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에 봉은사 주지 내려놓았던 광덕스님
상태바
말 한마디에 봉은사 주지 내려놓았던 광덕스님
  • 서재영
  • 승인 2017.07.31 17:22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광연구원] 불광운동 구술사 : 흥교스님께 듣는 광덕스님 이야기

불광운동 구술사 : 흥교스님께 듣는 광덕스님 이야기

흥교 스님

 구술자 : 흥교 스님(전 대각회 이사장)
- 영상촬영 : 최동순(불교구술사연구소)
- 정리 및 윤문 : 서재영(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Ⅰ. 광덕 스님 전집에 빠진 내용들
Ⅱ. 문화에 해박하고 시문에 뛰어나셨던 광덕 스님
Ⅲ. 인재를 육성하고, 자비를 베푼 봉은사 시절
Ⅳ. 계행과 보살행을 강조하신 광덕 스님
Ⅴ. 본사 주지보다 국민의 정신세계가 더 중요하다
Ⅵ. 삼학을 두루 겸비한 대 선지식
Ⅶ. 승가정신의 모범을 보인 광덕 스님
Ⅷ. 직위와 명예 버리고 대중포교에 전념하다

본 구술사 녹취록은 제2불광운동의 일환으로 불광연구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불광운동 구술사 녹취사업의 성과를 정리한 것입니다. 지난 11호에 이어 두 번째 순서로 오랫동안 광덕 스님을 곁 에서 모셨던 서해(瑞海) 흥교(興敎)스님의 구술 내용을 정리하여 수록합니다. 흥교 스님은 제13대 대각회 이사장, 선찰대본산 범어사 주지와 전계대화상을 역임하셨습니다. 본 구술 녹취는 2016년 6월 10일 경남 창원시 소재 불모산 성주사에 진행되었으며, 대담자는 불광연구원의 서재영 책임연구원과 정헌열 연구원이 맡았습니다. 제한된 지면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광덕 스님과 불광운동을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하고, 윤문했음을 밝힙니다.

 

Ⅰ. 광덕 스님 전집에 빠진 내용들

광덕 스님

정헌열 : 스님 안녕하세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책은 《불광》 지령 500호 기념으로 창간호를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기념이 될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흥교스님 : 아, 창간호네. 이거 지견이가 한 거야. 지견이가 글을 잘 써. 광덕 스님 시봉 중에서 글을 제일 잘 써. 이번에 사명대사 12권인가 완간했지. 그동안에도 많이 썼어.

정헌열 : 먼저 스님께서 광덕 스님을 어디서 처음 만나셨고, 그때 느낌은 어떠하셨는지요?

흥교스님 : 처음 만난 것은 우리 동산 스님 49재 때였어. 재를 마치고 내가 걸망을 지고 범어사 보제루 앞에 서 있었지. 그런데 광덕 스님이  “너 어디로 가노?”하고 묻더라고. 그 때 내가 강진 만덕사에 있었거든. 그곳에서 동산 스님 시봉을 했으니까. 그러다 스님께서 돌아가시니까 “너 어디로 가냐?” 그렇게 내게 물은 거야. “저는 갈 데가 없어요.”하고 내가 답하니까 “나한테 와라.” 그러시더라고.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서 봉은사에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갔지. 그 뒤로 쭉 광덕 스님을 의지해서 살았지.

정헌열 : 아, 그럼 정말 오랫동안 함께 하신거로 군요?

흥교스님 : 그렇지. 그런데 광덕 스님 전집을 보니까 제자들이 쭉 있는데 외국인 제자 하나가 빠졌더라고. 캐리 올슨이라고 범어사 선방에서 머리 깎고 한 1년, 2년 있었을 거야. 독일 사람인데 범어사 있으면서 해인사에 왔다 갔다 했거든. 그리고 30년 전 쯤에 광덕 스님에게 내가 물었어. “스님, 캐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독일에서 대학 교수하고 있어.” 그래. 그때 사미계도 받고 머리도 깎고 그랬어. 그것이 40년 전 일이니까 그때는 감히 외국인이 와서 중된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던 때야. 그때는 숭산 스님 같은 분들도 아직 외국으로 나가기 전이야. 그때 광덕 스님이 이 양반하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러다가 캐리 올슨이 중요한 거 물어보면 해인사로 보내. 그럼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하고 둘이 앉아서 또 이야기를 했지. 성철 스님이 영어를 잘해요. 광덕 스님보다 훨씬 나아. 나도 모르는데 들어보면. 그러면 캐리 올슨이 질문을 하고 그러면서 한 세 시간, 네 시간 앉아서 하는 거야 둘이서. 그러다가 “아! 그럼됐다.” 그렇게 서로 웃고 그러시고 그랬지. 당시 범어사 선방에는 다 한국 사람이고, 외국인은 혼자 앉아 있으니까 외톨이가 되는 거야. 그래서 광덕 스님이 안 되겠다 하시면서 “네가 사상을 알았으니까 서양에 가서 홍포를 해라.” 그렇게 독일로 보낸 거야. 한국 사람이 외국 스님을 만들어서 제자 한 것이 광덕 스님이 첫 번 째야. 다른 사람은 없었어.

