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두가 기독교인인 내 미국 학생들은 참나 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을 이치를 따져가며 살펴본 후 결국 어쩔 수 없이 수긍한다. 그러나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는 없다는 듯이 거의 언제나 다음의 질문으로 도전한다.
“불교는 윤회(輪廻, sam.sa-ra)를 가르친다고 들었습니다. 윤회를 주제로 한 영화도 몇 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합니까? 영혼 대신 윤회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실은 미국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네팔 출신 불교도 학생들로부터도 같은 질문을 받곤 한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교에 내재해 있는 것 같다. 이런 진지한 질문에 대해서 나는 직접 대답하기보다는 학생들에게 먼저 스스로 답을 찾아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곧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답변들이 튀어 나온다.
(1)“영원불변 불멸하는 영혼은 없더라도 어떤 혼령 또는 혼백(spirit)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이 윤회하는 것은 아닐까요? 디즈니 만화 영화 뮬란(Mulan, 木蘭)에 보니까 아시아에서는 조상의 혼백이 살아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2)“불교에서는 업(業, karma)을 말하지 않습니까. 영혼은 없다고 해도 업이 뭉친 덩어리 같은 것이 윤회하는 것이 아닐까요.”
(3)“어떤 책에서 보니까 윤회란 죽음이라는 사건에 의해 다른 생명체가 의식을 가지고 탄생하게 되는 인과因果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윤회하는 주체는 없어도 이렇게 ‘죽음–탄생–죽음–탄생’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의 연결된 고리들이 윤회가 아닐까요.”
토론 위주로 가르치다보면 학생들은 열심히 생각한 끝에 마침내 역사상 존재했던 그럴듯한 이론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거의 모두 재현해 내곤 한다. 참 기특하다.
“윤회하는 것 없이 윤회가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에 답하기 전에 나는 먼저 윤회의 개념을 선명히 이해해 보자고 제안한다, 윤회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도 알 수 있으니까.
윤회란 어떤 의식을 가진 것이 살다가 죽었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가 계속 나고 죽고 또 나고 죽는 과정이 (깨달아서 해탈하지 않는 한) 무한히 지속되는 현상이다.
서구에서도 윤회를 주제로 한 영화나 소설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지금은 서구학생들도 윤회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는 가지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윤회가 통상 ‘reincarnation’이나 ‘transmigration’으로 번역되어 왔다. 그런데 비슷하지만 다른 것 같은 이 두 번역어 때문에 학생들은 또 질문한다.
“‘reincarnation’과 ‘transmigration’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도 다른 학생들에게 답할 기회를 먼저 주지만, 지난 수년 동안 제대로 답한 학생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 학생들이 한국어가 모국어인 나로부터 영어 어원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이해하게 된다.
‘reincarnation’은 원래 기독교의 개념인 ‘incarnation(肉化?)’에다가 반복을 의미하는 접두사 ‘re’를 붙여서 만든 단어다. ‘incarnation’이란 성령(holy spirit)이 몸 또는 육신(-carn-) 안으로(in, into, intro) 들어가 예수님이 탄생했다고 보는 기독교가 만들어 낸 개념이다. 그런데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엄밀히 생각해 보면 ‘reincarnation(再肉化)’은 ‘윤회’에 대한 번역어로는 옳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물어본다.
“자네들 그 이유를 알겠는가?”
이번에도 학생들은 답을 못한다.
동양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오랫동안 이 세상에는 육신을 가지지 않은 순수한 정신적(psychological) 또는 영적(spiritual)인 존재자들이 있다고 믿어 왔다. 동서양의 신화에는 이런 신 또는 천사 같은 존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 불교는 이들도 깨달아서 해탈하지 않는 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승에서 좋은 업을 많이 닦아 다음 생과 그다음 생 등에 이렇게 육신을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영적인 존재자들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것은 reincarnation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육신(-carn-) 없이 비물질적으로만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회는 ‘transmigration’으로 번역해야 한다. ‘transmigration’은 단지 여러 생生에 걸쳐(trans-) 옮겨가면서(migrate) 생사生死를 반복한다는 점만 의미하기 때문에 꼭 육신을 빌어야 하는 ‘reincarnation’이 가진 엉뚱한 문제를 피해갈 수 있다.
내가 여기까지 설명하며 영어 실력(?)을 한번 과시하면, 그다음부터는 어는 학생도 원어민이 아닌 나의 어쩔 수 없는 발음이나 억양 등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못하게 된다. 그래도 지금까지 오면서 영어 때문에 고생 많았다, 휴~.
