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은 어떻게 합리화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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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은 어떻게 합리화 되는가
  • 원더박스
  • 승인 2018.01.0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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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몬태나주 미줄라에서 벌어진 벌어진 성폭행 사건에 대한 르포르타주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최고의 논픽션 작가가 전하는 성범죄를 보는 우리 안의 이중성

미줄라 존 크라카우어 | 원더박스

성폭행 피해 여성의 80퍼센트 이상이 신고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지인에 의한 강간은 신고율이 가장 저조한 범죄다.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크라카우어는 바로 이 질문을 움켜잡고 미줄라의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

미국 북서부의 평범한 대학도시 미줄라. 2010~2012년 몬태나 대학교를 중심으로 일련의 강간 사건들이 부각되고, 미줄라는 ‘강간 수도’라는 오명을 얻는다. 작가는 그 중심에 있던 세 사건의 처리 과정(대학법원 청문회, 경찰과 검찰 조사, 법원의 배심원 재판 등)을 소개하며, 피해자들이 강간에 대한 사회적 편견 속에서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미줄라』는 『희박한 공기 속으로』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존 크라카우어의 2015년 작품으로, 미국에서 출간 즉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크라카우어는 답답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힘들겠지만 ‘드러내어 말함’으로써 강간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고 독려한다. 그리고 2017년, 미투(#MeToo,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나도 당했다) 캠페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017년을 압축하는 한 단어로 ‘#MeToo’를 꼽았고, <타임> 역시 ‘올해의 인물’로 미투 캠페인을 촉발한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을 선정했다.

 

퓰리처상, 미국문예아카데미상의 존 크라카우어가 파헤치는
성폭행 피해자를 옭죄는 지역 사회의 시선과 사법 시스템

존 크라카우어는 산악가이자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다. 특히 에베레스트 등반 경험과 당시의 참사를 생생하게 전한 책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이 책으로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미국문예아카데미 문학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다. 감정적 편향 없이 절제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치밀하고 다각적인 묘사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그의 글쓰기는 논픽션의 모범으로도 평가받는다. 『미줄라』 역시 방대한 서면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세심하게 재구성함으로써 독자에게 사태의 전모를 입체적으로 제시하는 데 주력한다.
성폭행 피해 여성의 80퍼센트 이상이 신고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강간, 특히 지인에 의한 강간은 신고율이 가장 저조한 범죄이다.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크라카우어는 바로 이 질문을 움켜잡고 미줄라의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

 

왜 미줄라인가

미줄라(MISSOULA). 미국 북서부에 위치한 몬태나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인구 7만 명. 학생 1만 5000명, 교수진 800명에 달하는 몬태나 대학교가 도시 전체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대졸 이상 고학력자 비중이 약 42퍼센트로 미국 평균치인 28퍼센트를 훨씬 웃돈다. 몬태나 주에서 민주당원 비율이 유독 높은 자유주의 성향의 도시다. 하지만 로키 산맥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백인 거주자 비율이 압도적이며(92퍼센트), 무기 소지 자유와 연방정부 역할 제한을 열렬히 지지한다.

몬태나 대학교 미식축구팀 그리즐리(약칭 그리즈)는 미줄라 사람들의 자부심이다. 팬들은 자신들을 ‘그리즈 네이션’, 미줄라를 ‘그리즐리빌’이라고 부를 정도다. 하지만 2010~2012년 일련의 강간 스캔들로 팀 명성이 흔들리고, 미줄라는 ‘강간 수도’라는 오명을 얻는다. 미줄라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이 기간 미줄라의 강간 사건 발생 건수는 비슷한 규모의 다른 도시 평균을 넘어서지 않는다. 강간 사건에 대한 사법기관의 처리 방식이나 지역 주민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미줄라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크라카우어는 가까운 지인이 어린 시절 또래 친구와 가족의 친구에게 성폭행 당한 피해자였고 그로 인해 서서히 삶을 망가뜨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이 얼마나 성폭력에 관해 무지했고 무관심했는지 통렬히 깨닫고서 이 주제에 대한 취재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만난 것이 바로 몬태나 대학교 강간 스캔들이다. 그는 성폭행 문제에 대한 지극히 평균적인 인식과 그로 인한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곳의 이야기를 전하기로 결심한다.

 

‘지인에 의한 강간’ 또는 ‘데이트 강간’
- 미줄라가 아니어도 어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이 책은 미국의 한 대학 도시에서 벌어진 일련의 성폭행 사건들, 일명 ‘미줄라 강간 스캔들’을 추적한 르포르타주로, 저자는 몬태나 대학교에서 2010~2012년에 벌어진 일들로 초점을 좁혀 추적해나간다. 특히 그중에서도 세 가지 사건이 이야기의 축을 이룬다. 대학생 앨리슨 휴거트, 케이틀린 켈리, 세실리아 워시번(가명)은 이 기간 중에 각기 다른 남학생에게 강간을 당했고,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지인에 의한 강간’ 또는 ‘데이트 강간’이라 할 수 있는 사건들이며, 이중 형사 기소된 두 사건은 피의자가 몬태나 대학교 미식축구팀 그리즐리의 유명한 선수라 더욱 이슈가 되었다.

