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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벽화이야기] 월리사 대웅전 한산습득도야반삼경에 손가락을 만져보라
사진:최배문

달 월月, 속 리裡, 절 사寺. ‘달 속의 절’ 청주 문의면에 있는 월리사月裡寺를 문자 그대로 풀면 이런 뜻이다. 달 속의 절이라니, 시구처럼 멋지긴 한데 무슨 뜻인지 잘 다가오진 않는다. 1665년에 쓰인 월리사사적비는 달과 가까운 높은 곳에 위치해 월리사라 했다고 전하면서도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말끝을 흐린다.

월리사는 산 중턱에 있다. 그렇다면 월리사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이 질문과 다시 만나게 될 터이니, 의문을 품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월리사 한산습득도를 선택한 것은 곡절이 있다. 원래 한산습득에 관해 쓰려고 했던 벽화가 따로 있었지만, 사찰에 도착한 순간 생각을 접어야 했다. 수장고에 모셔진 ‘유물’이 아무리 빼어나다할지라도 법당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늙어가는 벽화에 비할 바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도 첫정이 무섭다고, 이후로 눈에 드는 한산습득도가 드물었다. 그렇게 반년을 흘려보내고 찾아간 곳이 월리사다. 

만일 ‘절집’이라는 말에서 고요함, 호젓함, 여백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면, 월리사는 절집 그 자체다. 대웅전은 일요일 아침 목욕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 이웃의 모습과 닮았다. 거대함으로 사람을 압도하고 화려함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사찰들의 틈바구니에서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랄까. 19세기쯤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의 벽화들도 간명하고 소박하긴 매한가지다.

한산습득도는 대웅전 내부 좌측 내목도리 윗벽에 그려져 있다.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두 명의 인물. 얼굴엔 세월이 스친 흔적이 역력하지만 머리를 양 갈래로 묶어서 그린 화사의 성의를 봐서라도 그들을 아이라 부르기로 하자. 오른편 아이는 한 손에 불로초를 들고, 다른 손은 뻗어서 달을 가리키고 있다. 왼편의 아이는 소매를 바위 앞으로 늘어뜨린 채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알다시피 이들은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다. 한산습득도의 다양한 유형들(빗자루로 바닥을 쓴다든지, 경전을 들고 있거나, 양팔을 벌리고 헤벌쭉 웃고 있는) 가운데 달을 가리키는 도상에 속한다. 누가 한산이고 어느 쪽이 습득인가? 이는 프랑스와 불란서를 구분하려드는 것만큼 덧없으나, 굳이 나누자면 달을 가리키는 쪽이 한산이다. 한산‘과’ 습득을 알기 위해선 ‘과’를 함께 살펴야 하는데, ‘과’를 맡고 있는 이가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산 국청사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풍간豊干 선사다. 『천태삼성시집天台三聖詩集』 서序에는 당시 관리였던 여구윤閭丘胤이 한산과 습득, 그리고 풍간을 만나 겪은 일화가 전기 형식으로 실려 있다. 한산과 습득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니 굵직한 뼈대만 짚어 보자. 

사진:최배문

 

국청사에 적을 둔 행각승行脚僧 풍간, 그가 길에서 주워 기른 승려 습득, 그리고 국청사 주변 한암寒巖에 홀로 살던 은자 한산이 있다. 미치광이 취급을 받고 승려들에게 얻어맞던 한산은 자신을 위해 찌꺼기 밥을 모아서 전해주던 습득과 친구가 되고, 풍간 선사와도 교류하며 지낸다. 여구윤은 태주太州에 관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두통이 생겨 백약이 무효인 상황에서 홀연히 풍간 선사가 찾아와 병을 낫게 한다. 여구윤이 스승으로 모실 이를 묻자 풍간은 한산과 습득이 문수와 보현의 화신이라 말한다. 여구윤이 국청사에 찾아가 그들에게 절을 하자 둘은 아미타불(풍간)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자신들에게 절한다고 꾸짖고는 한암 바위굴로 사라져버린다. 이후 여구윤이 사람을 시켜 세 사람이 남긴 시를 수집하고 묶어서 낸 책이 『천태삼성시집天台三聖詩集』, 이른바 『한산시집』이다. 그런데 시를 보면 한산은 보살이나 선사 같은 불교적 인물로 묶기엔 낯선 결이 도드라진다. 

“총명한 놈은 단명하기 십상이고(聰明好短命), 어리석은 놈이 오히려 장수한다(癡騃卻長年), 멍청할수록 재물이 풍족하고(鈍物豐財寶), 정신이 올바르면 땡전 한 푼 없구나(醒醒漢無錢).”

