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부처, 마애불]안동이천동 마애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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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부처, 마애불]안동이천동 마애불입상
  • 이성도
  • 승인 2018.04.0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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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 만나는 안동의 큰 얼굴
사진:최배문

전국에서 문화적 자부심이 가장 높은 지역을 꼽는다면 아마도 안동일 것이다. 안동을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 한다. 안동 사람들은 고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거기에는 조선의 국가이념인 유교를 문화로서 원만히 정착시킨 조선을 대표하는 철학자 퇴계 이황이 이곳 출신인 이유가 있다. 퇴계는 영남학단이라고 할 정도로 무수한 인재를 길러내어 안동을 유학의 본향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유교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 가장 많다는 자부심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안동은 전통과 예절이 살아 숨 쉬는 전통문화의 고장이며 오늘날에도 그것을 계승하는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안동은 유교문화 뿐만 아니라 불교, 무속, 민속학, 근대사상 등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지역학인 ‘안동학’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도산서원을 비롯한 유교 유적 못지않게 안동 봉정사는 우리나라 건축박물관이라 할 정도이다. 봉정사에서는 고려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여러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안동이천동마애불(제비원석불)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동에는 시내버스와 버스정류장마다 제비원석불의 얼굴이 있었다. 지금도 안동의 여러 곳에서 제비원석불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각이 진 듯한 타원형의 입체적인 얼굴에 굵은 선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지적인 헌헌장부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안동의 대표 얼굴로 선정된 미스터 안동이다.

안동 시내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로 가다 보면 태화산 기슭에 연미사라는 절이 있다. 그 옛날 영남에서 경기도나 한양으로 갈 때에는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었는데, 그 길목에 있던 곳이 바로 연미사가 있는 제비원이다. 이곳은 ‘제비원, 연구사, 연미사, 이천동석불상, 제비원미륵불’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천동석불입상이 있는 안동 제비원은 민속학적으로 ‘성주신앙의 본향本鄕’, ‘소나무의 본향’이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성주풀이 노랫말에 “성주본향 어디 메냐, 경상도 안동 땅의 제비원이 본 일러라 제비원에 솔 씨 받아 동문 산에다 던졌더니…” 등의 구절에서 성주풀이의 본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 제비원과 석불은 안동의 상징과 신앙의 대상이 되어 정신문화의 한 기둥이 되고 있는 곳이다.

사진:최배문

이천동마애석불입상은 큰 바위에 잘 다듬은 불두를 올려 바위 면 자체를 불신으로 삼았다. 바위 또한 대지에 솟아오른 당당함을 간직하고 있다. 바위 면에 가사의 옷 주름을 선각으로 새겼고 손도 얇은 부조로 처리하고 있다. 발밑에는 커다란 연화대좌를 새기고 있다. 불상 얼굴은 균형 맞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순 엄정한 모습으로 장중하게 표현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불두의 뒷부분, 즉 옆머리 일부와 뒷머리가 깨어져 머리 절반이 없는 불상이다. 자연 바위의 곡면에 불신을 새기고 머리는 민머리에 높은 상투(육계)가 있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분명한 가운데 뺨은 관골이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절제된 볼륨을 가진 모습으로 깔끔하고 이지적인 인상이다. 이는 불신이 장대하고 추상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입체적인 모습이다. 무엇보다 자연석의 거대한 바위가 불신이 되면서 그 위신력이 자못 장대하다. 

자연스러운 어깨와 팔로 이어지는 가사 자락의 선은 거대한 바위 면에 음각선묘로 새겨 드로잉을 한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고요한 가운데 유연한 움직임이 시작되는 선에는 거인의 기상과 대장부의 기운이 서려 있다. 손갖춤은 왼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모습으로, 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는 아미타여래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미륵불로 믿고 있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아미타불이든 미륵불이든 그 이름에 관계없이 안심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면 믿는 것이다.  

사진:최배문

이 불상에는 많은 설화가 있다. 설화에는 21개 각 편에 14개 유형의 서로 다른 줄거리의 전설이 있다. 그 내용은 제비원에 자리 잡은 사찰, 미륵불, 성주풀이, 제비원, 대부송大夫松의 5가지 유래담이다. 그중 사찰과 미륵불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풍부하다. 석불이 도술을 부리는 이야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불상의 목을 잘랐다든가, 말에서 내려 예불을 올리고 갔다는 이야기, 형제가 불상 만들기를 경쟁하여 형이 불두를 조각하여 바위에 올린 이야기. 착한 연이 처녀와 욕심 많은 김 씨 부자의 이야기, 돌부처로 다시 태어난 연이 처녀 이야기, 사찰 건축을 하던 대목이 제비가 되어 날아간 이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전설은 설화의 버전마다 다르긴 하나 내용은 매우 유사하다. 그 중 ‘머리만 조각해 만든 미륵불’이라는 이야기를 보자.

