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을 봤다. 마디가 굵고 거칠었다. 교수 시절, 학생들을 가르치며 백묵을 잡았던 그 보드라운 손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16년 전이니 그럴 만도 하다. 김사업. 오곡도 명상수련원 부원장이며 지도법사.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기획조정실에서 일하다가 ‘너무나 절박한 심정으로’ 동국대 불교학과에 편입해,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일본 교토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귀국,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였다. 2001년 남해 오곡도에 그의 스승 같은 도반 장휘옥 원장과 함께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을 만들었다. 40킬로그램 시멘트 한 포대를 직접 지게에 지고, 셀 수 없이 해안가에서 수행처까지 옮겼다. 수많은 돌을 나르고, 나무를 다듬었다.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했던 그가, 이제 일꾼으로는 거의 전문가가 됐다. 그 시간만큼 그의 몸은 오곡도에 맞게 야생으로 변해갔다. 불교도 그에 따라 머리에서 몸으로 들어왔다. 불교를 ‘온 존재’로 알게 되었을 때, 그가 글을 써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보냈다. 몸으로 쓴 불교.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불광출판사). ‘연기·공·유식·선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란 부제를 달았다.
| 가장 혹독한 수행처로 떠나는 이유
눈이 내리는 서울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장휘옥 지도법사와 함께 일본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 임제종 코오가쿠지(向獄寺) 선원 집중수행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두 분이서 매년 가는가?” 묻자, “매년 빠짐없이 간다. 수행하면서 나타나는 경지를 점검도 받는다.”고 웃었다.
옆에 있던 장휘옥 원장이 “가장 혹독한 집중수행인 12월 셋신(攝心)에 참여한다. 8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맨발과 얇은 옷으로 온기 하나 없는 수행처에서 영하의 날씨를 버틴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좀 자유롭게 참여한다.”고 했다.
오곡도에 적을 두면서 일본 임제종 고오가쿠지(向嶽寺), 미얀마 위빠사나 수행센터, 플럼빌리지 등 유럽의 수행처와 불교석학들, 티베트 사원 등을 편력했다. 그의 수행길이 머문 곳은 코오가쿠지 선원이다. 그는 이곳에서 방장 마야모토 다이호오(宮本大峰)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일본에서 청정하고 엄격한 수행으로 널리 알려졌고, 사찰 내 암자에서 시자 없이 홀로 지내며, 법복과 버선은 언제나 정결하고 반듯했다.
그가 2003년 겨울, 처음으로 다이호오 스님과 독참獨參할 때의 일이다. 절을 세 번하고 방장 스님 앞에 앉았다. 방장스님과 일대일이다. 고요하지만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첫 만남이다. 방장 스님은 교수 출신의 이 이방인에게 약간은 화난 어조의 큰 소리를 던졌다. 첫 대화인 셈이다.
“무無를 봤는가!”
단호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명색이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쳤던 사람으로 화두를 받겠다고 마주한 상태였다. 당연히 무를 봤을 리가 없다. 공손하게 답했다.
“‘아직’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네가 좌선할 뜻이 없다는 거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요령을 흔들었다. 독참에서 요령을 흔들었다는 것은 “독참 끝났다, 썩 물러가라.”는 뜻이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채 절하고 나왔다. 독참은 순번에 따라 진행된다. 독참이 끝난 이는 물러나 다시 선방에서 좌선을 이어간다.
‘왜 화를 냈을까. 난 그냥 내 상태를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도리어 이 의문이 화두가 되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3시간 후에 또 독참을 해야 한다. 그것도 강제로. 프로그램이 그렇다. 하루 5번, 3시간마다 독참시간이다. 빠질 수 없다. 경지나 의문이 나타날 때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것이 아니다. 3시간 후 방장스님이 또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책에 나온 이야기를 하거나, 머리를 굴려서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모욕적인 언사와 죽비를 맞게 된다. ‘넌 대학으로 돌아가!’ ‘학자의 냄새를 아직도 풍기는 거야!’ 이런 말을 듣는다. 식은땀이 흐른다.