정헌열 : 그분이 광덕스님하고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알고 계세요?

흥교스님 : 그때 삼우스님이 데리고 왔어. 삼우라고 지금 미국에 있지. 우리 동산 스님 상좌야. 삼우가 미국서 들어오면 광덕스님한테 찾아 가고 그랬거든. 하여튼 어떻게 들어왔는 지 과정은 자세히는 몰라. 성철 스님이 나한테 장난말로 그랬어. “흥교”, “예” 그러면 “너 이누마를 데리고 왔냐 모시고 왔냐?” 그래. 아 데리고 오지 모시고 왔겠어? 웃으면서 “예 예,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는 대구에서 해인사까지 포장도 안 되었을 때야. 부산에서 대구 까지 가서 다시 해인사로 가야 했지. 그러다보면 오후 3시, 4시가 돼서 야도착해. 그렇게 가면 캐리하고 앉아서 계속 얘기 하시고, 나는 뒷방에서 앉아 있었지. 그런데 그 캐리가 부처님 사상이나 선에 대한 것을 성철 스님 하고 더 많이 대화를 했어. 그리고 광덕 스님이 범어사에 계실 때 기장에 있는 죽도라는 섬에서 수행했어. 거기서 1년인가 2년인가 열심히 정진하셨지. 55년도 56년도 그때쯤 일거야. 내가 절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야.

정헌열 : 어떻게 정진 하셨는지 소문을 들으셨어요?

흥교스님 : 아주 피눈물 나게 했지. 배가 고파서 미역을 뜯어먹기도 하고. 그걸 고산 스님이 했나? 범어사에서 양식도 갖다 주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죽도에서 고생하셨던 그런 부분은 전집에 빠졌더라고. 약 2년간 아주 고생하셨어. 그건 창봉 스님이 잘 알아. 내가 평소에 스님을 보는 인상은 항상 책이 손에 있다는 거지. 책을 항상 쥐고 계셨어. 뭘 하시든 보면 일본 경전이야.

정헌열 : 일본어로 된 경전이요?

흥교스님 : 일본 경전이 많이 있었어.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보는 사람이 없었지. 자료가 무궁무진하셨지. 그리고 『생명의 실상』같은 건 전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할 거야. 그러니까 나는 고개가 팍 숙여지지. 항상 책을 들고 계시는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지. 철학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내가 스님한테 지척에서 본 철학책은 간디의 『진리의 실현』이야. 함석헌 선생이 번역한 책이야. 그런 책들을 많이 보시곤 하셨지. 행원스님이나 능가 스님이나 일타 스님이나 이런 분들이 책 보는 건 못 봤거든. 그런데  광덕스님은 항상 책을 읽고 계셨어. 내 첫 인상이 그래. 책을 항상 가깝게 한다는 거. 그리고 죽도에서 공부 하신 부분이 『광덕 스님 전집』에는 안나와. 그 다음 선방은 범어사 청풍당에 가면 늘 앉아계시고, 생활하신거야. 55년, 56년, 57년도 때는 소천 스님하고 같이 하셨지. 광덕 스님이 출가한 해가 54년도인가 53년도 인가 그래. 머리 깎고 출가하는 데도 소천 스님 사상을 받았어. 우리 동산스님 사상을 받은 게 아니야. 법문할 때 봐 봐. 보통 소천 스님 이야기야. 소천 스님 영정을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 고 있었잖아. 소천 스님한테 많이 받은 거야 광덕 스님은. 그래서 소천 스님 영향으로 머리도 깎게 되었을 거야 아마.

정헌열 : 기록에는 출가연도가 55년으로 되어 있어요.

흥교스님 : 그래 되었을거야. 그때 소천스님하고 부산시내에 큰 부잣집 사랑방들 있잖아. 거기에 동네 사람들 모아가지고 『금강경』 강의 했어. 그건 아주 유명한 이야기야. 광복동이나 서면이나 이런데 다니면서 하셨지. 또 밖으로 나가서 강의하고 그런 것은 해군사관학교 법회를 한 10여 년 이상 했을 거야. 그 다음에 부산에 있는 해양대학교도 하셨지. 해양대학교 출신이나 해군사관학교 출신 중에 광덕 스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때는. 그 때 소천 스님은 대부분 『금강경』이었어. 동래구나 온천장이나 서면이나 어디나 이런 데 큰 부잣집에 다니면서 사랑방이나 마당에 멍석을 펴기도 해서 하고 그랬지. 그러니 첫 포교가 53, 4년도 그때쯤이야. 그때 활동하셨던 것은 책에 안 나오더라고. 또 해군사관학교나 해양대 학교얘기도 안나오고. 그리고 또 범어사 교육 관계는 금정중학교 이사를 오래 하셨지. 아마 해동중학교도 있을 거야. 100일 기도를 두 번인가 했을 거야 아마. 함안 장춘사(長春寺)에서 하신 것으로 알아. 그리고 여기 성주사도 하셨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게 두 번 했었어. 서울로 올라가시기 전이지.

정헌열 : 백일기도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셔서 하셨던 건가요?