옛날에 어떤 형제가 가장 뛰어난 조각가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조각 공부를 하였다. 문득 세상에서 제일가는 조각가는 둘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형제는 실력을 겨루어서 지는 쪽이 죽기로 했다. 약속한 날짜까지 훌륭한 미륵을 다듬기로 했는데, 아우는 부지런히 돌을 갈고 다듬었으나 형은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 동생은 약속한 날까지 미륵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형은 미륵의 머리만 잘 다듬어서 바위 위에 얹어 지금의 미륵불을 만들었다. 겨루기에 진 아우는 죽었으며, 형이 완성한 미륵불에는 지금도 큰 바위에 조각한 머리를 얹어서 만든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동생은 약속한 날까지 불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형의 완성으로 아우는 죽음을 선택한 슬픈 이야기다.

이야기의 설정에서 제일가는 조각가가 되는 길에 형제가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 마치 검술을 연마하여 일합을 겨루는 무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것도 부처님을 조성하는 일에서 말이다. 더욱이 거대한 바위를 깎아 불상을 만드는 그 어려운 일에 형제가 힘을 합하여도 모자랄 판인데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불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우와 형이 내기를 한 후에 형은 빈둥빈둥 놀기만 하다가 불상의 머리만 잘 다듬어서 바위 위에 얹어 지금의 미륵불을 만들었다. 일반적인 석불형식이 아닌 머리를 별석으로 제작한 특별한 형식을 선택하였다. 이것은 예술에서는 열심히 하는 것보다 아이디어와 표현방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무튼 이곳의 불상이 명장을 꿈꾸던 젊은 조각가의 죽음을 전제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은 지나가는 설화일 뿐이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이 마애불이 만들어진 형식이다. 반원의 절벽 큰 바위를 불신佛身으로 하고 얼굴을 따로 만들어 세우려는 그 조형적 발상은 새롭고 놀랄만한 것이다. 별석으로 불두를 제작하여 큰 바위 면에 결합하는 방식은 통일신라시대 경주굴불사지나 경주남산약수계대불에서 그 예가 있지만 일반화되지 않은 방법이다.

사진:최배문

땅속에 묻힌 바위까지 생각하면 불신은 대지 전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또한 자연석의 불신에 옷 주름과 손의 자세를 음각으로 새겼다. 얼굴이 선명한 이목구비에 입체감 있게 표현되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그 몸도 균형 잡힌 비례와 동세를 가지고 입체적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입체적인 불두에 비해 불신은 선각의 평면작업을 하였다. 그런 면에서 얼굴과 불신은 매우 대비되는 표현기법을 가졌다. 불두가 입체조각이라면 불신은 평면 회화라 하겠다. 옛사람들은 입체적인 실재감보다 불상이 가진 내면적인 덕성이 편안하게 드러나길 원했던 것 같다. 불상 아래에서 촛불을 켜면 그 은은한 조명이 평면의 거대한 불신을 비춰 그 회화적인 불신과 입체적인 얼굴이 함께 드러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거대한 불상 아래에서 발원자의 기도가 은은한 촛불처럼 번져 올라 어둠 속에 있는 부처님의 몸과 얼굴까지 밝혀 원만성취 되길 기원하였던 그 모습을 보는 듯하다. 자비롭고 지혜로운 모습의 상호를 가진 큰 불신의 이 부처님께 기원하면 모든 소망을 다 들어줄 것만 같은 넉넉함을 가진다. 

이 불상의 뛰어난 상호에서 느껴지는 정제되고 근엄한 권위적인 모습에서는 부처님의 위덕을 생각하게 하면서도, 큰 불신에서는 모든 중생을 다 안을 만큼의 넉넉함 즉 부처님의 큰 자비로움이 비쳐진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연이’ 처녀처럼 남에게 선행을 베풀어주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보시 공덕에 관한 초기불교의 한 게송을 적어본다.

“베풂은 중생을 위한 복의 그릇이요,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이니 누구라도 베풂의 공덕을 생각하거든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내라. 베풂은 널리 평등하게 골고루 하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아야만 베푸는 마음속에서 법을 만나 구제받는 인연을 맺으리라….”                                                                      

          

이성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4회 개인전과 270여 회의 초대, 기획, 단체전에 출품하는 등의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국 마애불의 조형성』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현재는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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