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오곡도 명상수련원 김사업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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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인터뷰]오곡도 명상수련원 김사업 지도법사
  • 김성동
  • 승인 2018.01.2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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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
사진. 최배문

그의 손을 봤다. 마디가 굵고 거칠었다. 교수 시절, 학생들을 가르치며 백묵을 잡았던 그 보드라운 손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16년 전이니 그럴 만도 하다. 김사업. 오곡도 명상수련원 부원장이며 지도법사.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기획조정실에서 일하다가 ‘너무나 절박한 심정으로’ 동국대 불교학과에 편입해,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일본 교토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귀국,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였다. 2001년 남해 오곡도에 그의 스승 같은 도반 장휘옥 원장과 함께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을 만들었다. 40킬로그램 시멘트 한 포대를 직접 지게에 지고, 셀 수 없이 해안가에서 수행처까지 옮겼다. 수많은 돌을 나르고, 나무를 다듬었다.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했던 그가, 이제 일꾼으로는 거의 전문가가 됐다. 그 시간만큼 그의 몸은 오곡도에 맞게 야생으로 변해갔다. 불교도 그에 따라 머리에서 몸으로 들어왔다. 불교를 ‘온 존재’로 알게 되었을 때, 그가 글을 써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보냈다. 몸으로 쓴 불교.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불광출판사). ‘연기·공·유식·선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란 부제를 달았다. 

|    가장 혹독한 수행처로 떠나는 이유

눈이 내리는 서울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장휘옥 지도법사와 함께 일본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 임제종 코오가쿠지(向獄寺) 선원 집중수행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두 분이서 매년 가는가?” 묻자, “매년 빠짐없이 간다. 수행하면서 나타나는 경지를 점검도 받는다.”고 웃었다.

옆에 있던 장휘옥 원장이 “가장 혹독한 집중수행인 12월 셋신(攝心)에 참여한다. 8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맨발과 얇은 옷으로 온기 하나 없는 수행처에서 영하의 날씨를 버틴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좀 자유롭게 참여한다.”고 했다.

오곡도에 적을 두면서 일본 임제종 고오가쿠지(向嶽寺), 미얀마 위빠사나 수행센터, 플럼빌리지 등 유럽의 수행처와 불교석학들, 티베트 사원 등을 편력했다. 그의 수행길이 머문 곳은 코오가쿠지 선원이다. 그는 이곳에서 방장 마야모토 다이호오(宮本大峰)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일본에서 청정하고 엄격한 수행으로 널리 알려졌고, 사찰 내 암자에서 시자 없이 홀로 지내며, 법복과 버선은 언제나 정결하고 반듯했다. 

그가 2003년 겨울, 처음으로 다이호오 스님과 독참獨參할 때의 일이다. 절을 세 번하고 방장 스님 앞에 앉았다. 방장스님과 일대일이다. 고요하지만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첫 만남이다. 방장 스님은 교수 출신의 이 이방인에게 약간은 화난 어조의 큰 소리를 던졌다. 첫 대화인 셈이다.

“무無를 봤는가!”

단호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명색이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쳤던 사람으로 화두를 받겠다고 마주한 상태였다. 당연히 무를 봤을 리가 없다. 공손하게 답했다.

“‘아직’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네가 좌선할 뜻이 없다는 거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요령을 흔들었다. 독참에서 요령을 흔들었다는 것은 “독참 끝났다, 썩 물러가라.”는 뜻이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채 절하고 나왔다. 독참은 순번에 따라 진행된다. 독참이 끝난 이는 물러나 다시 선방에서 좌선을 이어간다.

‘왜 화를 냈을까. 난 그냥 내 상태를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도리어 이 의문이 화두가 되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3시간 후에 또 독참을 해야 한다. 그것도 강제로. 프로그램이 그렇다. 하루 5번, 3시간마다 독참시간이다. 빠질 수 없다. 경지나 의문이 나타날 때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것이 아니다. 3시간 후 방장스님이 또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책에 나온 이야기를 하거나, 머리를 굴려서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모욕적인 언사와 죽비를 맞게 된다. ‘넌 대학으로 돌아가!’ ‘학자의 냄새를 아직도 풍기는 거야!’ 이런 말을 듣는다. 식은땀이 흐른다. 

“‘독참獨參은 법法의 결전장決戰場’이라고 합니다. 두 검객이 목숨을 걸고 싸우듯이, 스승과 제자가 법을 두고 목숨을 걸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또 만나야 합니다. 뭔가를 보여야하는데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무無’를 들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다른 것을 일체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3시간 후에 만나야 하니까요. 무 외에는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독참입니다. 독참을 통해서 스승은 제자가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지도합니다. 독참에서 스승은 명의名醫와 같습니다. 스승은 통 속에 갇힌 파리에게 출구를 가르치지 않고, 파리 스스로 출구를 찾아나갈 수 있도록 찔러줍니다. 본인 스스로 두면 알 수 없는 것을 스승이 찔러줍니다. 이것이 독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    오곡도에 들어온 까닭

오곡도 명상수련원에는 2001년에 들어왔다. 보통의 섬마을은 해안 가까이 있지만, 이곳 오곡도는 해안 가까이 마을이 들어설 만한 땅이 없어서, 산 중턱에 마을이 있다. 수련원은 마을 위에 있는 폐교를 개조했다. 폐교 수리는 모두 장휘옥, 김사업 두 전직 교수의 몫이다. 모든 자재를 육지에서 가져왔다. 자재를 배에서 내려놓은 순간부터 좁고 가파른 비탈길을 수없이 올라 수련원까지 옮겼다. 대부분의 공사를 두 사람이 했다. 좌선과 노동을 병행할 수밖에. 오곡도에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을 만든 이유는 이렇다. 

“대학 강단에서 불교를 가르칠 때 불교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르치는 우리들 자신이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세상사에 자유롭지 못했고, 욕망과 집착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불교는 교리와 행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 오곡도 명상수련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화선과 위빠사나, 티베트 불교 등 수많은 수행 체험하셨는데, 결국 간화선 수행을 하고 계십니다. 왜 간화선이었죠?

“간화선의 목숨을 건 치열함이 저의 성향에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휘옥 원장님도 그러합니다.”

- 지금 어떻게 운영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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