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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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행복입니다.
  • 월호 스님
  • 승인 2018.01.08 18: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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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소소한 행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그동안 필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정리한 열 가지 행복 창조 비결을 권하고자 한다.

1.행복도 불행도 내 작품이다. 
2. 내가 인(因)이요, 남이 연(緣)이다. 
3. 구걸하지 말고 창조하자. 
4.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자. 
5. 나는 억세게 재수 좋은 사람이다. 
6. 걸림돌이 디딤돌! 스트레스가 꽃을 피운다. 
7. 모든 것은 한때다. 걱정할 시간에 관찰하자. 
8. 리셋! 크고 밝고 둥글게. 
9.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스스로를 비교하자. 
10. 수행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전이다. 

《화엄경》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만든다. 달리 말하자면, 믿는 대로 체험한다는 뜻이다. 행복도 내 작품이라고 믿어야 내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나만 잘한다고 곧바로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내가 인(因)이요, 남이 연(緣)이기 때문이다. 먼저 인을 충실히 하면서 연이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인도 충실하고 연도 충실해야 과(果)가 충실하다.

행복이 내 작품이 아니고, 남의 작품 혹은 신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은 구걸밖에 할 수 없다. 구걸하는 마음 연습하면 거지 · 종이 되고, 베푸는 마음 연습하면 부자 · 주인이 된다. 구걸하지 말고 창조하자. 

짜증은 내어서 무엇 하나? 성화를 받쳐서 무엇 하나? 
인생 일장춘몽인데 웃기도 하면서 살아보세. 니나노~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수 없다면, 언제 어디서 행복할 수 있으랴? 멀리 있는 행운을 좇지 말고, 가까이 있는 행복을 챙기는 것이 현명하다. 다시 말해서, 웃을 일이 생겨서 웃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먼저 웃음으로써 웃을 일이 생기게 만드는 것은 주인공만 할 수 있다. 나는 억세게 재수 좋은 사람이다.

‘웃자! 웃을 일이 생긴다. 우하하하하~’

주변 상황은 단순히 돌일 뿐이다.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 딛고 일어서면 디딤돌이 된다. 걸림돌로 만들 것인가, 디딤돌로 만들 것인가? 내가 선택한다. 내 작품이다. 난초도 스트레스를 받아야 꽃을 피운다. 스트레스가 없으면 진전도 없다.

모든 것은 한때다. 걱정 근심과 스트레스는 닉네임에 맡겨놓고, 나는 관찰하고 있을 뿐! 오히려 걱정 근심과 스트레스가 밀려오는 순간이 진정한 수행의 기회다. 먼저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궁극적으로 관찰자를 관찰하자.

몸뚱이는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이 몸과 마음의 변화하는 현상에 닉네임을 붙여 닉네임의 생로병사로 관찰하고, 닉네임의 생주이멸로 관찰한다. 나는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 다만 지켜볼 뿐!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몸과 마음은 진짜가 아니며, 관찰자가 진짜 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가세, 가세, 건너서 가세. 애착하면 못 가나니 
몸과 마음 진짜 아니요, 관찰자가 진짜 나라네.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대면관찰! 행복충만! 아니 가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이 관찰자야말로 본마음 참나이다. 크고 밝고 둥근 것이다. 텅 비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내가 선택한다. 내 작품이다. 우리는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부처도 될 수 있는데, 무언들 될 수 없으랴? 공연히 남들과 비교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스스로를 비교하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어떻게 다른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결국 수행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전이다. 일상생활을 떠난 곳에서 하는 수행은 다만 연습일 뿐! 생활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관찰자를 관찰해야 한다. 평상시에는 ‘마하반야바라밀’을 구념심행(口念心行)하며,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번뇌는 대면관찰(對面觀察)한다.

마하는 ‘큼’이요, 반야는 ‘밝음’이며, 바라밀은 ‘충만함’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이 ‘나’요, 내가 ‘마하반야바라밀’이다. 나는 본래 크고 밝고 충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작고 어둡고 모자라게 느껴지는 것은 진정한 ‘마하반야바라밀’을 체험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작음을 통해 ‘큼’을, 어두움을 통해 ‘밝음’을, 모자람을 통해 ‘충만함’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가 둘이 아님을 깨닫고,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풀며 살자. 전할수록 알게 되고, 베풀수록 갖게 되는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 출처 : 불교평론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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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는 붓다의 가르침이 아닙니 2019-05-14 05:17:33
아이고 월호스님, 스님의 글 "이 관찰자야말로 본마음 참나이다. 크고 밝고 둥근 것이다. 텅 비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내가 선택한다. 내 작품이다. 우리는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 은 붓다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붓다의 가르침인 무아(불변하는 '나'가 없고 다른이와 구별되는 '나'는 없다)와 공(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자성/본성/참나/본마음 이 없다는 뜻) 입니다. 내가 없는데 참나와 참마음은 어디에 있고, 모든것이 연기하는데 텅 비어있어 채워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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