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월간불광 문화
[사람과 사람들] 매듭연구가 성낙윤제 손으로 매듭이은 인연

성낙윤(80) 씨는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매듭공예를 만들어왔다. 실과 실을 엮고, 마디와 마디를 이어 만드는 매듭처럼 그의 나이 여든까지 수많은 인연들과 매듭을 이어왔다. 매듭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선조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애용되었으며 다양한 형태로 미화美化하기도 했다. 전통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매듭공예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진:최배문

|    내게는 너무 특별한 매듭

지난 11월 8일부터 13일까지 인사동 아리수 갤러리에서 ‘성낙윤의 솜씨전’이 열렸다. 전통공예품을 품격 높은 생활용품으로 사용하는 작업을 해온 지 50여 년. 전시는 그가 쌓아온 매듭과 바느질 등의 노하우를 회향하는 의미에서 열렸다.

“매듭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그 중 구슬형태의 전통 가락지매듭을 보면서 ‘매듭들만 이어 단주형태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자들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염주나 단주를 만들면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았어요.”

단주를 만들기 위해 가락지매듭을 잇는 끈 선정부터 매듭을 구성하는 방법까지 고민했다. 저녁이면 조용하게 혼자 방에 앉아 수행하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 매듭을 엮는 작업으로 삼매에 빠진 듯 집중하면 제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새벽까지 깨있기 일쑤였다. 매듭을 엮는 과정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그렇게 노력하여도 한 달에 두세 개, 많아야 네 개 정도 완성한다. 

매듭을 엮으면서 입으로 『천수경』을 외거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한다. “이 염주로 기도하는 사람, 그 원을 이루게 해주세요.”라고 서원하며 손끝에 정성을 담는다. 알알이 맺힌 매듭은 손때가 묻어 단단하게 얽혀있다. ‘그래도 실로 만들었는데 금방 풀어지고 헤지겠지.’라는 생각도 직접 보는 순간 달리 느껴진다. “어떻게 만든 거지?”라는 물음이 저절로 입 밖에 새나온다. 끈목(매듭을 하기 위하여 여러 올의 실로 짠 끈)으로 만들어진 염주는 매듭이 잘 얽혀있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어떻게 매듭을 시작해서 어디로 끝맺음을 했는지도 모르게 잘 엮여있다. 매듭으로 만든 염주가 손을 많이 탄 듯 반질반질하고 단단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5년 정도 여고에서 교사 생활을 했어요. 교사라는 직업이 참 좋은 직업이지만, 저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반듯하게 매일 정해진 일정에 따라 생활하는 게 제가 추구하는 삶과 달라 항상 ‘교사는 내 길이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교사 생활 중간, 우연히 보게 된 매듭장의 인터뷰 기사가 매듭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매듭을 공부하며 전에는 느끼지 못한 즐거움을 맛보았다. 친구들에게 “잠순이”라고 불릴 만큼 잠이 많았던 그가 자는 것도 잊은 채 매듭을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교사 생활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매듭을 익혀나갔다.

사진:최배문

 

|    오래된 인연, 새로운 도전

“제 나이 정도의 불자들이 사찰을 다니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어머니의 영향일 겁니다. 저도 그렇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말씀과 행동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절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 날이면 항상 몸을 깨끗하게 하시고, 말끔한 옷을 차려 입으셨습니다. 어린 저는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았죠.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교의 인연은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이어진다. 특히 70년대 중반 이기영 박사를 따라 일주일 간 통도사 수련대회에 참가한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 경봉 스님을 뵙고 법문을 들은 것은 정말이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 많이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의 저는 운이 참 좋았어요. 경봉 스님 외에도 성철 스님 등 당시의 큰스님들을 만날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삶의 방향을 조금씩 정한 것 같아요.” 

1980년 전후로 그는 자신의 진로를 새로 정했다. 1979년도에 교사 생활을 그만 두고,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1980년에 롯데화랑에서 매듭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종로 삼청동 입구의 법련사 1층에 가게를 냈다. ‘성낙윤의 매듭 연구실’이라는 이름으로 매듭을 지도하고 강의를 하며 당시 한국 사회에 매듭을 보급시켰다. 이후 침구와 혼수 용품 등으로 영역을 넓혔고, 80년대 중반 압구정동에서 전통 혼수 가게를 열어 큰 인기를 얻었다.

매듭연구가로 이름을 알리기까지 수많은 시도와 도전이 있었다. 항상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구상하려 노력했다. 매듭이나 길쌈 등 수공예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많은 활동을 해왔다. 그의 명성을 시기하고 공예품들을 따라 만들어 파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좋은 인연들이 많았다.

“참 고맙게도 좋은 인연들이 많아서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했던 활동과 행동들,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까지 모두 인연입니다. 그 좋은 인연들에 책임감을 느껴요. 그렇기 때문에 매듭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는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작은 불편한 점에서도 늘 아이디어를 얻어 새로운 작품을 만들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는 무슨 말씀이신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항상 정진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가진 것들에 당당하지 않으면 남들 앞에 나설 수 없을 겁니다. 앞으로도 부처님 잘 섬기고 잘 회향하겠습니다.”

그의 나이 팔십. “이제는 감각.”이라며 “어린 눈보다 손이 먼저 간다.”는 그다. 반세기동안 매듭지어 온 그의 손이 참으로 단단하다.               

사진:최배문
사진:최배문

 

김우진  kimwj518@naver.com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우진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