흥교스님 : 신심으로 하신 거지. 그리고 지금 경주 동국대학교 있지? 그 땅을 광덕 스님이 터도 보고, 터 보러 갈 때 나하고 같이 갔지. 이사 하실 때 동국대 경주캠퍼스 터도 보시러갔어. 나하고 둘이서 동양고속 타고 아침에 갔는데 오후 2시인가 내렸거든. 가서 “흥교, 너는 이 터가 어떻노?”하고물으셔. 내가 “스님이 더 잘 아시지요.”그랬지. 그때는 개울이 컸고 다리도 없었어. 지금은 다리가 있잖아? 그거 넘어가지고 한낮 2시간 이렇게 돌아다니고, 산 위에 가서 내려다보기도 하고. 그때는 전부 논이었어. 그걸 사시고 나중에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그 때 그 땅, 싸게 샀어.” 그랬어. 그때 3만원씩 줬는데 지금 한 삼 백만원씩 가지. 그거 광덕스님이 한거야. 그 때 한 5만평 샀는데, 지금은 10만평 넘지. 인터뷰하러 온다고 하길래 내가 전집에 없는 것만 추려서 대강 메모를 해 놨어. 그러니까 지금 책에 없는 것만 쭉 이야기 하는 거야. 그 때 학교에 연락해 보면 몇 년도인지 나오지. 그 때 밤에 오니까 뭐 11시 넘 었더라.

정헌열 : 아, 그럼 하루에 당일로 갔다 오신 거예요?

흥교스님 : 당일로 갔다 왔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둘이 라면 하나씩 사먹고 그리 다녔어. 그리고 66년인가, 70년도인가? 범어사 주지로, 그 때 산중에서 추대를 했거든? 근데 안하셨어. 추대받고도 안갔어. 그러니까 해인사 주지 추대 받고, 성철 스님과 되게 싸우고 그랬어. 추대 받고 그 다음에 범어사 주지 한 번 추대 받고 그랬는데 안 하셨어. 범어사 내에는 산중에 보면 좀 복잡하거든. ‘그거 싫어! 나는 포교만 할란다’ 그래 가지고 강남에 가서 터보고. 그 때도 내가 강남에 가서 터 볼 때 그 호숫가에 큰비석 (주: 삼전도비)이 있었어.

서재영 : 지금도 그 비석이 있습니다.

흥교스님 : 그 비석이 우리 왕이 중국 누구한테 무릎 꿇었다는 비석이라고 스님이 그 때 나한테 소개해줬어. “이거 눈물나오는 거야.” 그러시더라고. 그래 뭐냐 그러니깐 중국 사신한테 우리나라 왕이 남한산성에 서 잡혀 와서 무릎을 꿇은 자리다 여기가. 그러니까 나라 없으면 그래 된다고 그 말씀을 그 때 하시더라고. 그래서 비석 있었던 것을 기억해. 터보고 “이거 어떠냐?” 그러셨지. 옛날에는 비석 있는 호숫가에로 낚시꾼들이 쫘악 앉아 있었어.

서재영 : 터를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까?

흥교스님 : 아, 우선 돈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불광》이 나온 후 거든. 《불광》이 나올 때 처음에 일했던 친구들이 어떤 친구들이었느냐면 여기다가 이렇게 두르고 (주: 어깨띠 두르는 몸짓). ‘불광 창간’ 이렇게 쓰고, 전차 안에서 책을 팔고 다녔어. 이걸(불광 잡지를 가리킴) 홍보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50명, 60명 모여가지고 몇 호선, 몇 호선 해가며 다 녔지. 그 때는 1호선하고 2호선 밖에 없을 거야 아마. 그 사람들은 지금도 가면 있더라고. 그땐 청년 들었는데 지금은 영감이 되어 있더라고.

서재영 : 혜과거사 이런 분들 이신가요?

흥교스님 : 혜과도 그리했어. 혜과가 스님 녹음을 많이 했는데. 그 논문이 심지법문(心地法門)이거든. 한 20년이상 심지법문을 범어사에서 1년에 한 번씩했어. 근데 그 녹음된 것이 지금 없어요. 스님의전집에도 그 법문이 하나도 안 실렸어. 그 내가 지홍 스님한테 물어봤지. “심지법문 이하나도 안 들었는데, 이거 어찌된 거냐?” 그러니까 “나도 모릅니다.” 그래. 내가 “창봉이한테 물어봐.” 그랬더니 창봉이도 모른다는 거야. 창봉이하고 혜과하고 같이 녹음을 했단 말이야. 그 때 나는 스님은 노란 옷 입고 위에 앉아있고 나는 밑에서 갈마하고 그랬지.

서재영 : 누가 갖고 있을 지 짐작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흥교스님 : 현재 심지법문은 없어. 내가 제일 먼저 생각나서 메모를 해 놨지. 인터뷰하러 온다고 그러길래. 범어사 시절, 또 봉은사 시절 뭐 이 런 것들 중에 책에 없는 것들만 내가 메모해 놨어. 그 다음에 심지법문 을찾아야될거야. 창봉이 하고 나하고 연락을 해도 내가 물었거든.

서재영 : 창봉스님은 누구신가요?

흥교스님 : 지금 호주에 있어 창봉 스님이. 그 분이 소천 스님 큰 상좌 야. 광덕스님은 그냥 소천 스님이 부처님이야.

