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도를 넘는 날씨였다. 영하가 아니라 영상이다. 스리랑카 이곳저곳을 다닐 때 현지인 가이드 날린이 매일 아침마다 알려주는 기온이다. 그 수치를 들을 때마다 버스 안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지금 한국은 영하 14~15도라는데…. 땀을 흘리며 스리랑카 순례를 마친 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한파가 좀 누그러졌단다. 다행이다. 무려 40도 온도 차를 하루 사이에 겪어내야 할 일이 두려웠는데 순례 마무리도 이렇게 순조롭다. 부처님과 도반들 덕분이다. 나를 포함해서 23명의 순례객은 2018년 1월 11일 밤 저 멀리 인도양으로 날아갔다. 세상 모든 일이 저 혼자 저절로 이뤄지지 않듯 우리의 9일간의 순례길도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이뤄졌다. 충청북도에서 활발하게 신앙생활과 봉사 활동, 그리고 친목을 가꿔오고 있는 ‘충북 불교를 사랑하는 모임(일명 충불사)’의 정기 순례여행이라는 인因과, 나의 은근한 권유가 연緣이 되어 빚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 불자라면 스리랑카로 떠나시길 바랍니다
내가 청주 관음사의 무디따 불교대학에 강의하러 가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러분은 불교 하면 ‘인도’를 떠올리시죠? 인도는 부처님이 나고 자라고 일생을 살다 가신 곳이지만, 지금 인도 땅에서 살아 있는 불교를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오랜 불교 전통이 사람들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지금도 숨 쉬고 있는 땅은 스리랑카입니다. 그러니 불교국가 성지순례를 하려거든 스리랑카로 떠나시기 바랍니다.”
이런 나의 권유가 뜻깊은 성지순례를 계획하는 충불사 도반들의 마음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럼, 교수님 권유대로 스리랑카로 떠나보기로 하지요. 그런데 스리랑카 불교유적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이렇게 제안하는 분은 이른바 ‘충불사 주지스님’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이암 전철호 법사님. 그래서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가이드라고 해야 할지, 해설사라고 해야 할지…. 암튼 미묘한 자격으로 충불사 도반들의 스리랑카 성지순례에 함께 나서게 됐다.
인천공항에서 만나 비행기 타기 전에 기념사진을 먼저 찍자고 한다. 그런데 도반들이 뭔가를 분주하게 찾아서 펼쳐 든다. 헉, 큼직한 현수막에는 ‘이미령 교수님과 함께 하는 충북불교를 사랑하는 모임 스리랑카 성지순례’라고 대문짝만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다. 이 여행을 대하는 이분들의 마음가짐이 다가왔다.
사실 동남아 국가로의 여행은 저렴한 경비가 매력적이다. 그런데 저렴한 해외여행에서 불교유적지 몇 군데를 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제대로 안내를 받지 못한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현지인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한국인 여행자가 저들의 한국어를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현지인 가이드들이 자세하게 설명하면 할수록 한국인 순례객들은 더 헷갈린다. 무엇보다 가이드의 발음이 현지인 스타일이기 때문이며, 해당 국가의 불교에 대한 정보를 순례객들이 미리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생해서 찾아가고는 그것으로 그냥 끝나기 마련이다.
알찬 순례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어느 순례객인들 품지 않을까. 하지만 충불사 모임은 과감히 실행에 옮겼다는 데에 큰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이분들은 강의실에서 흥미롭게 불교 세계를 열어 보이듯 스리랑카의 부처님 자취를 따라나서는 자신들의 발자국이 가볍고도 즐겁고 뜻깊게 그 땅에 찍힐 수 있도록 안내를 해달라는 제안을 주신 것이다.
| 경전의 땅, 불연국토 스리랑카
2년 전 스리랑카를 여행하면서 그때 나 자신도 얼마나 답답했던가. 그때의 가이드도 충실하게 설명해주었지만 불교를 전공한 내게도 쉽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니 이분들 역시 그때의 내 심경과 다르지 않으리라. 내가 스리랑카 불교를 전공하였거나, 동남아시아 불교문화재 전공자라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이번 성지순례 길라잡이 노릇을 하면서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를 공부하고 우리가 참배해야 할 유적지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하여 자료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분들의 연령대를 고려해서 스리랑카 지도도 큼직하게 복사해서 나눠드렸다.
