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무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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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무덤 앞에서
  • 박재현
  • 승인 2017.11.2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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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이은영

고분은 젊은 아낙의 젖가슴처럼 봉긋했다. 44호 고분 위에서 바라본 가야의 능선은 낮은 포복으로 출렁거렸는데, 바람은 능선 너머 먼 들녘에서부터 밀려왔다. 무덤가 늦가을 마른 풀잎은 바람을 따라 파도처럼 쓰러지고 또 일어났다. 넘실거리는 시간 아래서 가야의 왕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희뿌옇고 누르스름한 빛깔의 송장메뚜기만 말라 바스락거리는 늦가을 풀숲 속에서 튀어 날아올랐다.

죽음이 외로운 길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거나 덜어내고 싶었던 때문이었을까. 가야의 왕들은 함께 묻혔다. 왕과 함께 묻힌 자들의 주검은 왕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빙 돌아가며 자리 잡았는데, 30대 남녀가 함께 묻히기도 했고, 20대 여자가 혼자 묻히기도 했고, 10대 소녀 둘이 한꺼번에 묻히기도 했다. 

나는 30대 남성과 8세 여아가 함께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앞에서 꽤 오래 서 있었다. 그들을 덮은 돌 덧널은 길이 224cm, 너비 50cm, 높이 28cm에 불과했다. 그 내부에는 남동단 벽에 접하여 어른의 머리뼈, 다리뼈, 발가락뼈 등이 발견되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몸을 편 채 머리를 동남쪽으로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부녀지간으로 보인다고 설명 판에는 적혀있었지만, 설사 그 내용이 틀림없다고 해도 부녀가 순장되기까지의 곡절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같이 죽어주면, 죽음의 외로움이 덜어지는 것일까. 함께 묻히면 저승 가는 그 길이 덜 외로운 것일까. 외로움은 내가 느끼는 것일 텐데, 죽어 내가 없어지고 나면, 도대체 누가 외로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너무 답답했다.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은 마른 짚처럼 푸석거렸다. 

가야 왕들의 주검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산의 위쪽 능선에 자리 잡았다. 초기 가야의 죽은 왕들은 낮은 곳에 묻혔고 겨우 무덤 모양만 갖추었다. 그들의 권능은 그 주검을 산 정상 가까이 밀어 올만치 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은 무덤에 순장은 어려웠을 테고, 왕들은 낮은 곳에 혼자 묻혀 저승 가는 길을 감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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