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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림:이은영

조각은 대개 붙여 나가며 형태가 완성된다. 뼈대를 만들어 놓고 진흙이나 석고를 조금씩 붙이거나 발라가며 작가는 세상에 없던 것을 구현해 낸다. 하지만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는 완성된 형태에서 시작하여 하나하나 떼어 나가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작품의 표면은 먹다 남긴 사과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다.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세워 놓은 것처럼 과하게 길쭉한 형상에다 억지로 마구 쥐어 뜯어낸 것 같은 겉면은 보는 사람을 살 떨리게 한다. 긁어내거나, 후벼 파거나, 떼어 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실이 무엇일지는 아득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날 이후 난 전등불을 켜 두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어쩌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사건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덧없고 덧없음 … 인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마리 개처럼 죽어버릴 수 있다니….”

청년 시절 자코메티는 우연히 죽음을 목격했던 심정을 훗날 이렇게 적었다. 그의 눈에 삶의 막막한 실존성은 단정하거나 매끈하게 표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보통 두 작품이 꼽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유작인 로타르상이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 남자의 흉상을 조각한 이 작품은, “화산에서 갓 태어난, 제대로 식지 않고 아직 용암이 흘러내리는 끈적한 괴물”처럼 보인다. 껍질이란 껍질은 몽땅 태워버리고 검은 숯처럼 앉아 있는 사내는, 커다란 두 눈으로 강렬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본적은 없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거나 상상해봤던 끔찍한 형상, 바로 등신불이다. 작가 김동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등신불의 모습이 로타르상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 ‘나’는 등신불을 처음 목격했던 충격을 이렇게 전한다.

“그것은 전혀 내가 미리 예상했던 그러한 어떤 불상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 향로를 이고 두 손을 합장한, 고개와 등이 앞으로 좀 수그러진, 입도 조금 헤벌어진, 그것은 불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없이 초라한, 그러면서도 무언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사무치게 애절한 느낌을 주는 등신대等身大의 결가부좌상이었다. …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悲願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콱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그러한 어떤 가부좌상이었다. …”

등신불은 부처이면서 중생이고, 벗어났으면서도 또 벗어나지 못했고, 세간과 출세간, 정위正位와 편위偏位, 이 양쪽에 걸쳐 있어서 어느 한쪽에도 자신을 모조리 내맡기지 못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상징한다. 삶이란 본래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겨우 가납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기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가까운 사례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鏡虛, 1846~1912) 선사에게서도 보인다.

경허의 선사상과 행적에서 핵심에는 그가 젊은 날에 직면했던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의식이 있다. 그가 전염병으로 인해 떼죽음 당한 마을을 목도한 사실은, 그와 관련한 수많은 일화 가운데 하나로 흔히 소개되곤 하지만 단순히 일화로 넘길 것이 아니다. 그의 선사상 전체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봐야 한다. 경허에게 죽음은 섬뜩했던 추억이나 사교입선의 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구현한 깨침의 내용과 이후 이력을 무리 없이 설명해 낼 수 있는 핵심 코드이다.

경허는 나이 아홉에 출가하여 열네 살에 동학사에서 경학經學을 시작하고 23세에 강사에 추대되었으며 대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34세 무렵에 문득 동학사를 뒤로하고 옛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해(1879년, 고종 16년) 6월에 마침, 경상 전라 경기 일원에 석 달 동안 홍수가 지고 신종 전염병인 호열자가 창궐했다. 경허는 자신이 사지死地로 들어선 것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초토화된 마을에서 떼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경허는, “당신은 누군데 이 사지로 들어왔는가” 라는 한마디를 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왔다. 그저 사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색이 생사를 초월하겠다고 출가한 사문이었다. 그는 결국 동학사로 되돌아왔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고, 그때까지 삶의 교두보로 삼았던 경학經學 지식은 죽음 앞에서 죄다 무용지물이었다. 죽음은 유예될 뿐 결코 사면될 수 없다는 사실이 절벽처럼 막아섰을 때, 그는 난감했을 것이다.