“‘독참獨參은 법法의 결전장決戰場’이라고 합니다. 두 검객이 목숨을 걸고 싸우듯이, 스승과 제자가 법을 두고 목숨을 걸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또 만나야 합니다. 뭔가를 보여야하는데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무無’를 들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다른 것을 일체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3시간 후에 만나야 하니까요. 무 외에는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독참입니다. 독참을 통해서 스승은 제자가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지도합니다. 독참에서 스승은 명의名醫와 같습니다. 스승은 통 속에 갇힌 파리에게 출구를 가르치지 않고, 파리 스스로 출구를 찾아나갈 수 있도록 찔러줍니다. 본인 스스로 두면 알 수 없는 것을 스승이 찔러줍니다. 이것이 독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 오곡도에 들어온 까닭
오곡도 명상수련원에는 2001년에 들어왔다. 보통의 섬마을은 해안 가까이 있지만, 이곳 오곡도는 해안 가까이 마을이 들어설 만한 땅이 없어서, 산 중턱에 마을이 있다. 수련원은 마을 위에 있는 폐교를 개조했다. 폐교 수리는 모두 장휘옥, 김사업 두 전직 교수의 몫이다. 모든 자재를 육지에서 가져왔다. 자재를 배에서 내려놓은 순간부터 좁고 가파른 비탈길을 수없이 올라 수련원까지 옮겼다. 대부분의 공사를 두 사람이 했다. 좌선과 노동을 병행할 수밖에. 오곡도에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을 만든 이유는 이렇다.
“대학 강단에서 불교를 가르칠 때 불교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르치는 우리들 자신이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세상사에 자유롭지 못했고, 욕망과 집착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불교는 교리와 행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 오곡도 명상수련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화선과 위빠사나, 티베트 불교 등 수많은 수행 체험하셨는데, 결국 간화선 수행을 하고 계십니다. 왜 간화선이었죠?
“간화선의 목숨을 건 치열함이 저의 성향에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휘옥 원장님도 그러합니다.”
- 지금 어떻게 운영하고 계신가요?
“집중수행은 여름과 겨울 두 차례입니다. 6박 7일간. 집중수행을 마친 사람들에 한해 한 달에 한 번 주말 수련을 합니다. 함께 좌선하고, 독참합니다.”
- 집중수행 때는 몇 분 정도 참여하시나요?
“10명에서 15명 정도 참여합니다. 신청자가 많지만, 선별해서 받습니다.”
- 요즘도 일할 것이 많은가요?
“그럼요. 아마 평생 일해야 합니다.(웃음) 모든 일을 두 사람이 해야 하니까요. 전날 여기 오기 전에도 잔디를 다 깎았습니다.”
- 그만큼 몸의 변화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오곡도 마을은 산 중턱에 있습니다. 수련원은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이곳까지 지게로 물건을 숱하게 옮겼습니다. 장휘옥 원장님은 아주 약골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건강하시죠(웃음). 제가 위빠사나 수행할 때 무릎 관절이 아주 아팠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연골 부분이 아주 많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수술해야 한다고 수술 일정을 잡았는데, 이곳 오곡도에 내려와 일하고, 수행하면서, 아픈 것이 다 사라졌습니다.”
- 하루 일정은 어떠신가요?
“오전 5시에 일어나서 1시간 좌선하고, 일과를 보낸 후 저녁 후 2시간 좌선합니다.”
- 아주 오랜만에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이 책에서 ‘불교가 어떻게 삶이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하셨습니다.
“불교를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자기 생활이 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책에도 비유가 나오지만, 여기 용기가 있습니다. (탁자 앞 작은 용기를 가리키며) 여기에 소변을 보면 요강이고, 양념을 넣으면 양념단지입니다. 이것이 연기緣起이고 공空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됩니다. 이를 그대로 나를 대입해봅니다. 나는 회사를 설립해 잘 되면 사장이 됩니다. 회사가 망하면 아파트 경비원이 됩니다. 용기는 아무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100퍼센트 요강이고, 100퍼센트 양념단지입니다. 그럼 나는 사장이었는데, 다시 아파트 경비원이 100퍼센트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겁니다. 안 되잖아요. 불교가 삶이 안 되는 겁니다.”
| 어느 포클레인 기사의 100퍼센트 사는 이야기
- 아파트 경비원으로 100퍼센트 받아들일 때 불교가 삶이 되는 것이군요. 책에서도 그런 사례가 다양합니다. 특히 오곡도 명상수련원에서 일하신 포클레인 기사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분은 50대 중반의 포클레인 베테랑입니다. 수련원에 공사가 있을 때 단골로 들어와서 우리들과 상당 기간 같이 있었습니다. 셋이 일할 때나 밥을 먹을 때도 이야기하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좌선도 같이하고, 의문이 있으면 식사할 때 묻고 답하고. 그분이 집중수행에 등록해서 마음을 많이 바꿨습니다. 수처작주. 내가 주인의 입장에서 일을 해주었더니 일거리가 끊임없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오곡도에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한 달에 두 번밖에 쉴 수 없었어요. 근데 어느 날 체중이 갑자기 10킬로그램 이상 빠졌기에 암이 아닐까 싶었답니다. 그때 그분이 어떤 결심을 했냐면 ‘암이라도 좋다, 오곡도에서 배운 대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가, 딴 잡념 없이 포크레인 열심히 하다가, 죽으면, 죽는 그것으로, 그게 전부 아닙니까.’ 하고 말하더군요.(웃음)”
- 그분이 오곡도 수련원에서 배운 것은 무엇일까요.