하루 일정이 끝나면 숙소에서 그날 둘러본 유적지 설명을 자료로 점검하는 분들이 계셨다. 추가 질문을 하거나, 나름의 소회를 풀어놓기도 하셨는데, 좀 쉽게 와 닿는, 체계적인 설명, 하지만 지나치게 전문적인 해설이 아닌,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명이 무척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불자라면 스리랑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와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은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인연 있는 땅. 오래전 동국대학교에서 한국불교사를 강의하시던 김영태 교수님은 그걸 간단하게 네 글자로 정리하셨다. 불연국토佛緣國土.
이 지구 위에 부처님과 인연이 닿지 않은 땅이 어디 있을까마는, 특히 스리랑카는 그 인연이 더욱 도탑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경전의 땅이다. 부처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되어 세상에 지금까지 전해지게 한, 가장 묵직한 부처님 인연의 땅이다. 그래서 스리랑카를 다녀와야 한다.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많은 이들이 굵직한 불교유적지는 둘러보지만 알루비하라까지 다녀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만나는 경전이 굶주림에 죽어가던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후세에 남기려던 처절한 서원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면, 그 현장인 알루비하라를 어찌 빼놓을 수 있을까.
한편, 스리랑카는 부처님의 치아 사리로 왕조의 존립을 천명한 나라다. 부처님 치아 사리가 있는 곳이 그 시대의 수도요, 왕궁이다. 사리는 부처님 그 자체이니, 이쯤 되면 스리랑카는 부처님 나라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스리랑카로 순례여행을 떠나거나 유명한 불교유적지 여행길에 오르면 대부분 미힌탈레–아누라다푸라–폴론나루와–캔디–콜롬보 순으로 둘러본다. 이 순서는 달리 설명하면 부처님 치아 사리가 머물렀던 차례이기도 하다. 지금은 캔디 불치사에 모셔져 있고, 특별한 축제 때에만 거리에서 대중들에게 공개가 된다. 한 나라의 왕조가 부처님 치아 사리를 모셔놓았던 사찰을 탐방하는 일은 그 나라의 고대로부터 현대로까지의 역사를 더듬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니 위의 순서대로 스리랑카를 여행했다면 그 사람은 스리랑카의 역사와 불교사를 한 번에 답사한 셈이 된다.
스리랑카가 부처님과 인연이 닿은 국토라는 데에는 부처님이 실제로 자신들의 땅을 다녀가셨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스리랑카 사람들의 믿음도 한몫한다. 부처님은 살아생전에 세 차례 스리랑카를 다녀가셨는데, 그 첫 번째 방문지는 마히양가나 사원이다. 이곳에는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모신 탑이 있다. 두 번째 방문지는 나가디파 푸라나 사원이다. 부처님께서 보석왕관을 놓고 다툼을 벌이던 나가왕들의 싸움을 중재하자 왕들은 부처님께 보석왕관을 바쳤고, 부처님은 그 왕관을 다시 그들에게 주시니 탑을 세워 그 보석왕관을 모셨다고 한다.
| 부처님은 스리랑카를 방문했을까
세 번째 방문지는 콜롬보 외곽에 자리한 켈라니아 사원이다. 이 사원에는 부처님이 앉아서 법문하신 의자가 유명한데 그 법석을 탑 안에 모셨다고 한다. 이 사원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신 부처님은 이곳을 떠나시면서 당신의 발자국을 한곳에 남겨놓으시니 그 자취가 바로 저 유명한 스리파다라는 성소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 성지순례를 이 세 곳과 스리파다까지 다 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빠듯한 일정에 무리다. 그래서 세 번째 방문지인 켈라니아 사원만큼이라도 참배하고 싶다는 의사를 미리 밝혔고, 우리 순례여행 마지막 성소로 이 사원을 참배하고, 사원 안을 빼곡하게 채운 프레스코화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놓기도 했다.
부처님이 진짜로 스리랑카를 방문하셨을까? 글쎄, 사실로 믿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처님이 자신들의 나라에 세 번이나 오셔서 당신의 머리카락을 남겨놓으셨고, 법문을 하시고, 사람들의 다툼을 중재하신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니 더 이상 따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또 말한다. 부처님이 반열반 하신 이후 그 말씀도 이 땅에서 문자로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지 않느냐고. 그렇다면 내가 아주 오래전 대학 강의실에서 들었던 그 불연국토, 부처님과 인연이 닿아 있는 땅은 이 지구상에 스리랑카가 아니고 어디일까.