서재영:유품에도소천스님사진이있더라고요?

흥교 스님: 평생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 머리맡에 소천 스님 모시고 있었어. 소천 스님 자료가 전부 호주에있어. 차로 다 실어갔어. 창봉 스님이 다 실어갔어. 내가 지금 만나려고 그러거든. “우리 박물관에 주라.” 거기 있는 책들이 옛날 고서들이 많고 그러니까. 그렇게 하려고 해. 그렇게 안하려면 불광에다 주든지. 불광 기념관에다 주면 좋지 않으냐고 만나서 이야기할라고 그래. 소천 스님하고 광덕 스님하고 부산시내 동네마다 다니면서 남의 마당에다가 멍석 펴놓고 포교하던 그건 당시에는 있을 수 없던 일이야. 50 몇 년도일아니야? 그 이야기를 창봉 스님한테 더 자세히 들을 수있어. 광덕스님 전집에 없는 것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

 

Ⅱ. 문화에 해박하고 시문에 뛰어나셨던 광덕 스님

흥교스님 : 그리고 범종 있잖아 큰 종. 범종에 대한 논문이 안나왔더라고 책에. 범종에 대해서 광덕 스님이 논문을 썼어. 조계사 앞에 가면 성종사(聖鐘社)라고 있어. 그 성종사에 가서 책 한 권 달라 그러면 돼. 이라고 나와. 거기에 누가 나오냐면 광덕 스님하고 황수영 박사하고 서울공대에 학장했던 엄(주: 엄영하)교수님이있어. 그리고 백제불교 연구원 사람 있는데 네 논문이 거기 나와. 근데 광덕 스님 논문이 제일 잘 나왔어. 범어사 종에 대한 논문을 광덕 스님이 썼어. 그 논문이 굉장히 잘 썼어. 웬만한 법문이나 강의하러 가면 내가 그거 조금씩 발췌해 가지고 가고 그랬어.

정헌열 : 범종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가지신 이유가 있나요?

흥교스님 : 그때 범어사 종을 새로 만들었어. 그래서 대학교수들하고 학자들 전부 모아놓고 세미나를 몇 번 했지. 원광식(주: 국가중요무형문 화재 제112호) 씨가 성종사 사장인데 종 만들 때 그 사람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혔어. 자기집에 1년 동안 가지도 못했지. 마누라가 와서 밥해주고 그랬어

서재영 : 그때 광덕스님께서 범어사 무슨 소임을 맡고 계셨나요?

흥교스님 : 총무원 소임을 맡았었지. 그래도 범어사가 본사니까 그리 했어. 이런 건 다 숨어 있는 이야기야. 지금도 범어사 종신에 삥 둘러서 새겨진 글을 보면 아주 쉽고 잘 썼거든. 그걸 광덕스님이 쓴 거야. 종신 (鐘身)에 쓴 거 전부다 광덕 스님 글이야. 문양도 마찬가지야. 그 문양은 그때 동대교수가 그리고 지시는 광덕스님이 했어. 그 다음에 범어사에 가면 범어사 사가(寺歌)가 있어. 광덕 스님이 그 사가의 작사를 하셨지. 그 노래를 요즘은 안 불러서 내가 이번에 법문 하면서 한 마디 했어. 한 2천 명 왔더라고. 앉아가지고 “왜 행사 때 사가를 안 부르냐?” 광덕 스님이 그 때 그 한참 찬불가에 대해서 관심가질 때거든. 범어사에 그 사가가 한 권도 없더라고.

서재영 : 찬불가운동에 관심 갖기 시작한 시초에 그거를 쓰셨단 말 이죠?

흥교스님 : 찬불가에 먼저 관심 가진 것은 용성 스님이지. 대각사에서 막 풍금 연주할 때. 그 풍금 내가 가지고 있었어. 그 때 선방에 돌아다닐 때 와 보니까 누가 그새 가져가고 없더라고. 그 풍금을 나는 만졌어. 옛날 바람 불어서 이렇게 (주: 풍금 페달 밟는 손동작) 했잖아? 세운상가 가서 고치고 그랬어 내가.

서재영 : 광덕 스님께서도 연주하셨습니까?  

흥교스님 : 스님이 나한테 “이거야?” 그랬어. 내가 “예.” 그랬지. 대각사 법당에서 많이 했어. 광덕스님도 노래 잘하시거든. 가곡을 흥얼거리기를 잘해. 그리고 웬만한 외국 연주자들이 시민회관에 공연오면 나 데리고 다니시면서 참관하고 그랬어. 아이작 스턴(주: 1971.9.21. 시민회관에서 열린 아이작ㆍ스턴트리오 공연인듯)이니 뭐니 전부 와서 그때 나도 가고 그랬어. 그런데 그 노래를 그만 두게 된 사연이 있어. 봉은사에 있을 때 눈이 많이 왔어. 눈이 1m 이상이 오니까 소나무 가지가 이렇게 꺾어지잖아. 그걸 설해목(雪害木)이라고 그래. 그 설해목이 한 5차 쯤 돼. 큰 도라쿠 (truck)에 싣고 마장동에 있는 제재소로 실어갔단 말이야. 근데 나보고 그 돈을 받아오라고 했어. 봄이 됐을 때야 그건. 그 돈 받아가지고 나오다가 마장동에서 쳐다보니까 기원이 있더라고. 그 기원에 가서 바둑 두다보니까 저녁 7시가 넘었어. 오전 9시에 간 놈이. 집에선 돈받으러갔는데 안 돌아오니 애타게 기다리지. 돈이 또 걸망으로 한 가득이여. 걸망은 옆에 의자에 놔두고, 내가 바둑에 미쳤을 때야. 그랬는데 택시를 타고 강나루로 가니까 뚝섬 가는 배가 끊어졌어. 옛날엔 유원지니까 배를 하나 끌고 한 2km 쯤 올라갔어. 강을 타고 저기까지 가야 되니까. 근데 나는 그 때 바지를 벗고 걸망을 지고, 걸망 위에다 새끼로다가 감았지. 돈이니까. 배를 타고 건너다가 한 2km 가는데 뭐 사람이 밭둑에 서있더라고.

