거주 지역으로 이어지는 거리가 있다. 이 구거리의 조그만 골목 끝에 약사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암자에는 홍법 대사상 1기와 당시에 제작된 지물과 대좌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이 약사사로 오게 된 연유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지만, 해방 이후 유달산 영장이 훼손되고 옮겨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안착된 것으로 보인다. 좌대 위에는 지장보살을 안치시켰는데 서로 짝이 다른 임의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좌대와 지물에는 시주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달성동에 위치한 유달포교원에도 10번, 14번, 19번, 38번, 54번 총 5구의 석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석불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나 시주자명은 확인하기 어렵다. 유달산의 석불들은 개인소장뿐 아니라 목포와 그 주변 지역 암자들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나아가 최근에는 유사한 형태로 제작한 불상들이 혼재되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이외에도 유달산 초입에 위치한 정광 정혜원에서도 일제강점기 시기에 제작된 석불들이 확인된다. 정혜원은 1917년 일본승려 도현 화상이 흥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로 해방 후 만암 큰스님이 정광 정혜원으로 사찰명을 바꿨다. 이곳은 만암 큰스님과 서옹 큰스님이 주석한 곳으로 현재는 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로 등록되어 있다. 정혜원 마당 한쪽에 1931년 이즈미 기헤이(泉喜平)의 시주로 조성된 일본풍 보현보살상과 5층 석탑이 놓여 있다. 유달산 영장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지만, 유달산 석불들과는 그 성격이 달라 시코쿠 영장으로 보기 어렵다.

유달산 시코쿠 영장에는 석불들만 조성된 것이 아니다. 신의 영역이 존재한다. 일등바위 부근에 ‘산왕대성전’터가 남아 있다. 암벽에는 ‘이곳에 항상 머물러 계시는 산왕 대성인’이라는 글귀와 함께 동물의 머리에 사람 형상을 한 의문의 인물이 암각되어 있다. 바위 곳곳에 의문의 암각화들이 새겨졌고, 산왕대성전 아래에는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향천정이라는 샘터가 있다. 모두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신을 모셨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 일등바위에서 이등바위로 향하다 보면 같은 시기에 조성한 신사가 나뭇잎들 사이로 가려져 있다. 비문에 ‘○○대명신大明神’이 새겨져 있고 비문 양옆으로 두 마리의 여우가 지키고 있다. 이 신사를 여우와 관련 있는 이나리 신사로 보는 이들도 있는데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    영장을 조성한 이들

목포문화원 소장 석불과 달리 유달산 안에서 확인되는 석불들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유달산 일등봉부터 이등봉까지 불상들이 안치되었던 흔적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순례 루트는 유달산의 88개 불상을 순례하고, 맨 마지막에 일등봉 바위 면에 새겨진 홍법 대사상 앞에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제작방법은 유달산 바위에서 바로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만든 후 완성품을 바위 위에 고정시켜서 세우는 방법으로 조성되었다. 주로 바위를 깎아 불감을 만들고 그 안에 석불을 안치되었거나 바위 위에 불상을 놓는 형태였지만, 현재는 좌대만 남아있거나 정보를 알 수 있는 앞면은 의도적으로 전부 깎아 뭉개진 형태로 남아 있다. 그 중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들을 몇 개 살펴보자면, 좌대에 새겨진 인물정보다. 

일례로 산속에서 발견된 좌대에는, 시주자가 스즈키 토요타로(鈴木豊太郎)라는 인물은 시코쿠의 에히메현(愛媛県) 출신으로 목포역 앞에서 시코쿠 여관을 경영한다고 새겨져 있다. 당시 목포의 숙박업은 일등여관과 이등여관으로 나뉘었으며, 시코쿠 여관은 이등여관으로 분류되었다. 또 시코쿠 여관이 무안동에 위치하고 전화번호가 335번이라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시고쿠 여관의 주인인 스즈키 토요타로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서 근무한 육군 대위 스즈키 토요타로와 동일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 이외에도 약사사의 대좌에는 1930년 4월 마츠다 무사카(松田六平) 외 3인의 시주자가 조성했다는 기록 등 시주자명이 들어간 좌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달산의 좌대들은 공통적으로 시주자인 일본인의 이름과 현재 거주지, 일본 내 출신지가 표기되어 있다. 시주자들은 목포뿐 아니라 인근 지역인 강진, 영암, 해남을 비롯해 제주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이름까지도 등장한다. 아쉬운 점은 시코쿠 여관업을 하는 스즈키 토요타로 이외에는 직업명이 기록된 좌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    다른 지역의 영장들