앨리슨 휴거트는 2010년 9월 그리즐리 팀 소속 선수이자 초등학교 때부터 친남매처럼 지내온 보 도널드슨에게 강간을 당한다. 도널드슨의 집에서 열린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잠든 밤, 도널드슨은 소파에서 잠들어 있던 휴거트를 강간했다. 케이틀린 켈리는 2011년 9월 같은 학교 신입생이자 그날 캠퍼스에서 우연히 만난 캘빈 스미스(가명)와 한껏 취한 상태로 섹스를 하기로 하고 기숙사에 들어가지만, 같은 방에 잠들어 있는 룸메이트를 보고 마음을 바꾼다. 섹스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힌 후 스미스와 나란히 누워 잠들지만, 스미스는 섹스를 시도하고 켈리의 거부에도 멈추지 않았다. 세실리아 워시번(가명)은 2012년 2월 그리즐리 팀 스타 쿼터백 조던 존슨에게 자신의 방에서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한다. 둘은 전부터 알아온 호감이 있는 사이이긴 했지만, 존슨에게는 당시 다른 여자친구가 있었고 워시번은 그날 성관계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방에서 함께 영화를 보다 애무를 하던 중, 존슨은 워시본의 ‘이제 그만하자’는 요구에도 이를 묵살하고 워시번을 강간한다.

미줄라에서 벌어진 일들은 한동안 언론을 달구었고, 오바마 정부가 2014년에 캠퍼스 성범죄에 대응하는 TF팀을 구성해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만들도록 촉발하기도 했다.(트럼프 정부는 이 가이드라인을 철회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미줄라가 전혀 특별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온라인에서는 미줄라를 두고 ‘강간 수도’라고 손가락질했으나, 사실상 미줄라의 강간 사건 발생률은 미국 전국 평균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

강간은 어떻게 합리화되는가
옭죄는 주위의 시선과 기울어진 사법 시스템

강간은 피해자가 거짓말한다는 의심을 받는 유일한 범죄다. 가뜩이나 충격에 휩싸인 피해자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무고 의심’이다. 책에 등장한 여성 피해자 다수가 신고 후 경찰에게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여성들이 바람을 피우고선 강간당했다고 거짓 신고를 한다는 의심에서다. 대다수 여론은 그리즐리 선수는 자고 싶어 하는 여자가 줄을 섰으므로 강간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고, 심지어 피해자를 거짓말을 하며 세상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인다.

세실리아 워시번을 강간한 혐의로 피소된 조던 존슨 측 변호인단은 피해자를 ‘스타 쿼터백과 사귀어 주목받고 싶었으나 기대가 좌절되자 강간 피해자 연기를 해 관심을 구걸하는’ 인물로 오도하는 데 주력했고, 일부 성공적이었다. 이런 방식은 강간 사건 변론의 단골 전략이다. 한편, 앨리슨 휴거트 역시 분명한 가해자 자백이 있었음에도 줄곧 지역 사람들과 그리즐리 팬들, 심지어 가까웠던 지인들로부터도 거짓말한다는 의심과 촉망받는 젊은이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또한, 많은 사람이 무장한 괴한이 여자를 덤불숲으로 끌고 들어가 덮쳐야 비로소 ‘강간’이라고 여긴다. 가해자는 여자가 ‘싫다’고 하는 거부 의사를 무시하거나 자기 좋을 대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여긴다. 지인에 의한 강간 사건의 가해자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것이 강간인 줄도 모르거나, 알게 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강간은 계속 일어난다. 미 법무부에 따르면, 반수 이상의 성폭행이 상습범에 의한 것이다.

용기 내어 경찰에 신고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경찰 조사에서 받은 ‘무고 의심’을 비롯한 각종 2차 가해만이 아니다. 경찰에서 검찰로 이관되어도 검찰이 기소를 꺼린다. 특성상 형사사건에 요구되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입증이 어렵기 때문이다. 2008~2012년 미줄라에서 신고된 350건의 강간 사건 중 경찰이 검찰로 이관한 사건은 114건이다. ‘이관’은 경찰이 사건 수사를 완료하고 성폭행으로 기소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뒤 기소를 권고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관된 114건 가운데 기소는 14건(약 12%)에 그쳤다. 이유는 대부분 ‘증거 불충분’이다.

검찰이 기소를 한다고 해도 거기서 끝이 아니다. 배심원 재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지역민의 신망을 얻고 있는 스포츠 스타에 대한 재판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 시합이나 마찬가지다. 배심원 재판에서의 ‘무죄 평결’을 피하기 위해 피의자와 ‘유죄 협상’을 벌이기도 하는데, 그 역시 피해자에게는 가혹한 경험이다.

그럼에도 드러내어 말해야 하는 이유
-강간범은 피해자의 침묵을 통해 책임에서 벗어난다

크라카우어는 미줄라에서 만난 여성 피해자들이 경험한 극심한 고통을 육성 그대로 옮긴다. 강간당한 밤의 기억, 그 후로 따라다니는 공포와 자괴감, 경찰과 검찰과 피고 측 변호사가 자신들을 대한 방식, 여론의 비난과 개인적 분노 등등. 그럼에도 그들은 지인 강간을 세상에 드러내는 소수가 되길 선택했다. 용기를 내 목소리를 낸 데에 따른 대가는 혹독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공통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여성이 자기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책을 마감한다. “강간범들은 피해자의 침묵을 이용해 책임에서 벗어난다. 자기 이야기를 밝히면서 그런 침묵을 깨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은 강간범에게 강한 일격을 날릴 수 있다. 전면에 나선 많은 피해자들이 불신을 경험한다. 법정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일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드러내어 말함으로써 그들은 다른 피해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라고 격려하는 역할을 하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치유됨을 느끼기도 한다.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 성폭행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밝히는 피해자들이 늘어날수록 그들의 힘도 커진다. 이 집단적 강인함이 모든 피해자에게, 너무 두려워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피해자에게도 힘을 준다. 그들이 느끼지 않아도 될 수치심은 대개 고립 속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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