서재영 : 뚝섬 지났는데?  

흥교스님 : 반 이상 건넜지. 나는 이것이 만약에 없어지면 그냥 헤엄치고, 나 헤엄 잘하니까. 그냥 돈만 쥐고 인자 넘어갈 작정이었지. 아랫도리 벗고 빤스만 입고 그냥 넘어갈라 했는데 그 때 그쪽에서 “흥교냐?” 그러더라고. 그래서 “예, 접니다!” 그랬지. 그러니까 그 양익(兩翼) 스님(주: 선무도의 대가, 2006년 5월 6일 입적)이라고 유명하잖아. 양익 스님하고 몇 사람이 뛰어와서 내 배를 갖고 그 언덕으로 끌고갔지. 거기서부터 집에 다 갈 때까지 말을 안 해 광덕 스님이. 큰방에 가서 딱 꿇어 앉았는데 25~26명이나 있는데서 “밥은 먹었냐?” 그게 첫마디야. “안 먹었습니다.” 그때 봉은사에서 아침에 죽먹었는데, 아침 먹고가서 점심 굶고, 저녁 굶고, 바둑 두었어. 바둑에 미쳐가지고. 밥 다 먹고나니까 양익 스님이 광덕 스님한테 와가지고 “스님, 돈은 하나도 없이 그대로 다 맞습니다.” 이래된거야. 나는 그때야 ‘아, 돈은 맞는가보다’ 그랬지. 얼마 주는지도 모르고 걸망에다 한 짐지고 갔으니까. 그때스님은 총무부장 하셨을 땐데 스님은 말을 안해. 딱 옆에 염주놓으면서 “3천배 끝내!” 그러시더라고. 근데 반도 못하고 법당에서 자버렸어. 너무 피곤하니까. 보살들하고 스님들이 나만 보면 피식피식 웃더라고. 그래서 ‘스님 어디 갔냐’고 그러니까 ‘스님 출근하셨다’고 그래. 저녁에 오시더니 대중 앞에 나를 꿇어 앉혀놓고“앞으로 바둑 두지않을 것, 음악 듣지않을 것.” 그래서 내가 판도 다 없애버렸어.

서재영 : 봉은사에서 음악을 들으셨군요?

흥교스님 : 조금 있었지. 예를 들면 그 때 뭐 외국서 선물로 들어온 거 같은 거 몇 개 있었구만. 한 50~60장 있었던 거 다 없애 버렸어. 기계도 없애버리고, 그 뒤로는 바둑 안 두었어. 그 뒤로 나보고 음악 들으러가 자고 말을 안 해. 자기도 듣지도 않고, 라디오도 안 듣고 그렇게 평생 살았어.

서재영 : 아무튼 광덕 스님이 문화에 대한 식견이 높으셨군요?

흥교 스님 : 높은 정도가 아니야. 시도 즉흥으로 하잖아. 이야기 할라고 안 했는데 그 우리 스님 석영첩(주: 〈동산대종사석영첩(東山大宗師錫影帖)〉, 1967년)이 나왔어. 그 때 당시 1만 명이상 국제시장이고 중앙시장 이고 다 문 닫았잖아 장례식 날. 대한민국에 있는 스님들 다 오시고. 근데 그 때 마이크를  잡고 염불을 지휘하면서 즉흥시로 쓰는 것이그 석영 첩안에 있어.

개발이전의 강남 봉은사

Ⅲ. 인재를 육성하고, 자비를 베푼 봉은사 시절

서재영 : 석영첩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흥교스님 : 스님 서고에 보면 마포로 껍데기 되게 되어 있을 거야. 그 안에 있는그 시들, 그리고 오열 하는 거, 이런 것들 그 때 걸어가면서 그냥 다 하시 는거야.

정헌열 : 광덕 스님께서 그 때 말씀하셨던 거를 녹취해가지고 했군요?

