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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함께 한 식물 그리고 동물] 우담바라와 거위
사진 : 심재관, 산치 탑에 표현된 우담바라 나무. 이 나무는 과거칠불의 하나인 구나함불을 나타낸 것이다. 조각 속에 우담바라의 열매(꽃)가 보인다.

우담바라


“우담바라의 꽃, 흰 까마귀, 물고기의 발자국을 볼 수 있을지언정 여자들 마음속은 알 수가 없지.”

인도의 격언(Subhās.ita) 가운데 하나다. 우담바라 나무에서 꽃이 피는 일은 흰 까마귀를 보거나 물속에서 물고기의 발자국을 보는 일처럼 거의 불가능한 일이란 뜻이다. 불교에서는 희유한 일들, 세상에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을 가리켜 우담바라에 꽃이 피는 일이라 말하곤 한다. 부처님이 세상에 등장하는 일이나 중생들이 인간의 몸을 받아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듣게 되는 일 등도 이런 일에 해당한다. 

이런 표현들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나 『법화경法華經』과 같은 대승의 경전들 속에서 매우 희귀한 인연을 표현하는 상투어구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아함경』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어법은 꽤 오래전에 정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나무의 특징을 묘사한 불경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나무는 과연 어떤 나무인가. 

우담바라優曇波羅 또는 우담발라優曇跋羅 등으로 부르는 이 나무의 본래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우둠바라Udumbara다. 이미 잘 알려진 바지만 이 나무는 피쿠스Ficus, 즉 무화과無花果나무의 일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학명은 피쿠스 글로메라타(Ficus Glomerata Roxb.)인데,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일대에 자생하고 있다. 지구상에는 수백 가지의 무화과 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꽃이 없이 번식하는 것은 아니다. 우담바라 역시 본래 꽃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 꽃이 아주 작은 풀잠자리의 알을 말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가끔 방송이나 신문에서 불상에 우담바라 꽃이 피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실제 우담바라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사실 풀잠자리 알은 너무 흔하지 않은가. 

우담바라의 열매는, 마치 한국에서도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는 무화과 열매(피쿠스 카리카 Ficus Carica)와 같이, 본래 열매가 아니라 꽃이다. 특이하게도 가는 줄기 끝에는 잘 달리지 않고, 주로 나무의 밑동이나 큰 줄기 아래쪽에 여러 개씩 매달려 달린다. 우리가 열매라고 생각해서 반쪽으로 쪼개면 나타나는 안쪽의 내용물이 사실은 수없이 많은 작은 꽃들로 채워진 부분이다. 그러니까 ‘뒤집힌 꽃’이 열매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찬 씨를 새나 짐승들, 인간이 옮기게 된다. 

이 식물의 드라마틱한 번식은 나무의 효용보다도 더 흥미로운 부분이다. 무화과 말벌(fig wasp: 사실은 아주 작은 날벌레다.)의 암컷은 번식 때가 되면 무화과 열매가 아직 여물지 않을 때 그 열매의 밑 부분에 있는 아주 작은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데 이때 더듬이와 날개가 부러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전에 무화과 말벌은 열매(즉, 꽃) 속에서 꽃들을 수정시키고 동시에 그 안에 자신의 알을 깐다. 알에서 먼저 깨어나는 것은 수컷 유충인데, 날개 없이 태어난다. 이 수컷은 아직 알을 까지 않은 암컷들을 찾아다니며 수정을 시키고 암컷들이 무화과 열매를 탈출할 수 있도록 작은 구멍들을 내어준다. 다른 날벌레들이 이 무화과 열매를 찾아와 달콤한 맛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무화과 벌레들이 수정과 번식을 다 무사히 끝마친 훨씬 뒤의 일이다. 

우담바라는 이와 같이 독특한 번식과 공생방식 때문에 꽃이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일 년에 몇 번씩이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꽃은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나무에 있었으며 이 우담바라 나무와 무화과 말벌은 공생을 통해 번식한다. 우담바라가 번식을 위해 이 날벌레와 공생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고대 인도인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Mahābhārata』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와 물이 각각 다른 존재이지만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우담바라와 날벌레가 서로 결합하여 있는 것들이지만 서로 다른 존재인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사진 : 심재관, 기원후 2세기경. 카니쉬카 대왕의 사리기에 표현된 거위.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

