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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의 평화모니] 하루 짓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마라 一日不作 一日不食

‘백장청규百丈淸規’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백장은 중국 선불교 역사에서 이름난 분이다. 이 말, ‘하루 짓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마라’, 요즈음 내가 씹고 또 곱씹는 말이다. 말하자면 내 ‘화두’(話頭-말머리)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이다. 무서운 말이다. 왜냐고? 요새 나는 짓지 않는다. 밥도 짓지 않는다. 비럭질해서 산다. 빌어먹고 산다.

왜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 (왜 사느냐고 묻지 말기 바란다. ‘숨이 붙어 있으니까 목숨 이어간다.’는 들으나 마나 한 말 튀어나오기 십상이니까.) 무얼 먹는가? 밥을 먹는다. 무슨 밥인가? 쌀밥이다. (어렸을 때는 조밥을 먹었는데, 한창 굶주렸던 어릴 적에 줄창 먹어대던 것이라서 이제 신물이 나서 거들떠보기도 싫고, 한때 보리밥을 먹는 게 쌀농사 짓는 시골 사람들이 끼니를 때우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으므로 보릿고개 허덕허덕 넘으면서 풋바숨으로라도 감지덕지 먹고 살았노라는 이야기를 곁들이면 말이 끝없이 길어질 것 같아 이만 줄인다.) 그 쌀 어디서 났는가? (여러 말이 나올 것 같다. 이를테면 ‘C-8, 내가 쌀가게라도 턴 줄 알아? 내 돈 내고 사서 먹는다, 왜?’ 같은 욕지거리.) 여름지이(농사꾼)가 지은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다. 벼농사 짓는 사람이 있어서 (쌀)밥 먹고, 옷 짓는 사람이 있어서 옷 입고, 집 짓는 사람이 있어서 눈, 비 가리고 산다. 그러니 ‘노동자’, ‘농민’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기초살림’을 맡고 있다. 안 그런가?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 살려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이나 느낌 가져본 적이 있는가?

백장이 늙어빠졌을 때 (아마 내 나이쯤 되었겠지.), 함께 ‘울력運力’하던 젊은 것들이 ‘스님, 그만큼 했으면 됐슈. 이제 그만 쉬세유.’ 하는 뜻에서 어느 날 호미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러자 백장, ‘그렁게 이제 먹지도 말라는 거지?’ 웅얼거리면서 밥숟갈 내려놓았다고 한다. (아예 밥숟갈 놓았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말에서 이 말은 죽었다는 말로 쓰이므로) 따져보면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를 말이다. (덩달아 머릿속에 이런 말이 떠오를 테니까. ‘옷 짓기 싫어? 그러면 벌거벗고 살아.’ ‘집 짓기 싫어? 그러면 하늘을 지붕 삼고 살면 되지.’)

‘살림’(살게 하는 일) 맡겨 놓고 막상 살려 놓으니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친김에 짓밟기까지 한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이러고도 살기 바라는 게 지나치지 않은가? ‘더불어’, ‘함께’ 살자고?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인가? 머리로 짓는다고? 소가 웃을 소리다.

‘짓는다’는 말. 고운 우리말이다. 집 짓고, 옷 짓고, 밥 짓고, 독(질그릇 가운데 하나) 짓고, 웃음 짓고, 떼 짓고, 무리 짓고… . (‘참교육’을 이끄신 분으로 널리 알려진 이오덕 선생이 한때 ‘글짓기’라는 말은 쓴 적이 있다. 그때 이 분을 따르던 이 가운데 누군가가 ‘선생님, 이 말 바꿉시다. 이 말 ‘작문作文’을 옮긴 말이잖아요? ‘작문’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인데, 그 말 흉내 내서야 되겠어요? ‘글쓰기’가 맞는 말 같은데….’라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을 옳게 여긴 이오덕 선생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었고, 이제 교과서에서까지 ‘짓기’는 ‘쓰기’로 바뀌었다. 하기야 ‘말’이나 ‘글’에 ‘짓기’가 붙으면 뜨아한 생각이 듬직도 하다. ‘말을 지어낸다’는 ‘없는 말을 꾸며낸다’, ‘거짓말한다’로 ‘글을 짓는다’는 ‘겪어보지 않은 걸 거짓으로 그럴싸하게 글로 꾸며댄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백장 선사가 쓴 ‘짓는다’(作)는 말도 고운 뜻으로 쓰인 말이다.

문득 옛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외수 ‘작가作家’(이 분은 선거 때 박근혜 후보도, 또 누구누구도 찾아갔을 만큼 널리 알려진 이니까 모두 알겠지.)가 우스개 삼아 해준 이야기가 있다. 이 이가 춘천에 살 때 서울 나들이를 하려면 ‘화천검문소’를 거쳐야 했다고 한다. 그곳을 지키던 군인과 주고받았다는 말. ‘누구요?’ ‘글 쓰는 사람이요.’ ‘아하, ‘필경사筆耕士?’ (요즘에 이 말 아는 사람 드물 거다. ‘가리방지’에 철필로 남의 글을 베껴 쓰는 직업이 옛날에는 있었다.) 이 ‘유식’하고 ‘교양’있는 군인이 그른 말을 했거나 딴지를 걸었다고 여기면 안 된다. 본디 글은 ‘짓는’ 것이고, 글씨는 ‘쓰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일을 제멋대로 꾸며 쓰니까. ‘글짓기’가 나쁜 뜻을 지닌 말로 여겨질 뿐이다. 한때 ‘국민학교’마다 세워졌던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은 어느 기자가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라는 말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글로 바꾸어 ‘소설을 써서’ 생겨난 ‘헤프닝’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지 않은가? (하긴 초등학생이 아무리 일찍부터 ‘의식화 교육’을 받았다 한들 ‘공산당’이 뭐고 ‘자유당’이 뭐고 ‘민주당’이 뭔지를 어찌 제대로 알겠는가?)