흥교스님 : 녹취해가지고 동산대종사 그대로 한 거야. 그걸 찾아보면 그 안에 좋은 글이 많이 있어. 걸어가면서 어떻게 그렇게 시를 읊을 수 있냐 말이야. 문학에 대해서는 뭐 대단 하신 분이야. 그러니까 내가 그렇잖아. 법정 스님하고 또 일타 스님하고 몇 사람 앉아서 뭐 이야기 할 때 광덕 스님 이야기하면 내가 그런 이야길 했지. “법정 스님 이야기는 보면 여고 3학년이 들으면 참 좋은 이야기라고.” 그 말에 법정 스님이 싱글싱글 웃더라고. 그러고 “광덕 스님 이야기는 그 알맹이만 해놓으니까 말이야 모르는 놈 모르고, 아는 놈 알고 그런다.”고 내가 그랬어. 그러니까 일타 스님이 “너 잘 봤어.” 그러 더라고.

서재영 : 지금도 광덕 스님 글 좋아서 열심히 탐독하는 분들이 많습 니다.

흥교스님 : 많이 있지. 이런것도(주: 월간 불광 창간호 가리킴) 그런거아 니야? 법문할 때 보면 나도 이런 것은 전부 녹취를 보고 하거든? 좋은 글이 많아. 불광 만들 때는 스님이 그냥 앉아서 이렇게 말만 하면 밑에서 묘법성이 받아 적는거야. 김선근 교수 부인이지.

서재영 : 이번에 공로상 받으셨습니다.

흥교스님 : 그래? 시집가고는 한 번도 못 봤어. 근데 막 적잖아. 그러면 그거 그대로 인쇄 들어가는 거야. 인쇄는 누가 했냐면 신흥인쇄소에서 했지. 신흥인쇄소는 그 때 종로 3가에서 명함 찍고 청첩장 찍던 곳이야. 광덕 스님이 제일 먼저 동산 스님 석영첩의 인쇄를 맡겨 봤어. 그 다음에 명성여고 인쇄물을 다 줬어. 그 다음에 동대 것을 줬어. 그래 가지고 다음에 정부 것을 수주하면서 커진 거야.

서재영 : 저희는 큰 인쇄소가 광덕 스님의 문서포교를 후원한 줄 알았습니다.

흥교스님 : 그렇지 않아. 언젠가 내가 대각사 있을 때 신흥인쇄소 박충일 회장님이 왔더라고. 그래서 “어째왔냐?”고 물으니까 손자를 처음 봐서 손주이름 지으러 왔다는 거야. 내가 “박 사장말이야 광덕스님 생각 할 때 광덕스님 기념관 하나 지어줄 만 하잖아.” 그 이야길했어. 그러니 . “아이 스님이 지어라면 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사람이 인연이 있고 또 대접할 거 있으면 대접해야지 그러면 되겠어?” 내가 그랬어.

서재영 : 그 분이 신심이 있으셨나봅니다. 스님께 일을 맡기신 것을 보 면요?

흥교스님 : 그러니까 나한테 온 거야. 나는 “왜 나한테 왔냐?” 그러니 까 “스님이안 계시니까 스님 대신할 스님이, 스님밖에 더 없지않습니까?” 그래서 온 거야. 그래가지고 그 손주 이름을 내가 지어줬어. 지금 도부인은 불광 다닌다고 그래. 그때 내가 그 이야길했는데 “스님 기념관 하나 지어줄만 하잖아 왜 그래? 그 아꼈다가 뭐할라고? 그게 뭐 몇 백 억이나 든다고.” 내가 그래 버렸어. 그러니까 “아이 죄송하다”고, “스 님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해야되는데”그러더라고.

서재영 : 스님께서 좀 더 빨리 뵈셔야 했군요?

흥교스님 : 지금까지 있었으면 내가 한마디 했지. 그러면 다만 얼마라 도 해줬을 거야. 내가 보니까 돈 나올 만한 데가 두 군데뿐이더라고. 한 곳은 대한불교진흥원이야. 진흥원만든 사람이 구도부 사람들 아니야? 동국대학교를 비롯해 15명 전부 광덕스님이 가르친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이 전부 현재 진흥원 이사로 있어. 한 사람도 안 빠지고 다 같이 이사야.

서재영 : 봉은사있던 구도부 출신 말씀이군요?

흥교스님 : 구도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천하통일한 사람이야. 지금 현재 재산이 1조에 가깝지.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이 구도부 출신 사람 들이야. 나한텐 한 번씩 와. 내가 정릉에 있을 때 몇 번 왔더라고. “뭐 도 와드릴 거 없냐?”고 물어. “필요 없어. 불광에 지금 불사하는데 그거나 가봐라.” 내가 그렇게 말하고 그랬지. 그랬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그것도 대접을 안 했다고 하더라고. 그 뒤로 내가 그이들 한테 뭐라고 했지. “옛날에 코 흘릴 때 생각해. 현재 지홍 스님이 혼자 얼마나 고생하냐? 좀 도와줘라.” 내가 그 이야길 했지. 그니까 “법인이 돼서 뭣이 어쩠네.” 그러더라고. 이용부니 전창렬이니 전부 봉은사 구도부 출신들이야. 구도부에서 차관급들이 7~8명이 나왔잖아. 다들 광덕 스님 제자들이지. 광덕 스님 한테 전부 계 받고, 수련하고. 그런 사람들인데 지금은 벌써 다들 영감 이 됐지. 두 사람은 나한테 머리 깎았어. 지환 스님하고 지홍 스님이 나 한테 보냈더라고. 한 사람은 내무부 차관을 지낸 사람이고, 한 사람은 권교수라고 대학원장을 지냈어. 정년퇴직하고 나한테 와서“스님 머리 깎을랍니다.”해서 내가 머리를 깎아줬지. 근데 그 사람들이 이번에 다 이사로 들어갔어.

