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고려대장경연구소 종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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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인터뷰] 고려대장경연구소 종림 스님
  • 김성동
  • 승인 2017.08.0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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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향한 종림 스님의 불교와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들
사진 : 최배문

아침 공양이 끝나자 종림 스님(74)은 곧바로 깍두기 그릇 옆에 두었던 당뇨약 세 알을 입에 넣었다. 5년 전부터다. 주름진 얼굴과 마른 손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주위에서 ‘노장님’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1년 전 인사동 어느 골목길 밥집에서 만났던 그때보다 더 여위었다. 옆에 있던 중관학당 신상환 박사가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몇 달 전까지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놀라서 물으니 동국대학교에 고려대장경 전산화본(DB) 기증 및 활용 협약으로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지난 5월 25일 고려대장경연구소(이사장 종림 스님)는 23년의 전산화 결과물인 ‘고려대장경 데이터베이스(DB)’ 자료를 동국대에 기증했다.

팔만대장경(재조) DB (162,516판), 초조대장경 DB(2,040권, 약 6만 판), 돈황불교문헌 DB(341롤), 화엄석경 DB(13,000여 점) 등을 데이터베이스화한 것이다. 대장경을 공공재로 생각하고 공공의 활용을 바라며 전산화 사업을 추진해온 스님의 결정이었다. “한계가 온 거지. 전산화를 통해 ‘작품’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지. 대장경 전산화는 마무리가 됐고.”

- 작품이라면 어떤 것인가요?

“인터넷상에 가장 맞는 불교를 만들고 싶었지. 관념어 사전이지. 경전이 한 권 있으면, 주제어가 나오고, 인물도 나오고. 다른 경전의 주제와 인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있지. 또 하나는 용어집이지. 연기緣機라면, 연기는 어느 경전에 어느 정도로 나오고, 어떻게 사용됐는지 알 수 있지. 같은 용어라도 시대와 경전과 종파에 따라 변화되니까, 이것을 추적하고 싶었어.”

- 연구소가 그것을 수행하기는 어려웠던 것이군요.

“그렇지. 대장경 전산화를 인지과학과 연결하고 싶었어. 카이스트 교수들과 접촉해도 쉽지 않았어. (연구소가 담당하기에) 프로젝트가 너무 커. 이제는 종단이나 대학에서 할 수밖에 없어.”

- 만약 스님께서 말씀하신 관념어 사전이나 용어집 등이 나온다면 불교학뿐 아니라, 삶에 기반한 불교가 펼쳐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 우리 생각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는 장場이 될 수 있어. 내 생각이 불교의 어디쯤에 있는지, 이것을 어떻게 펼칠 수 있는지, 내 생각을 거기에 끼워 넣을 수 있지. 이게 내가 재밌어 하는 부분이야. 인력과 예산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지.”(웃음)

 

|    나는 나를 사막 한가운데 두었어

스물아홉에 출가했다. 도반들이 열 살쯤 아래였다. 나이 값하기에도 어중간했고, 기존 질서에 매끄럽게 편입하기도 불편한 나이였다. 해인사 강원을 거쳐 제방 선원에서 몇 년을 보냈다. 80년대 중반부터 해인사 편집실과 도서관장을 거치며 대장경 전산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장경 목록 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해인사를 나와 대흥사 선방에서 종묵, 본해, 보윤 등 7~8명의 스님들과 당시로는 파격적인 논강으로 『중론』과 『임제록』을 연찬했고, 매일 2시간씩 농사 울력을 이어나갔다. 기존 선원의 풍토를 개선하려는 다양한 시험이었다. 

- 1년 후 선방을 나왔는데, 그 이유가 “더는 앉아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도사’라는 꿈이 있었지. 지금은 쳐다보는 점이 없어졌어. 그러니까 다 밑바닥에서 기고 있어. 그때는 목탁 두드리면서도 ‘선방에 도 닦으러 가야지.’ 하는 그런 마음, ‘도인道人이 있다면 찾아가봐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 버릴 것 다 버리고 출가했는데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야. 그래서 선방에 갔어. 묵언도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도 하고 해볼 건 거의 다했지.(웃음) 나는 내 갈등을 해소하려고 갔어. 선방을 나온 것은 내 갈등이 더 이상 내 문제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갈등이 해결은 아니지만, 해소는 된 것 같았지.” 

- 갈등은 뭐였고 어떻게 해소된 것이죠? 

“내가 탑을 똑바로 쌓아도 바닥이 삐딱하면 출렁거렸어. 나는 나를 사막 한가운데 두었어. 동서남북도, 길도 없어. 거기에 나를 둔 것이 편했지. 나를 똑바로 세우기보다 바닥이 평평해지게 되었어. 그러니까 이제 나를 어디에 갖다놔도 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나를 똑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닥이 평평해진 것이지. 그 전에는 나를 세우려고 고민하고 갈등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 가도 나를 세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선방을 나왔지. 주변에서는 계속 선방에 있으면 조실도 할 수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아쉬워했지. 나는 수좌 소릴 듣지 못했어. 다른 방법으로 했으니까.”

- 아까 예전 수행자들은 어떤 점을 보면서 정진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선을 종지로 하는 것도 정화 이후인데, 그만큼 종지를 세우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닌데, 지금은 그것마저 사라져서…. 그런 꿈, 점, 이런 것을 주어야 하는데, 이게 없으면 풀어갈 길이 없을 것 같은데….”  

 - 왜 그렇게 되었다고 보시나요? 스님 때는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이전에는 불교 논쟁도 불교 내부 논쟁이었지. 지금은 철학, 종교 등이 다 불교 내부에 들어왔고. 이전에는 불교 안에서만 이야기했지. 지금은 테두리가 없어졌어. 기독교나 공산주의 등에도 답을 해야 하고. 전에는 답을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지금은 들어올 것이 다 들어왔으니 살아남는 것이 살아남겠지. 물론 그때도 답을 했지만, 그때 답이 지금의 답이 될 수는 없지.”

- 지금은 왜 답을 할 수 없게 됐죠?

“아, 고민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뭐.(웃음)”

서울 광화문에 있는 ‘중앙전산학원’을 출입했다. 80년대 말이었다. 대장경 전산화를 위해 혹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당시는 전산이 대부분 계산용이지, 인문학용으로 쓸 수 있을지는 잘 몰랐다. 90년대 초반 당시 유행했던 비판불교를 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나조노대학 연구원이었지만 스님은 “1년 동안 놀았다.”고 했다. 당시 일본은 전산으로 한문을 6천 자까지 사용하였다. 이를 눈여겨봤고 한자인식 프로그램을 갖고 해인사로 돌아왔다. 이 프로그램으로 해인사 대장경을 하나하나 입력하면서 93년 고려대장경연구소를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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