‘짓는다’는 말에서 ‘짓’이라는 말도, ‘지이’라는 말도, ‘질’이라는 말도 나왔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몸짓, 손짓, 발짓, 눈짓, 미운 짓, 고운 짓, …. 바느질, 마름질, 손질, 물질, 물레질, …. (이 가운데 ‘질’이라는 말은 나쁜 뜻으로 쓰이는 때도 있는데, ‘눈깔질’, ‘발길질’, ‘주먹질’, ‘싸움박질’, ‘비럭질’ …. 따위가 그런 말이겠다. 아, 참, 요즈음에는 ‘갑질’이라는 말도 생겼지.)

곁길로 많이 샜다. 그래도 한마디 더. 아무리 고운 뜻을 지닌 말이라도 어떤 사람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게 되느냐에 따라 달갑잖게 쓰일 때가 있다. 서양에서 들어온, 여자를 높이는 뜻에서 쓰이던 ‘레이디’나 ‘마담’은 ‘다방’(찻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면서 ‘다방레지’나 ‘다방마담’으로 낮추어지고, 높은 벼슬아치의 어린 딸을 가리키던 ‘아가씨’는 그 아가씨가 술집에 나가면서 ‘술집아가씨’로 탈바꿈되지 않던가?

앞서 말했지만 ‘살림’은 ‘살리는 일’이다. ‘삶’이 ‘죽음’에 맞서는 말이듯이 ‘살림’은 ‘죽임’에 맞선다. 모든 ‘짓’과 ‘질’과 ‘지이’(아마 ‘짓+이’에서 나왔을 것이다.)는 삶과 살림에 맞닿아야 한다. ‘농사꾼’(여름지이)을 보기로 들어보자. 농사꾼은 농사를 지어 저 먹을 것만 챙기고, 한 울타리 안의 ‘식구’들만 먹이는 게 아니라 이웃과 나라를 살린다. 더 나아가 굶주린 이웃나라 사람들도 살린다. 어찌 그뿐이랴. 먹을거리가 되는 벼, 보리, 밀, 콩 같은 것도 이듬해 뿌릴 씨앗을 남겨 함께 살고 살린다. 보짱(백장)은 ‘선농일체禪農一體’를 부르짖고 몸 보인 분인데, 그 뜻은 ‘고루먹음’(平和)라 ‘두루살림’(共生)에 있었다고 본다.

서로 기대 함께 살 길을 찾지 않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기대기만 할 때 우리는 ‘기생’한다고 한다. 겨우살이 같은 기생식물, 회충이나 촌충 같은 기생충이 좋은 본보기다. 종교가 임금이나 나라 같은 큰 힘에 기대 그 종교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왕사王師’, ‘국사國師’ 따위의 벼슬을 얻어 겉치레를 꾸미면, 그 본을 떠서 그 졸개들도 덩달아 일손을 놓는다. 머리 굴려 살 길만 찾는다. 입고 다니는 옷만 봐도 안다. 옷 빛이야 잿빛이고 감물빛이지만, 그 옷 입고 몸 놀리고 손발 놀려 막일 할 수 없다. 말품 팔아 사는 벼슬아치들(그것도 옛 벼슬아치들) 옷차림이다. ‘입 닫고 몸 추스림’(黙言修行)은 노동자와 농민이 날마다 하는 일이다. 자라는 푸성귀나 영그는 낱알과 입으로 주고받을 말이 어디 있겠는가? 돌아가는 기계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힘센 이(권력자)가 믿는 이(종교인)를 꼬여 제 밑에 두고 부릴 때는 다 속셈이 있다. ‘너 내가 먹여 살리잖아? (이 말에는 ‘내가 힘없는 것들한테서 덤으로 빼앗아 온 것을 너에게도 나누어주는 거야’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게 옳은 말이라고 나팔 불어. 알았지?’ 이 말에 고분고분 따르면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주워 먹지 않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한마디만 잘못 내뱉으면 그 길로 죽은 목숨이다.

보짱이 ‘우리 힘으로 살고 남은 힘으로 절집 아래 사는 사람도 살리자’는 뜻을 세우고 ‘승가공동체’를 이루고 언저리에 힘없는 이들을 불러 이른바 ‘사하촌寺下村’을 꾸린 것은 ‘왕권’이 바뀌고 서릿발이 치던 때와 맞먹는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빈말로 그치지 않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몸놀림으로 살 길을 닦고, 살 길을 얻어야 하는지를 몸으로, 삶으로 보인 것이다.

덩치가 크다고, ‘종단’을 이루었다고, 인도나 중국에서 물려받은 ‘경전’이나 ‘수행’을 익힌다고 우리 불교가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덧다는 뱀발(蛇足).

‘사람들은 몇 안 되는 이들이 받드는 종교를 미신이라 부르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미신을 종교라고 이른다.’ 
- 라 로슈프코  La Rochefoucauld                                                                                                    

                                                                                                               

윤구병 철학자

윤구병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대학원을 나오고 월간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을 거쳐 충북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5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 ‘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해 20여 가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어린이 전문 출판사인 보리출판사를 설립해 많은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다. 

 

 

 

 

 

윤구병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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