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방랑기] 전북 완주 위봉사
상태바
[절집방랑기] 전북 완주 위봉사
  • 이광이
  • 승인 2017.09.28 14: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구, 비구니도 다 분별이라. 그 짐을 벗어야 강을 건너지.”
사진 : 최배문

들의 끝이 노랗다. 벼 끝도, 감 끝도 노랗고, 대추 끝은 붉다. 밤은 익어 벌어지고, 은행잎은 가에만 둥글게 물들었다. 저것이 감인지, 밤인지, 대추인지, 그것은 봐야 안다. 눈길이 맨 먼저 닿는 곳은 끝이다.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가 사물의 윤곽을 잡아준다. 제주도가 풍덩 빠져버릴 만한 거대한 호수 한가운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다인지, 호수인지, 강인지 알 수 없다. 가를 봐야 안다. 사물의 테두리, 끝부분, 가장자리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바닷가를 봐야 바다를 알고, 호숫가를 봐야 호수를 알고, 강가를 봐야 강을 안다. 눈길이 사물의 가에 닿아야 안다. 가 닿음,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은, ‘깨달음’의 어원을 ‘가닿음’으로 설명한다. 우리의 눈길이 잔의 끝에 가 닿을 때, 아 저것이 잔이구나 하고 깨닫는다. 깨달음은 대오견성도 깨달음이지만, 저것이 산봉우리이고, 무지개고, 이 사람이 나를 낳아준 어머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도 깨달음이다. 위봉사 가는 길에 아름다운 터널을 이룬 벚나무 고목의 잎이 지고, 들의 끝이 노랗게 변하는 것에 눈길이 가 닿아,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고 나는 깨달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가운데도 없고, 가생이도 없으니, 가 닿을 데가 없다. 그런 것은 위봉사 스님한테 물어봐야 한다.

 

추줄산崷崒山 위봉사威鳳寺, 한자가 어렵다. 추줄은 높고 험하다는 뜻이고, 위봉은 봉황이 절터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서쪽으로 너른 김제의 들을 지나, 이제 땅이 융기하여 노령지맥을 이루고, 북으로 백두대간에 가 닿는 장대한 산맥의 초입에 위봉사는 부처님 손바닥마냥 옴막하게 들어앉아 있다. 백제 무왕 5년(604) 서암 대사가 개창하여, 고려의 나옹, 조선의 석잠 대사가 중건 중수하고, 구한말에 31본산의 하나로 대가람을 이루었으나, 역시 한국전쟁의 난리를 피하지 못하고 절은 쇠락했다. 그 폐사 직전의 천년가람을 다시 일으킨 사람들이 현재의 주지 법중 스님을 비롯한 비구니스님 여섯이다.

1988년 당시 전라도에는 비구니 선원이 없었다. 그래서 전문 선원을 세우기로 발원하고, 고찰의 터, 물은 풍부하되 계곡이 없어 관광지가 아닌 곳, 바람이 잦아드는 땅을 찾다가 인연 따라 이곳 완주 위봉사로 들어온 것이라고 입승스님(立繩, 승은 노끈이다. 줄을 바르게 긋는 데 쓰는 먹줄, 즉 척도다. 선원의 기강을 맡은 소임이다. 스님은 법명을 알려주지 않았다.)이 말했다.

 

“여기, 풀이 사람 키를 넘는 폐허였지요. 한 3년을 땅에 붙어살았어요. 정진하고 공양하는 시간에만 여섯이 모이고, 뿔뿔이 흩어져 일만 했어요. 하루를 살더라도 평생 살 것처럼, 평생 살더라도 내일 떠날 것처럼, 그런 생각으로 살았지요. 일은 우리가 하고 뒤는 부처님이 봐주시는 거요. 뜻을 세워 일이 앞서니 돈은 뒤따라 오더라고요. 벌써 30년이 흘렀네요.”

그해 겨울 안거를 시작으로 여름 겨울 안거, 봄 가을 산철결제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지금은 안거마다 비구니스님 20여 명이 방부를 들이는 짱짱한 선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스듬히 가을빛이 드는 창밖은 정갈했다. 전쟁 통에도 살아남은 조선의 팔작지붕 보광명전(보물608호)이 고아한 멋을 풍기고, 비뚤비뚤한 5층 석탑, 품이 넓은 소나무 한 그루, 관음전, 나한전, 극락전, 위봉선원 같은 당우들, 옛것과 새것들이 오래전부터 함께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려 있다. 입승스님은 작고 단단하고, 맑고, 풀 먹인 삼베처럼 까슬까슬하고, 평생을 선방에서 보낸 선승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비구니스님 발원 중에 내생에는 비구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있지요? 불교에서 남녀는 어떻게 다른 건가요?”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