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목포 유달산에 일본의 관음영장이 조성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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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목포 유달산에 일본의 관음영장이 조성된 까닭
  • 지미령
  • 승인 2018.04.0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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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는 일본 진언종이 주도, 실제로는 초종파적 지원아래 조성

2년 전 벚꽃이 흩날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조성한 사이고쿠(西國) 관음영장을 조사하기 위해 군산 동국사에 있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군산 동국사는 서울 화계사에 이어 두 번째 조사지로, 이후 경상도 지역의 사이고쿠 관음영장을 조사할 예정이었다. 동국사 주지스님께서 목포 유달산에도 사이고쿠 관음영장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설마’하면서 바로 목포로 내려갔다. 이틀에 걸쳐 유달산을 등반하고 유달산 주변 조사를 하면서 나는 크게 놀랐다. 첫째는 일제강점기 때 사이고쿠 관음영장뿐 아니라 시고쿠(四國) 영장까지 조성되었다는 사실과, 둘째는 ‘이렇게 큰 영장이 아직까지 한국에 남아 있구나. 마치 일본의 고야산高野山 같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때까지 조사했던 영장들은 작은 불상들을 모아놓은 소규모 형태로 대부분 훼손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이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파악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그런데 목포 유달산 영장은, 물론 많이 훼손됐다고는 하지만, 영장의 원형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조성된 영장들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구자로서 설레었다. 이후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월간 「불광」과 인연이 생겨 ‘일제강점기 때의 순례와 신앙’이라는 주제로 목포 유달산의 일본불교 신앙을 2회에 걸쳐 살펴볼 수 있었다.  

|    유달산에 일본스님이!

한 시간가량 유달산을 올라가다 보면 눈앞 암벽 위에 칠을 한, 반 부조 형태의 조각상이 보인다. 부처님상인가 하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웬 스님이 손에는 염주와 금강저를 쥐고 곡록(曲彔, 스님이 앉는 의자)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상 옆에는 홍법弘法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스님 옆쪽 암벽에는 반 부조의 부동명왕이 목포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이 스님은 바로 일본 진언종 창시자 홍법 대사이다. 왜 일본 스님이 여기에 계시는가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이 스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소개할까 한다. 홍법 대사는 774년 시코쿠의 젠츠지(善通寺)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홍법 대사라는 이름은 다이고 천황에게 시호를 받은 후 사용한 이름이며, 그 이전까지는 구카이(空海)라는 법명을 사용했다. 구카이는 15세 때 고향을 떠나 수행하던 중 31세가 되던 해에 나라 도다이지(東大寺) 계단원에서 수계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804년 4월, 풍운의 꿈을 안고 일본 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쵸(最澄)와 함께 법을 구하기 위해 중국행(견당사) 배에 올라탔다. 8개월 후, 구카이는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도착해 청룡사靑龍寺의 혜과恵果 화상으로부터 진언밀교를 전수받았다. 2년 후인 806년 가을에 귀국했으나 갈 곳이 없어 자신보다 먼저 귀국한 사이쵸가 있는 천태종 엔랴쿠지(延暦寺)에 몸을 의탁했다. 중국에서 8개월 정도 수학하고 돌아온 사이쵸는 자신의 학문이 구카이보다 깊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보다 어린 구카이에게 수계를 받고 경전을 빌려 읽는 등 두 스님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설을 들고 있다. 첫째는 구카이가 사이쵸에게 더 이상 경전을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사이쵸가 가장 아끼는 제자 다이한(泰範)을 시켜 구카이에게 가서 경전을 빌려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다이한이 구카이의 설법에 빠져 구카이의 제자가 된 점을 일반적으로 들고 있다.

실제 사이쵸는 돌아오지 않는 제자를 향해 “다이한아, 돌아오너라. 네가 없으니 내 마음이 불안하다”라는 간절한 편지를 보냈지만, 돌아온 답변은 “아직 육근(六根)이 깨끗지 못해 밖에 나가 누군가를 구제할 수 없습니다”라는 절연장이었다. 그런데 이 절연장은 다이한이 아닌 구카이가 대신 써준 것이었다. 나아가 절연장의 내용은 사이쵸가 20세 때 기존의 나라(奈良) 불교를 버리고 천태종을 세울 때 사용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다시 말해 ‘네가 남도육종南都六宗을 버린 것처럼 다이한은 천태종을 버렸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다. 

이 편지를 계기로 구카이는 엔랴쿠지에서 쫓겨나 남쪽으로 내려가 고야산高野山에 정착한 후 그곳에서 진언종의 총본산인 콘고부지(金剛峯寺, 금강봉사)를 세웠다. 이후 구카이는 교토진출이라는 회심을 품고 진언밀교의 근본도량으로 도지(東寺, 동사)를 창건했다. 교토의 대문을 자처하며 창건된 도지(東寺, 교토역 후문 위치)는 중세 이후 서민신앙의 근거지로 자리를 잡았다.

832년 8월, 구카이는 “우주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한, 불교의 깨달음의 세계가 있는 한, 나는 영원히 모든 존재를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3년 뒤 입적하였다. 구카이가 홍법 대사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그의 사후 100년 뒤인 921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본의 고승이 왜 한국 땅에 있는 것인가.

 

|    개항과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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