얼마 후 경허는 당대 조선 제일의 강원을 일거에 폐쇄했다. 죽음은 보편화될 수 없는 보편적 사실이었다. 죽음은 예외 없이 곤혹스럽고 또 절박했는데, 바로 이 ‘절박함’[大憤心]이 선의 출발점이 되었다. 죽음은 경허에게 평생의 화두였다. 그의 법문에 허무의 색채가 짙게 배어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늘, “참선하는 이가 제일로 두려워할 것은 덧없는 세월의 빠름이요, 살고 죽는 것이 실로 큰 일”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곤 했지만, 죽음은 끝내 수행자들에게 문제 상황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은 애당초 설득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벼락처럼 내리꽂혀야 하는 것이었다.

로타르상에는 선사의 절박함이 찐득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로타르상은 등신불처럼, 살아있는 것들의 허약함과 덧없음, 소외에 기인한 내면의 고독에 초점을 맞춰 형상을 응축시킴으로써 부스러질 것 같은 현대인의 불안과 고뇌를 괴물 같은 한 남자의 흉상을 통해 직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삶 속에서 죽음이 곱씹어지고 죽음 속에서 삶이 반추되는, 어쩔 도리 없는 지경을 실존實存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통찰은 자코메티의 또 다른 대표작 ‘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에서 정점에 이른다.

실물 크기 188㎝ 높이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 작품은 뼈대만 남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게다가 재질이 부서질 듯 아슬아슬한 석고다. 이런 모든 사실적인 요소가 인간의, 생명의 막막하고 위태로운 인간의 실존을 상징한다. 내가 대학 신입생 시절 이해도 못 하면서도 줄 치며 읽었던 책 『존재와 무無』의 저자 사르트르가 바로 자코메티의 친구다. 그들은 그렇게 실존주의라는 선뜻 잘 와 닿지 않는 지점에서 만나고 있었다. 실존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는 자코메티의 말에서 존재의 깊숙한 속내가 설핏 드러난다.

죽음 앞에서는 죄다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 허무 앞에서, 그렇지마는 지금 나는 또 걸어야만 한다는 것이 숨 쉬고 있는 것들이 겪어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숙명임을 워킹맨은 보여준다. 나는 말라비틀어져 금방이라고 어딘가 한 군데 툭 부러질 것 같은 그 작품을 보며 뜬금없이 공안 하나를 떠올렸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 막대기니라.”

“마른 똥 막대기니라”, “마른 똥 막대기니라”, 그 소리는 미술관을 나서는 순간까지 내내 귓전에서 웅웅거렸다. 워킹맨은 마른 똥 막대기였다. 흉측하게 말라비틀어져 걸어가고 있는 막대기는 살아 있음의 불민함이고 가슴 속의 막막함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부처의 모습이기도 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장 2절) 자애롭게 미소 짓지 못하는 등신불, 마른 똥 막대기처럼 말라비틀어진 워킹맨은 그 헛됨 속에서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번 겨울 나는 내 어미를 언 땅에 묻었다. 임종을 앞둔 어미는 걷지 못했다. 걷지 못하는 어미를 부둥켜안고 나는, 보름 동안 내처 울기만 했다. 어미가 세상을 떠난 그날 새벽에 눈은 수북이 쌓였고, 나는 죽은 어미가 안치된 곳이 너무 추워 보여서 밤새 서성거렸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

박재현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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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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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주 2018-04-06 00:19:24

    이제 우주에서 절대로 헛되지 않은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은 절대로 헛되지 않네요. 개구즉착이요. 이 봐요 교수양반! 自性은 보셨소? 수십년 도를 닥고,팔만 대장경을 다 외워도 자성을 못보면 말짱 꽝이 올시다. 죽으면 전부 사라지지요. 오직 자성만 남아요. 자성이 불교의 시작이고 끝이외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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