|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
윤회의 개념을 설명한 다음에는 서구불교에서 표준적으로 사용하는 나가세나 존자의 ‘촛불 이어 켜기’의 비유를 통해 “윤회하는 것은 없지만 윤회는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 준다. 위에서 든 (3)의 견해가 이에 해당된다. 먼저 어두운 방에 여러 다른 물질로 만들어져 있고 모양이나 크기 또 색깔이 모두 다른 여러 개의 초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 불을 붙여 본다. 이 촛불은 여러 시간을 타다가 꺼져갈 것이다. 이것이 꺼지기 직전에 그 촛불로 다른 초 하나를 켜고 원래의 촛불은 자연스레 꺼지게 내버려 둔다. 이 두 번째 촛불도 여러 시간 후 꺼져갈 무렵 셋째 촛불을 켜게 하고 꺼지게 둔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여기서 여러 다른 촛불은 여러 다른 생에 대한 비유이다. 그런데 여기서 각양각색으로 다른 여러 (고뇌로) 타오르는 촛불(삶)들 사이를 관통하는 어떤 불변하는 주체가 있을까? 어떤 실체(實體, substance)가 존재하고 그것이 이 모든 다른 촛불들에 옮겨 다니면서 없어지지 않고 변치도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할까? 아니, 그런 것은 없다. 각각의 촛불은 모두 다른 초들이 타면서 생긴 다른 촛불들이고, 촛불이 번뇌의 비유라면 그 번뇌도 다른 삶들이 가진 다른 번뇌들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대로 여러 촛불들 사이를 옮겨가며 이동하는 어떤 한 주체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라는 현상은 의심의 여지 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러 다른 촛불들이 인과의 과정에 의해 여러 다른 초들로 옮겨가면서 새 촛불로 타고 꺼지고 타고 꺼지고 또 계속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혜에 넘치는 비유를 이용한 설명은 2,200여 년 전 불교 승려인 나가세나 존자가 밀린다왕(이 왕의 그리스 이름은 메난드로스)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한 내용이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도 윤회가 가능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내 미국학생들은 나가세나의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라며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밀린다왕은 알렉산더대왕 휘하 장군의 후예로서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 일부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철학으로 교육받고 사고력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날카로운 논리적 질문은 오늘날도 내 불교철학강의 시간에 같은 종류의 논리적 훈련을 받은 미국학생들에 의해 계속 물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가세나 존자의 지혜로운 답변은 나 같은 교수들에 의해 다시금 주어지고 있다. 수천 년, 수만 리 시공의 간격을 뛰어넘으며 진행되고 있는 이런 진리 탐구 과정이 철학 선생으로서의 한 생을 한껏 신명나게 만든다.
| 업은 언어적 도구
한편 위의 (1)에서 조상의 숨결 같은 혼백(spirit)이 윤회의 주체일 것이라는 생각은 자이나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jiva(‘jiv’는 원래 ‘숨쉬다’라는 뜻)가 윤회한다는 견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 jiva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보통 개인의 영혼을 지칭한다고 여겨지는데, 이런 영혼의 존재는 지난 호에서 논의한 불교의 무아론에 의해 쉽게 반박된다는 점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더 논의하지 않겠다. 위의 (2)에서 쌓인 업業의 덩어리 같은 것이 윤회의 주체라는 생각은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이것은 나가세나 존자의 설득력 있는 비유를 받아들이면서 이론적으로 조심스럽게 배제해 나가야 할 견해다.
나는 세 번째 수업부터는 좀 더 깊이 있는 철학적 논의를 하기도 하는데, 이 에세이에서도 한번 그렇게 해 볼까 한다. 나는 ‘업業’이란 말을 단지 의식을 가진 생명체들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편리한 언어적 도구에 불과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철수가 부정행위로 시험을 통과하여 교수에게 학점을 잘 받아 졸업한 후 직장을 얻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몇 년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교수가 그 과목 학점을 F로 처리하게 되어 철수는 졸업이 취소됨과 동시에 그 직장도 잃게 된다고 해 보자. 이에 대해 인과응보라는 표현이 딱 옳지만 우리는 철수가 지은 악업惡業 때문에 그 과보를 받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그런 업業이라는 형이상학적 대상(entity)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아무리 마음의 눈으로 내성(內省, introspection)해 보아도 그런 것은 없다. 말하자면 물리세계와 의식세계 그 어디에도 존재론적 대상으로서의 업業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라면 단지 철수의 부정행위가 나중에 교수에게 발각되는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조건들이 모여 철수의 졸업자격과 직업을 유지하고 있던 조건들이 이러저러하게 흩어지게 된 것일 뿐이다. 이렇게 조건이 모이고 흩어지는 연기緣起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업業이라는 미심쩍은 형이상학적 대상을 도입할 존재론적 이유가 없다.
좀 드라마틱하게 말해 보자면, 업業이라는 대상과 개념을 이 세상에서 모두 없애도 이 세상에는 아무 변화가 없을 것이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털끝만큼의 변화도 없을 것이다. 조건들은 여전히 그러그러하게 모이고 흩어질 것이고, 인과응보를 비롯한 모든 연기(緣起)하는 것들은 모두 계속 그러그러하게 연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업業이 실제로 이 세상에 따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라고 볼 이유가 없다. 나의 이 논지는 인도에서는 ‘가벼움의 원리(the principle of lightness)’라고 불렸고 서양에서는 ‘오컴의 면도칼(Occam’s Razor)’이라고 불렸던 존재(와 사유)의 경제성의 원리를 따르자는 것이다.
Entities should not be multiplied without necessity.
(존재론에서) 존재하는 대상의 수數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으면 증가되어서는 안 된다.
업業에 대한 견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업業을 언급하는 (2)의 견해는 인과(와 연기)만을 이야기하는 나가세나 존자의 지혜로운 설명과는 비교할 정도가 못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가세나 존자의 비유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내 학부 불교철학강의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에 일부러 논의하지 않는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