서재영: 진흥원은 동국제강 회장님이 내놓은 재산으로 설립되었 지요?  

흥교 스님: 동국제강 잘 알지. 그 때 창설할 때도 내가 잘 알거든. 동국제강 장경호 거사가 돈을 쌓아가지고 그 때 방위성금 낸 거 아니겠어.  대통령한테 딱 가져가니까 대통령이 “장 사장! 당신 불교 믿지?” 그러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가지고 불교를 위해서 한번 써 봐.” 그랬어. 그 때 한 30억인가 됐을 거야. 그래서 만든 것이 진흥원이야. 그거 설립하고 얼마 안 있다가 방송국 건물 짓고, 전국에 부동산 샀어. 그 게 지금 1조 가까이 되는 거야. 1년에 포교비로 몇 백 억씩 써요. 군부대에 많이 쓰거든. 그 장 사장하고 나하고 잘 알지 부산 사람이니까. 그 돈을 부산서 가지고 올라왔어.

서재영 : 그거 설립 할 때 광덕스님도 연관이 있었습니까?

흥교스님 : 광덕 스님은 그런 데 간섭 안 했어. 광덕 스님은 돈 근처에 안 간 사람이야. 딱 광덕 스님 두 가지야. 여자 근처에 안 가고, 돈 근처 에 안 가. 그건 뭐 내가 평생 동안 배웠어. 스님 곁에 있으면서 나는 그 사람 사는 모습을 배운 거지 다른 거 없었어. 그러니까 스님은 자기를 위해서는 단돈 몇푼도 써보지도 못한 사람이야. 내가 그걸 알아. 광덕스님이 봉은사 주지할 때 그밑에 보육원이 있었잖아. 그거 사실 광덕스님 운영하다시피 많이 해줬어. 그래서 거기 보육원 출신들이 많아. 스님들도 있고, 보살들도 있고. 그게 봉은사 명성암(明成庵) 밑에 있었어. 절옆에 나란히있었지. 절에서 운영했으니까.

서재영: 그래서 쌀을 꿔주고 주고 받고 하셨군요?

흥교 스님: 그렇지 주고 받고 그랬지. 행정적으로는 그래 되지. 그리고 그때 이용부 부인이었던 구경자 선생이 관리 운영을 맡아 했어. 그분은 지금 돌아가셨어. 그리고 지금 코엑스앞에 있는 땅 30만평 전체가 우리 땅이었어. 내가 그 땅의 곡수를 받으러 다녔어.

서재영 : 곡수 받는다니요?

흥교스님 : 추수하고 나면 반반 나누잖아. 내가 30프로 받아오고, 농사 짓는 사람 70프로 주고 그랬어. 옛날에는 반 했는데 광덕 스님이 다 받지 말고 30프로만 받으라고 그랬어. 옛날에는 인자 논 열 마지기 하면 은 보통 땅 주인하고 반씩 딱 갈라오거든. 근데 광덕 스님은 “30프로만 받아라.”그러셨어.

정헌열: 농사짓 던분들은 굉장히 고마워했겠네요?

흥교 스님: 고마운 정도가 아니야. 할배였지. 스님이 지나가면 들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 그랬어. 정화불사로 봉은사에 들어간 뒤에도 광덕 스님은 대처승 아들한테 장학금도 주고 그랬어. 그 분들 아들 대학 보낸 것도 내가 알고 있어.

서재영: 광덕스님은 정화에 앞장서셨는데도 그런 일도 하셨군요?

흥교 스님: 뒤에서는 그런 일도 하고 그랬지. 봉은사 앞마을에 집이 한 30여 채 있었어. 그곳에 대처승들이 살았지. 근데 그곳에 살던 대처승 아들들의 장학금을 다 줬어. 그리고 대처승들이 환갑이 되고 그러잖 아? 그러면 나한테 정종 한 병 사오라고 그래. 정종을 사가면 거기다가 ‘송수(松壽)’라고 써서 내게 “이거 갖다 드려라.”고 해. 그러니까 대처승이라고 외면하지 않고 그냥 같이 안고 살았어.

정헌열: 그럼 갈등이나 이런 것은 없었군요?

흥교 스님: 그런 거 전혀 없었어. 내가 스님 모시고 재판하러 재판소에는 많이 갔지. 재판소에 조사 받으러 들어가는 거 보면 스님이 그러거든. “내가 두 시간 후에 안 나오면 황 판사한테 전화해라.” 그래. 그러면 내가 정문에서 기다리다가 두 시간 넘으면 황 판사한테 전화하고 했지. 그때 광덕 스님 따르는 황 판사라는 분이 있었어. 그러면 황 판사가 와서 데려가고 그랬어. 그 황 판사 아들이 동대교수인가 그랬어. 그리고 선릉 있잖아? 그 능 옆땅도 다 우리(불교)땅이었지. 거기가 몇 km로 되지 아마. 그 때 선릉 위에 보면 기독교 여자고등학교가 하나 있었어. 그것도 우리 땅이었어. 그거 때문에 내가 가서 곡수 받아오고 그 랬거든. 반만 받아오고 그랬지.

