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프랑스를 여행하다 파리의 노천카페에 앉아있는 소설가 윤대녕을 본 적이 있다. 그가 이상문학상을 받은 다음 해였다. 수상집 표지에 박힌 해쓱한 이상李箱의 사진과 쏙 빼닮은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자 그는 쑥스러운 듯 일어나 내 손을 받아주었다. 하얗고 작고 부드럽고 가냘픈 손이었다. 막상 악수를 하고 나니 어색해져 나는 가던 길을 갔고, 그는 다시 동료 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고 사소한 스침이었지만 내겐 기억할 만한 만남이었다. 당시 나는 문학과 작가를 동경하던 청년이었고, 그는 내 세상의 스타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러나 이후 20년이란 시간은 내 삶에서 그를 지워내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여름이 막 손톱을 드러낼 즈음 고창 선운사에 벽화를 보러 갔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휘감은 영산전에서 소 그림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불현듯 소설 제목 하나가 망각의 안개를 헤치고 툭 튀어나왔다.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집에 돌아와 윤대녕의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잦은 이사로 분실했는지,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 소설을 다시 읽은 것은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 학교도서관에는 책이 없었다. 다섯 권의 소장도서 가운데 한 권은 분실, 나머지 네 권은 대출 중. 예약대기자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학부수업 교재로 쓰는 모양이었다. 하릴없이 도서관 컴퓨터 검색창에 ‘윤대녕’을 치자 학위와 학술지를 포함해 100여 개가 넘는 논문목록이 쏟아졌다. 그가 정녕 한국문학계의 대가로 우뚝 선 것인지, 취업이 불가능해진 인문학 전공자들이 죄 대학원으로 도피한 탓인지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랬다. 나는 최초로 그 글이 실린 『문예중앙』을 찾아 1993년 가을호를 펼쳤다.
“십우도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을 뜻하는 그림이에요.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소에 비유해요. 십우는 심우尋牛, 즉 소를 찾아 나선다로 시작해요. 다음엔 견적見跡, 소의 자취를 보았다는 뜻예요. 견우見牛, 소를 보았다는 뜻이구요, 득우得牛, 소를 얻구요, 그 다음은 목우牧牛, 소를 길러요.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요…. 피리를 불며 흰 소를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그림이죠.”
아비의 죽음 후 출가해 사미니계를 받고 집에 들렀다가 양모養母가 내지른 “이년아, 여기가 네 법당이야!” 한마디에 환속한 ‘금영今映’. 금영은 소설의 화자인 ‘나’에게 청평사 극락보전에 그려진 십우도를 설명해준다. 금영이 십우도와 소에 집착을 하는 덴 이유가 있다. 금영의 생모는 금영이 다섯 살 때 소양강에 투신한다. 어머니에 대해 묻는 금영에게 아비는 “네 애미는 소가 되어 물속으로 갔다. 그뿐이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누구나 먼 것이 있어야만 산다.”라고 말하며 죽는다. 이후 금영은 소의 흔적을 찾아 청평사 주변을 떠돈다. 십우도에 대한 금영의 나머지 설명은 이렇다.
“그리고 다음 것은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를 잊고 자기만 존재해요. 인우구망人牛俱妄, 자기와 소를 다 잊어요. 반본환원返本還源, 본디 자리로 돌아가요. 입전수수入廛垂手, 마침내 궁극의 광명 자리에 드는 거예요. 결국 십우도는 마음을 찾고 얻는 순서와 얻은 뒤에 회향回向할 것을 말하고 있지요.”
현재 전해지는 십우도(十牛圖, 흔히 곽암의 십우도, 보명의 목우도라 부르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양자 간의 특징을 부각하기 위해 곽암의 십우도를 ‘심우도’, 보명의 십우도는 ‘목우도’라 썼다.)는 송나라 곽암廓庵 선사의 심우도尋牛圖와 보명普明 선사의 목우도牧牛圖다. 선 수행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그림과 게송으로 도해한 십우도는 북송과 남송시대에 꽤 유행했다. 소설에서 금영이 설명하는 십우도는 곽암의 심우도로, 보명의 목우도와는 각 단계의 명칭과 그림이 다르다. 곽암의 심우도가 소 찾는 이의 입장에서 시작한다면, 보명의 목우도는 소(마음)의 상태에 중점을 둔다. 곽암의 ‘견우’, ‘득우’, ‘목우’에 대응하는 보명의 ‘수제(受制, 제재를 받아들이다)’, ‘회수(廻首, 머리를 돌리다)’, ‘순복(馴伏, 복종하다)’ 등의 용어만 보아도 그렇다. 또 곽암의 심우도 가운데 소가 등장하는 그림은 네 장면에 불과하나, 보명의 목우도에서는 첫 번째 ‘미목未牧’에서 여덟 번째 ‘상망相忘’까지 꾸준히 소가 등장한다. 두 그림 간의 상이한 명칭과 도상이 선풍禪風의 차이에서 비롯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내 눈엔 그저 두 그림의 유사성만 크게 들어온다. 그림만 놓고 볼 때 곽암의 심우도는 ‘열 마리 소 그림’이라 부르기엔 민망하다. 그러나 첫 단계인 ‘심우尋牛’부터 여덟 번째 ‘인우구망人牛俱妄’까지 반복되는 ‘우牛’라는 글자를 놓쳐선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무신론無神論’이란 말이 왜 신의 존재를 완벽하게 부정할 수 없는지, ‘자아가 있는가’란 질문을 받은 붓다가 왜 ‘무아無我’라는 대답 대신 침묵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다.