한산의 시에선 세태풍자뿐만 아니라 과거에 수차례 낙방하고 도교에 탐닉한 모습이 드러난다. 그래서일까. 화사는 신선마냥 불로초를 손에 쥔 모습으로 한산을 그려놓았다. 하지만 한산의 정체성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세 명의 성인은 물론 여구윤 또한 실존인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주록』에 나오는 조주 선사와 한산습득의 만남은 무엇이란 말인가. 조주가 국청사에서 한산과 습득을 보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내 눈에는 그저 물소 두 마리가 보이는구먼’이라 말하자 한산과 습득이 곧바로 소가 싸우는 흉내를 내었다는 일화 말이다. 이는 한산습득의 전승이 선종의 역사 속으로 맛깔나게 스며들었다는 사실과 한산습득도가 대표적인 선화禪畵로 정착할 수 있었던 시대적 풍경을 드러낼 뿐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그림의 중요한 부분을 건너뛰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림의 화제畫題인 ‘지월동指月童’이다. 달을 가리키고 있는 아이라는 뜻인데, ‘한산습득’의 이름을 생략하고 ‘지월동’이란 화제만 단 그림은 찾기 어렵다. 또 한산이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림도 드물긴 마찬가지다.

이 두 가지 특이점은 한산습득의 서사가 내포한 기존의 맥락을 지워내고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열어젖힌다. 한산은 그림 밖의 우리를 향해 노골적으로 손가락과 달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둘 중 무엇을 봐야 하지?’

사진:최배문

 


질문이라기엔 뻔해서 식상할 정도인데, 어리석은 중생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응당 ‘달’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 질문의 배경이 되는 『능가경』의 구절을 살펴보자.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如愚見指月),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觀指不見月), 언어만 집착하는 자는(計著名字者), 나(부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不見我眞實)”

우리는 여기서 ‘손가락’과 ‘달’이 본래 ‘언어’와 ‘진리(깨달음)’의 은유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구절을 이해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진리와 언어에 대해 주류를 이루는 불교적 입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언어란 지붕을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와 같다는 ‘언어도구론’, 다른 하나는 그 사다리 자체가 부실하고 썩어서 도리어 지붕에 오르는 것을 방해한다는 ‘언어무용(배제)론’이다. 교종이 전자라면, 선종은 후자겠다. 그렇다면 『능가경』의 구절은 언어도구론일까, 언어무용론일까? 『능가경』은 경전이긴 하지만 초기 중국선종의 사상적 토대가 된 경전이기도 하니 답하기가 애매하다.

그러나 고민하지 마시라. 둘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해도 별반 차이가 없다. 정반대로 보이는 두 입장은 실은 같은 땅을 밟고 서 있다. 언어는 깨달음이라는 ‘체험 자체’에 결코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언어와 경험을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상식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사진:최배문

 

만약 언어와 진리의 관계를 불교의 핵심사상인 중도中道와 연기법에 두고 조심스럽게 다시 살펴보면 어떨까. 혹시 진리와 언어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는 아닐까. 달과 손가락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不一),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닌(不二) 관계 말이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불교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두고 누군가는 모순이니, 비논리니 하겠지만, 아무튼 의상義相은 「일승법계도」에서 깨달음이 “언어나 형상이 모두 끊어진(無名無相絶一切)” 경지라 하면서도, “깨달음과 언어는 예부터 중도이고, 하나로서, 분별이 없다(證敎兩法 舊來中道 一無分別)”라고 밝혀 놓았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언어적 전회’ 같은 호들갑을 떨면서 철학의 중심에 언어를 세운 서구사상계 입장에서 이런 말이 7세기 신라 승려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것이다. 물론 의상의 주장은 ‘언어 너머의 깨달음’이나 ‘언어도구론’만이 정답으로 통용되는 21세기 한국불교계로선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교를 새롭게 읽으려는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 우선 『능가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전들이 왜 달과 손가락을 ‘함께’ 묶어서 비유해왔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일이다. 이는 달이 손가락 너머에 홀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달은 늘 손가락과 ‘함께’ 있음(연기법)을 깨달을 때 지닐 수 있는 태도이다. 벽화로 돌아와 한산 옆에 있는 습득을 보라.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의 시선은 정확히 달을 향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달을 볼 수 있었는가? 한산의 손가락과 달이 ‘함께’ 있음을 믿고, 알았기에 가능했다. 한산의 손가락, 그 너머의 달, 달을 보는 한산으로 각각 쪼개어 분석하는 것으로는 한산습득도가 지닌 이해의 지평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화사가 ‘한산습득’이란 화제를 버리고 굳이 ‘지월동’을 내세운 것도 결국 손가락(指)과 달(月)과 내 천진한 마음(童)이 ‘함께’ 어우러질 때만이 진리가 드러남을 전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손가락과 달을 모두 보았으니 이야기를 접어야겠지만, 우리에겐 숙제가 남았다.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글의 첫머리에서 제기한 ‘월리사’의 뜻이다. 한산이 가리키고, 습득이 바라본 ‘달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다시 말해 ‘불법佛法의 요체’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달 속에 무엇이 보이는가? 내겐 손가락이 보이고, 당신이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 그러니 야반삼경에 문빗장을 만져보러 나설 일이 무엇 있겠는가. 다만 문빗장과 ‘함께’ 있는 우리들의 손가락부터 쓰다듬으면 될 것을.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 

 

강호진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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