“순간순간을 100퍼센트 사는 것이죠. 이 순간은 이 순간대로 100퍼센트, 다음 순간은 다음 순간대로 100퍼센트 사는 것이죠.”
- 오곡도 수련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고 들었습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엘리트가 아닙니다. 서민적이고, 삶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의 삶이 힘든 것은 ‘내가 왜 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끊임없는 고苦의 연속입니다. 근데, 순간순간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일이 최선이라고 받아들이면 고에서 벗어납니다. 그게 선禪입니다.”
-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단기간에 일어날 수 있나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립니다. 좌선뿐 아니라, 선의 이론으로 체화시켜야 합니다. 법문을 매일 합니다. 이를 ‘제창提唱’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들의 참구심을 격발시키기 위한 법문입니다. 이론이 내 몸으로 왜 나와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왜 선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 독자를 위해서 여기서 왜 우리가 선수행을 해야 하는지 간단히 설명해주시죠.(웃음)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용기가 요강이 되었다가, 양념단지가 됩니다. 이게 연기고 공입니다. 선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이론이 아니라, 내 몸속에서 펄펄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 선입니다. 요강일 때는 100퍼센트 요강이고, 양념단지일 때는 100퍼센트 양념단지입니다. 이게 삶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 순간은 이 순간을 100퍼센트 사는 것이고, 다음 순간은 다음 순간 100퍼센트 사는 것입니다. 교수인데 지게를 지면 그 순간 100퍼센트 지게꾼입니다. ‘교수가 지게를 지네.’ 하는 생각은 겸손이 아니라, 오만입니다. ‘교수’란 생각을 못 벗었다는 것입니다.”
- ‘수행하다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화두는 드는 자의 심정을 아는가.’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이 어떻게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을까요.
“대중과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역대전등제대조사歷代傳燈 諸大祖師, 법을 이어나갈 인재양성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방장스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긴 한데, 고만고만한 사람 수백 명이 있는 것보다, 제대로 눈 밝은 한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나와야 다음 세대에 정법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선의 역사는 이런 사람들이 아슬아슬하게 실처럼 이어져온 역사입니다.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화두를 드는 자의 심정은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실처럼 이어져왔겠어요.”
| 어떻게 연기와 공이 삶이 되는가
- 선가에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는 말이 연기緣起의 이치를 그대로 설명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왜 그런가요?
“아까 요강이 100퍼센트 요강이고, 양념단지가 100퍼센트 양념단지라고 했습니다. 그게 연기고 공입니다. 마찬가지로 밥 먹을 때는 100퍼센트 밥을 먹는 것입니다. 졸릴 때는 100퍼센트 잠을 자는 것입니다. 연기죠. 근데 보통사람들은 밥 먹을 때 100퍼센트 밥을 먹는가요? 자존심 상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온갖 상상을 하면서 밥을 먹습니다.”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 말도 역시 연기緣起와 공空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기와 공을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연기와 공이 완전히 자기 몸이 되고, 자기 눈이 되고, 자기 귀가 되고, 자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을 한 선사는 연기와 공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일상생활의 삶으로 연기와 공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해도 살아있는 연기와 공이 아닙니다. 결국 연기와 공을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연기와 공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펄펄 살아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 선입니다. 선사들의 이런 말들도 연기와 공이 체험되어 나오는 말입니다.”
- 불교를 공부하지 않아도, 불교가 추구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요? 달리 말씀드리면, 예술가가 작품과 100퍼센트 하나가 되는데, 이 경험은 선사의 경험과 동일할 수 있는가요?
“불교의 생명은 뭔가요? 지혜입니다. 반야바라밀입니다. 그 예술가에 반야바라밀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만약 반야바라밀이 없다면, 몰입일 뿐 지혜는 아닙니다. (그런 몰입은) 모든 순간순간에 100퍼센트 그 순간순간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불교가 삶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불교 교리를 많이 이해한 분들도 그렇게 말씀은 하시지만, 정작 삶에서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본인 스스로 그 한계를 실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대학 강단을 떠나 불모지인 섬에 들어온 가장 큰 계기도 그렇습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아는 만큼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머리로 아는 것이 몸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계, 그것을 실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출가한 것이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다른 사람이 실감하지 못했잖아요. 결국 가장 실감했던 부처님 본인께서 출가하신 것이죠.”