충불사 순례객들은 아침에 숙소를 나와 성지로 이동하는 중에 예불을 올렸다. 휴대용 괘불탱화를 버스 통로 앞자리에 걸고 오분향례와 반야심경을 봉독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들르는 성지마다 소박하지만 간절하고 진지한 예불을 모시고 싶어 했다. 이번 순례 기간 동안 곳곳에서 우리말 반야심경과 천수경이 나직하게 울려 퍼졌고, 짧지만 입정의 시간도 가졌다.
이번 순례를 위해 충불사 도반들은 특별히 새하얀 도량복 저고리를 단체로 주문했다. 그 새하얀 도량복을 입고 스리랑카의 사원 안으로 들어갈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더 깨끗하고 간절해지는 것만 같았다. 관광객이 아닌, 한 사람의 진실한 불자로서 불연국토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사원에 가서 경을 읊을 때에도 스리랑카 가이드를 통해 허락을 얻었다. 목탁을 쳐도 되는지, 목탁 없이 그저 나직하게 경을 읊어야 하는지, 이곳이 괜찮은지, 아니면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는지…. 우리 맘이야 쩌렁쩌렁하게 예불을 올리고 싶지만 그곳을 찾는 다른 이들도 배려해야 하는 것이 순례객들의 자세다. 충불사 도반들은 가이드의 안내와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고, 경을 읊을 때에도 가능하면 목소리를 아주 낮추었다.
나는 도반들과 함께 어우러져 경을 읊기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눈과 마음에 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풍경이 시야에 잡힌다. 서양 관광객들이 우리의 예불 모습을 담담히 그리고 감동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우리들 뒷자리에 함께 앉아서 끝날 때까지 합장을 하고 있었다.
| 스리랑카조계종복지타운을 후원하고
관광지가 마음의 휴식처, 지혜의 도량으로 거듭나는 순간이 아닐까. 멀리 한국에서 날아간 순례객들이 조용히 읊조리는 경 속에서 유적지 부처님이 배시시 되살아나 생기 넘치는 법문을 풀어놓으시는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충불사 순례객들은 이번 성지순례 일정에 뜻깊은 곳을 빼놓지 않았다. 지난 2004년 쓰나미로 인해 부모와 가정을 잃은 아이들을 수용하고 후원하고 있는 스리랑카조계종복지타운을 방문한 것이다. 그곳에서 생필품과 학용품, 간식거리를 전달하고 운영에 힘쓰고 있는 스님을 뵙고 현황을 듣는 시간도 가졌으며, 물론 충불사의 이름으로, 그리고 개인들이 형편껏 저마다 후원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큰 복을 지으셨습니다.”
가이드 날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좇아 성지를 참배하는 길에 보시의 빛깔이 더해졌으니 이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순례가 또 있을까.
어떤 분은 스리랑카라는 곳을 직접 와보게 되어 좋았다고 한다. 막연하게 어떤 곳일지 궁금했는데 직접 현지에 와서 사원을 참배하고, 주민들의 불교의식과 마을축제도 볼 수 있어 스리랑카 사람들의 불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거다. 또 어떤 분은 스리랑카를 떠나며 소중한 보석 하나를 놓고 오는 것 같다며 서운해한다. 그 분은 다음번에 친구들과 꼭 다시 한번 오겠다고 다짐한다. 그때는 분명 이번과는 또 다른 풍경을 마음에 가득 담아가게 될 것이다.
귀국한 뒤에 사진을 주고받자니 그리움이 밀려온다. 짧은 일정이건만 여운이 길기도 하다. 성지순례가 한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심어줄까. 이따금 자신이 평생 머물러 살고 있던 우물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눈길을 돌려도 좋으리라. 나와 신앙의 빛깔을 함께 하는 도반들과 불연국토를 자박자박 걸어보면서, 불교가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현재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길은 현대 불자들의 국경을 넘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래전, 이미 잊힌 성현의 말씀이 아니라 이 시대 인류의 삶을 따뜻하고 현명하게 보듬는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는 길에서 새하얀 도량복을 입은 당신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