선운사 소 그림은 영산전 동측면 출입문 위에 그려져 있다. 곽암 심우도의 여섯 번째 ‘기우귀가騎牛歸家’만 떼어내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그려낸 것이다. 아쉽게도 벽화 하단을 현판이 가로지르고 있어 전체가 온전히 보이지 않지만, 현판의 내용은 그것을 보상한다. 「선운사영산전성조시주록서禪雲寺靈山殿成造施主錄序」는 영산전이 1821년에 보수공사를 통해 조성되었고, 기우귀가도를 비롯한 내부의 다채로운 벽화들이 그 무렵 그려진 것임을 알려준다. 소를 탄 동자가 대금을 부는 모습은 얼핏 목가적 풍경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화가들도 소 타고 피리 부는 아이를 즐겨 그렸다. 김시, 최북, 정선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기우취적도騎牛吹笛圖에는 명리를 벗어난 목가적 이상향이 담겨있다. 그러나 선운사 벽화는 들여다볼수록 이국적이고 생경스럽다. 높다란 뿔과 비쩍 마른 몸을 지닌 흰 소는 인도印度에서나 마주칠 만한 형상이고, 무장武將의 복갑腹甲을 두른 것 같은 독특한 복식을 한 아이의 부리부리하고 또렷한 눈매도 시골 목동과는 거리가 있다.
아이는 소 등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다. 소와 비례가 맞지 않아서 아이가 소를 탔다기보다는 깔고 앉은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손에 든 대금도 구멍의 위치나 개수가 실제와 맞지 않는 데다 지나치게 길쭉해서 지팡이로 쓰기에 더 적합한 모양새다. 엉터리 운지법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주의 관점에선 실패한 그림이나 내겐 어설픈 구도가 신라 양지良志가 조각한 그 유명한 ‘녹유소조신장상’과 겹쳐 보인다. 불법수호 신장神將과 선불교의 수행이 무슨 상관일까 싶겠지만, 선가禪家에서 쓰는 ‘심검尋劍’이니 ‘취모리吹毛利’니 하는 말에서 무사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다. 먼저 형태상으로 악귀(생령좌)를 깔고 걸터앉은 소조상의 신장과 벽화 속 아이의 자세가 흡사할 뿐만 아니라 의미에서도 신장이 악귀(번뇌)를 굴복시킨 장면과 마음을 완전히 조복한 기우귀가가 조응하고 있다.
곽암의 ‘기우귀가’에 해당하는 보명의 여섯 번째 그림이 ‘무애無碍’라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보명의 ‘무애’는 아이가 언덕에 앉아 피리를 불고, 소는 언덕 아래에서 순하게 엎드려 있는 그림이다. 보명은 곽암과 다르게 소의 색깔로 수행의 진척을 드러낸다. 길들지 않은 시커먼 소의 몸통이 수행과 더불어 차츰 흰색으로 변하게 되는데, 소가 순백의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는 그림이 바로 ‘무애’다. 화사는 곽암의 심우도를 바탕으로 보명의 목우도에 나타나는 소의 색깔까지 더했음을 알 수 있다. 사정을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아이의 손에 쥔 대금이 번뇌의 뿌리까지 베어낸 취모리검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이의 휘날리는 옷자락과 엉성한 운지법은 걸림 없는 경지를 드러내기 위해 부러 그린 것 같기도 하다. 화사畫師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이의 목에 난 세 가닥 주름(三道)과 늘어진 귓불, 달처럼 원만한 얼굴, 넓고 반듯한 눈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어떤 이를 가리키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아이는 바로 깨달은 이, 즉 붓다를 상징한다. 화사는 여러 장치를 통해 자칫 목가적 풍경화로 주저앉을 그림을 선불교의 수행화로, 부처의 상호相好를 담은 불화로 건져 올리고 있다. 이 벽화가 근래 사찰에서 그려지는 이발소 풍의 십우도와 다르게 사람의 마음을 움켜쥐는 힘은 여기서 비롯한다.
“금요일에 청평사를 다녀올 참예요. 그런 담엔 어떻게든 살아볼 궁리를 해야겠죠…. 여태 소는 찾지 못했어요. 어디에도 소는 없었어요. 지금와선 그게 구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요. 아직도 내가 찾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게 말이죠.”
소설에서 금영은 화자인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사라진다. 실은 소라 해도 그르고, 마음이라 해도 맞지 않다. 금영은 영원히 소를 찾지 못할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애초에 잃은 것이 없으니 찾을 것도 없다. 하지만 번뇌에 제 한 몸 가누지 못하는 이가 쉬이 뱉을 말은 아니다. 삶이란 도달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에 자꾸만 들러붙는 발을 쉼 없이 떼어내는 일과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번 주말에는 청평사에 다녀오려 한다. 내가 찾는 소가 거기에 없으리란 걸 안다. 다만 어떻게든 살아볼 궁리를 하러 간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