축소된 미니 영장들은 목포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가장 상태가 양호한 영장은 아마도 군산 동국사의 사이고쿠 미니영장일 것이다. 동국사에는 33기의 관음불과 7기의 수본존불守本尊佛 총 40여 기의 석불군이 안치되어 있다. 발원자는 동국사 2대 주지인 나가오 켄겐으로 1922년, 대웅전 뒤쪽 야산에 조성했다. 동국사의 관음영장은 당시 유행한 자안관음子安觀音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자안관음은 임신한 여성들이 무사히 아이의 출산을 기원하는 신앙이다. 당시 군산은 1910년 이후 일본인의 수가 갑작스럽게 증가했다. 일본인의 증가는 외부에서 유입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출생 때문에 일본인 수가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자안관음의 광배 뒷면과 기단에는 사이고쿠관음영장 33번째 순례지 타니구미산(谷汲山) 케곤지(華嚴寺)의 나무자안관세음을 조성했고, 조성자는 동국사의 대표 단가인 미야자키 가타로, 오자와 토지로, 시모다 기치타로라고 새겨져 있다. 7기의 수본존불은 수본존 신앙과 연결된 일종의 오마모리お守り로 볼 수 있다. 태어난 해의 12간지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수호신앙으로 원래 13불佛신앙과도 관련이 있다. 전쟁이 심해지면서 1935년 이후 무사귀환을 바라며 조성되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소재의 화계사에도 영장이 남아 있다. 화계사 영장도 사이고쿠 관음영장의 축소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화계사의 관음영장은 지금까지 발견된 관음영장 석불들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지역의 석불들에게서 소박한 고졸미가 보인다면, 화계사의 석불들은 숙련된 석공이 조각한 듯 입체감과 균형이 잘 잡혀있다. 석불들은 대웅전 옆 삼성각 뒤쪽으로 이어지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대방의 앞뜰(현 대적광전)에 있다가 현재의 삼성각 뒤쪽 언덕으로 옮겼다. 

중심에는 관음보살좌상을 두고, 그 좌우로 각각 12좌씩, 총 25좌의 관음보살상(입상11좌, 좌상14좌)을 배치했다. 광배에는 각각의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으나 규칙적이지 않다. 현재 마지막 연번이 32번으로 사이고쿠 33관음영장에 비추어 본다면, 11기가 누락되었다. 중앙의 보살상 좌대뒷면에 “13년 9월 조성했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다른 지역의 관음영장 조성과 비슷한 시기인 대정 13년(1924년) 조성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3번째 불상의 광배에도 ‘자안관음’이란 명문을 찾을 수 있는데 화계사의 관음영장 역시 당시 유행한 자안관음 신앙이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석불의 광배 뒷면 하단에는 훼손의 흔적이 남아있다. 화계사 관음영장의 발원자명이나 관련 기록이 명기되었으나, 해방 이후 인위적 훼손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도 신시코쿠新四国 영장이 설치되었다.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과 남구 도화동에 걸쳐 있는 동산을 중심으로 시고쿠영장이 형성되었다. 인천 역시 산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하는 전형적인 근대 영장의 모습을 보인다. 당시에는 이곳을 88개소, 부처산 또는 부채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1923년 봄 미스이 히사요시增井久吉, 기무라 덴자부로木村傳三郞, 리키다케 카지로力武嘉次郞 3인이 홍법 대사 신앙을 알리기 위해 2만 천여 평의 산 전체에 영장을 세웠다. 인천 시코쿠영장 역시 인천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기부금에 의해 조성되었고, 석불은 일본 시코쿠 지방에 위치한 도쿠시마현德島縣에서 직접 제작해 가져왔다. 이후 미니 사이고쿠 관음영장 역시 함께 조성해 산 전체에 210여 기에 달하는 석불들이 안치되었다. 석불의 크기는 다른 지역의 석불이 1미터가 채 안 되는 것에 비해, 좌대석을 포함해 1.5미터 정도의 석불이 가장 많고, 3미터에 달하는 것들도 있다. 