우담바라가 자주 열매를 맺는 특징 때문인지 아니면 그 나무의 수액 때문인지, 베다 시대의 고대 힌두교도들 역시 우담바라를 귀중한 생명의 나무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나무는 마치 인도의 4성계급 중 하나인 바이샤Vaishya와 같이 ‘생산성’을 상징하는 나무로 베다 문헌 속에서 빈번히 묘사되며 베다 의례에서도 사용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이 나무는 곧장 불교 속으로 들어와 성스러운 나무의 하나로 탈바꿈한다. 초기의 불교도들은 과거칠불過去七佛 가운데 한 명인 구나함불拘那含佛, 즉 카나카무니Kanakamuni가 먼 과거에 이 우담바라 나무 밑에서 깨달았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인도의 대표적인 유물들 속에도 잘 드러나는데, 바르후트 탑이나 산치 탑, 아잔타 석굴 등에 표현된 우담바라 나무는, 때로 나무 이름과 함께, 그 나무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애쓴 흔적을 볼 수 있다. 조각을 잘 살피면, 우담바라 나무는 굵은 가지나 밑동 쪽에 마치 작고 납작한 양파가 매달린 듯한 열매(꽃)가 그려져 있다. 특히, 산치 탑의 남문 상인방 안쪽면에는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등 과거 사불四佛을 나무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깨달았던 각각의 나무로 그들을 대신하고 있다. 이 조각 속의 우담바라 나무도 그 특유의 열매가 나무 밑동과 굵은 가지에 달린 것을 볼 수 있다. 

우담바라에는 늘 꽃이 있었으나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열매로 보았을 뿐이다. 

사진 : 심재관,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에 표현된 거위 본생담의 한 장면.

 

거위

고대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날짐승이 있다면 그것은 거위일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에게 거위는 정신적인 자유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흰 거위 무리들이 호수를 떠날 때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집과 가정을 떠나는 수행자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따라서 거위는 고결한 방랑 수행자나 높은 정신세계의 상징이며, 수행자가 추구하는 초월적 세계를 상징한다. 이 거위를 산스크리트어로 항사Ham. sa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자신의 정신적 스승을 빗대어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ā가 왜 이 동물을 타고 다니는지는 분명해진다. 힌두교의 많은 신들이 특정 동물을 자신만의 수레로 삼아 타고 다니지만, 브라흐마는 자신이 신들의 사제司祭이며 동시에 고결한 초월적 세계의 거주자라는 것을 이 거위를 통해 드러낸다. 

이러한 거위의 이미지는 불교와 힌두교가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에서도 거위는 출가수행자나 깨달은 수행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불경에서 거위와 수행자를 동일시하는 대목은 빈번히 등장한다. 심지어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붓다고샤Buddhaghos.a는 거위의 날갯짓과 수행자의 선수행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대상의 표상(nimitta)을 점차 확장하는 삼매수행을 논하는 대목에서 이 수행을 거위의 날갯짓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고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어린 거위들이 날개가 자라나기 시작한 때부터 조금씩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작하고, 점차로 연습을 거듭해 마침내 달과 해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비구들도 앞에서 설명한 방법대로 표상의 대상을 제한한 뒤에 조금씩 확장하여 우주의 영역까지 확장하거나 또는 그를 넘어서까지 더 확장할 수 있다.”

붓다고샤는 다시 동일한 경전에서 선수행자를 거위의 왕이라고까지 추켜세우고 있다. “히말라야 치트라쿠타 산기슭의 깨끗한 일곱 호수에 머물기 좋아하는 황금 거위의 왕(rāja ham. sa)이 더러운 마을의 웅덩이에 가지 않는 것처럼, 선수행자(yogi)도 여러 세속적 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불교와 힌두교에서 반복해서 보여주는 거위와 수행자의 동일성은 불교 유물 속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부다가야(BodhGayā)에 있는 마하보디 사원에는 잘 알려졌다시피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리수가 있다. 그 보리수 아래의 자리를 금강좌金剛座라 부르는데, 그 깨달음의 자리를 기념해 기원전 3세기경쯤에 마련한 기단석이 아직 남아있다. 그런데 이 기단석에는 특이하게 거위와 팔메트가 장식되어 있다. 여기 새겨진 거위 조각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장소는 세속의 공간에 속하면서 동시에 초월적 깨달음의 세계로 열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거위는 이 두 공간을 가로지르는 상징적 동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이 상징은 아쇼카 대왕의 석주石柱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석주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우주목宇宙木과 같은 것인데, 이 기둥머리를 장식하는 사자상 바로 아래에는 똑같은 거위와 팔메트가 새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상징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뿐만이겠는가. 2세기경 카니쉬카 대왕의 사리기舍利器에는 불좌상 밑에 거위들이 날아가는 모습이 새겨졌는데, 이 거위들의 모습은 창천蒼天을 날아올라 초월적인 세계로 향하는 날갯짓이 더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출가수행자나 깨달은 자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거위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심재관
동국대학교에서 고대 인도의 의례와 신화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를 마쳤으며,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인도의 뿌라나 문헌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필사본과 금석문 연구를 포함해 인도 건축과 미술에도 관심을 확장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오스트리아, 파키스탄의 대학과 국제 필사본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인도 뿌네의 반다르카 동양학연구소 회원이기도 하다. 저서 및 역서로는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세계의 창조 신화』, 『세계의 영웅 신화』, 『힌두 사원』, 『인도 사본학 개론』 등이 있다. 금강대학교 HK 연구교수, 상지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동국대학교와 상지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심재관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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