- 그 실감을 도와줄 수는 없을까요.
“계기를 만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옆에서 자꾸 계기를 만들어주면 부작용도 생기고, 인위적인 것입니다. 본질은 본인이 직접 실감해야 합니다. 결국 자기가 몸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 보통 사람들뿐 아니라, 불교를 많이 아는 분들도 늘 겪는 딜레마인데요. 인간관계에서 미운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회피하고 외면하게 됩니다. 이런 딜레마를 겪는 사람들에게는 불교의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요.
“그 사람의 마음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보통 불교를 머리로 이해한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입니다. 『금강경』에 ‘일체의 상을 여읜 이가 부처다.(離一切相卽名諸佛)’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밉다’는 상이 일어납니다. 근데 ‘밉다’는 상을 제거하려는 것도 또 하나의 상입니다. 그건 상을 여읜 자의 행동이 아닙니다. 상을 하나 더 추가한 것입니다. 그러면 상이 두 개가 되는 겁니다. 상과 상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상을 여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 부작용 없는 행복, 선
- 어떤 것일까요?
“여기에 상과 나는 별개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오온五蘊’이 곧 ‘나’입니다. 내가 상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이 곧 나입니다. 상에 의해서 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는 ‘밉다’라는 상, 그 자체입니다. 그게 100퍼센트 나입니다. 진실은 ‘밉다’라는 상만 있는 것입니다. 그 외 다른 상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신이 자각해야 합니다. ‘내가 또 다른 상을 만들어서, 상과 상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면 ‘밉다’만 남습니다. 밉다. 이것만 보는 것입니다. 이때 ‘밉다’가 화두입니다. ‘밉다’에 대한 어떤 다른 견해가 없습니다. 오직 ‘밉다’만 보는 겁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두를 내 생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것으로, 수수께끼 풀듯이 푸는 것이 아닙니다.”
- 오곡도 수련원에서 이와 같은 사례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수련원에서 독참할 때 사람들이 수행이 잘 됐다고 하면서 ‘아, 고요적적합니다.’ 합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고요적적하다고? 그럼 고요적적하다는 것을 누가 느꼈는가?’ 자기가 느낀 겁니다. ‘그럼 느낀 네가 있지 않는가.’ 무아無我가 안 되는 겁니다. 네가 있으니 안 되는 겁니다.”
- 책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도 연기한 것이고 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부자라는 생각, 가난하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야말로 장애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빈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세속의 차원에서는 그런 식의 반론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궁극의 차원, 반야바라밀다의 시각으로 볼 때는 부와 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사회정의에서 볼 때는 빈자를 배려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는 양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은 아닙니다.”
- 최근 한국사회에서 종교의 매력이 자꾸 작아지고 있는데요. 불교는 여전히 매력적인가요?
“저에게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20대에 마음이 괴로울 때 불교를 만나면서 아주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간 후 1년 만에 동국대 불교학과로 편입할 때 주변에서 다 반대했습니다. 찬성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근데 내가 절감했기 때문에 이 반대를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선에서 화두를 들었을 때의 그 강렬함은 어느 누가 다른 이야기를 해도 쫓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 연기, 공, 유식, 선은 앞으로 인류에 크게 공헌할 자산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죠?
“불교의 여러 성자들이 괴로운 삶을 살았나요? 아니죠. 다 ‘부작용 없는 행복’을 살았습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 부작용 없는 행복? 무슨 뜻이죠?
“아편을 맞으면 편하지만, 부작용이 있습니다. 세속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도 부작용 있는 행복입니다. 잠을 깨기 위해 커피를 마시면, 잠은 깨겠지만 부작용이 남겠지요. 불교의 해탈, 열반은 부작용 없는 행복입니다. 보살과 아라한, 선사들은 부작용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생들은 속으로 다 골병이 들었습니다. 부작용 없는 행복한 삶, 이것이 인류의 자산이 아니고 뭐겠어요.”
전화벨이 울렸다. 묵고 있던 방을 비워야 한다.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인터뷰는 더 진행되질 못했다. 그의 책 속에 못다 한 이야기를 미뤘다. 눈이 계속 내린다. 그는 집중수행할 코오가쿠지 선원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