1940년 가을 미스이 히사요시는 총독에게 요청해 ‘신시코쿠 88개소’라는 휘호를 하사받았고, 미스이는 이를 기념해 일본 개국 기원 2,600년 기념비를 세웠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지역과 달리 인천은 영장을 보다 안정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 1942년 8월, 재단법인을 설립해 체계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때 설립된 법인은 해방 후에도 청산되지 않고 한동안 유지되었다. 인천 신시코쿠 영장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철거되었지만 법인은 1974년에 생산된 청산종결, 종결법인 등의 서류에도 나와 있는 만큼 1970년대까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마산의 시코쿠 영장은 마산시 완월동을 중심으로 1936년에 조성되었다. 현재 마산 제일여고가 들어선 곳이 마산신사가 있던 자리로 제일여고 교정 안에는 석불들이 현재도 전하고 있다. 마산 시코쿠 영장 역시 시주자가 마산지역의 일본인들로 다른 지역의 영장조성 방법과 철거방법이 유사하다. 석불들은 현재 마산 성덕암, 해은사 등의 주변 지역 암자들에서 몇 구씩 발견되고 있다. 

이외에도 북한의 주을온천과 청진 쌍연산에도 시코쿠 영장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부산에도 금강사 뒷산에는 시코쿠 영장이 조성되어 매년 3월 홍법 대사 법요식이 열렸다. 부산의 경우, 법요식 때 진언종 신자가 있는 시내 요정에서는 영장 참배객들에게 다과를 제공했다고 한다. 또 부산 금정산 금강공원 일대에도 시코쿠 영장이 세워졌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에 조성된 사이고쿠 관음영장은 1920년대에 비교적 소규모로, 시코쿠 영장은 1930~40년대 산 전체에 영장을 조성하는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스즈키 토요타로 기단
화계사 관음석불

 

|    흩어진 석불들

시코쿠 영장이든, 사이고쿠 관음영장이든 이들 영장을 복원하려는 지역 지자체의 가장 큰 어려움은 필수 구성요소인 석불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석불들이 흩어지고 섞이는 과정에서 유사복제품들이 제조되기도 하고, 번호가 매겨져 있지만 공통된 번호들이기 때문에 소유권 주장이 어렵다. 불상인 만큼, 불상의 양식에 따라 구별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숙련되고 유명한 이들이 제조하는 것이 아닌 무명의 석공들이 마치 모형 틀이 있는 것처럼 찍어내기 때문에 지역별 구별에 어려움이 있다. 

현재 약 50여 곳에서 소수의 석불들이 발견되고 있다. 각 곳마다 적게는 2-3기, 많게는 수십 기의 석불을 소유하고 있으며, 개인소장자를 포함한다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지역적으로는 부산을 비롯해 경상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고, 해인사 성보박물관에도 진주 두반사에서 가져온 석불이 진열되고 있다.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곳으로는 서울 인사동 목인박물관의 석불들이다. 총 아홉여 기의 석불들이 있는데 몇 개 지역 영장들이 섞여 있다. (끝)        

               
                                                                                                                                    
지미령
일본 교토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문화 및 미술사로 박사학위 취득(2010), 한국예술종합대학, 인천대학교에 출강하고 있고, 현재 불광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 「군산 지역 西國33所觀音靈場성립에 관한 일고찰」, 「<참예만다라(參詣曼茶羅)>에 나타난 인물군상 연구」 등 아시아의 영장순례와 신앙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지미령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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