정헌열 : 어떻게 절땅에 기독교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나요?

흥교스님 : 그 때는 정화하기 전 대처승 시절이니까 대처승들이 임대를 줘서 그랬지. 그때는 그게 땅도 아니었어. 요새니까 몇 백만 원씩 하 지 그때는 몇 백 원도 안 갔어. 코엑스 앞에 지금 몇 십만 평 땅이 있잖아. 그게 ‘승과평(僧科坪)’이야. 승과고시를 거기서 봤어. 승과고시를 볼 때 들판에다 하얀 광목으로 둘러치고 그 안에서 밥도 먹고 생활 했지. 봉은사 경내가 좁아서 몇 천 명이 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승과평이라 그래. 승과평야라는 뜻이지. 우리로서는 코엑스앞 쪽 30만 평 전체가 역사적인 곳이고, 성지나 다 름없어. 문정황후가 직접 와가지고 참석 하셨거든. 그 때 서산대사니 사명대사니 많은 큰스님들이 다거기서 승과고시에 합격한 분들이야.

정헌열 : 그 땅 매매되고 나서 광덕 스님께서 굉장히 상심하셨다고 하 더군요?

흥교스님 : 많이 우셨지. 통곡하는 건 내가 옆방에 있으니까 알지. “흥교, 니가 크고, 니가 종단의 일을 할 때가 되면 이 일을 후회할 거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님 셋이서 그 땅을 다 팔았어. 어떤 스님은 그 땅 판 돈가지고 미국으로 도망가고 그랬지.

서재영 : 봉은사스님이 주지하실때 수행에 철저하셨다면서요?

흥교 스님: ‘청정막방일(淸淨莫放逸)’이라는 말씀이 있어. 방일하지 말라는 내용인데, 그것을 기둥마다 써 붙여 놓았어. 꼼짝도 못하고 모두 아침에 마당 쓸러 나갔지. 대불련 학생들(구도부)도 다 나오는 거야. 학 생들다나오고, 우리 다 나가고 그러면 한 40명되니까 금방 다쓸어. 김 선근 교수가 잘 알거야. 김 교수가 뚱뚱해가지고 잠이 많았거든. 내가 빗자루를 들고 가서 문을 막 쓸고 그러면 벌떡 일어나서 나오고 그랬 어. 그 때 봉은사 스님들이 한 20명 됐고, 대불련 학생들도 한 20명 되었 어. 우리가 논이 많으니까 그 논에서 보통 한 백석 이상 들어오잖아. 그러면 1년먹어. 다른데다 주기도 하고.

정헌열 : 근데 당시 봉은사가 가난한 절이었다고 하더군요?

흥교스님 : 정화할 때는 가난했지. 정화하고 나서는 땅을 우리가 다시 관리할 때는 괜찮았어. 대처승들 욕하느라고 하는 건데. 그 정화 때는 다그러는거지뭐.

서재영 : 봉은사에서 보육원도 운영을 하고, 대처승 자녀들 장학금도 주고, 실질적인 사회복지사업을 하신거나 다름 없군요?

흥교 스님: 그 때 다 하셨지. 스님은 자비스럽잖아. 자비스러우니까 감정이런건없어. 대의적으로 그러신거지.

정헌열 : 당시에 교통도 불편했는데 어떻게 총무원까지 출퇴근을 하셨어요?

흥교스님 : 아침 6시에 출발하지. 그렇게 출발하면 총무원까지 2시간 걸려. 그때는 배로 건너 다녔지. 겨울에는 상관없어. 한강이 얼어 붙잖아. 그럼 바로 건너가는거야. 하지만 여름에는 일찍이 와서 배타야 했지.

정헌열 : 광덕스님은 또 몸이 약하셨잖아요?

흥교스님 : 대각사 와서 많이 안 좋았지. 근데 봉은사에 있을 때는 그렇게 많이 안 아팠어. 그러니까 스님 상좌가 다섯 있었는데 봉은사에 있을 때는 딱 한 사람이 있었어. 지정 스님이 그 때 시중을 들었지. 그 중에 한 사람은 문인이었는데 글도 잘 썼지. 누가 보고 와서 말하는데 그 양반은 후에 대구에서 우체국장하더라고 해. 하나는 군대 갔다가 아마 군종 제1기생일 텐데, 제대해서 바로 나갔지. 내가 대각사에 들어 갈 때 사무장으로 원서를 넣었더라고. 그러고 또 광덕 스님 밑에 있다 대각사 사무장으로 다시 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다 광덕 스님 사람이야.

 

Ⅳ. 계행과 보살행을 강조하신 광덕 스님

서재영 : 광덕 스님이랑 같이 봉은사에 계시면서 얽힌 일화는 어떤 것 이있나요? 흥교 스님: 나는 광덕 스님 의지해서 마음 씀씀이나 중노릇을 배웠어. 내 호가 ‘서해’야. 상서로울 서, 바다해 ‘서해(瑞海)’거든. 그게 광덕 스님 이 지어주신 거야. 광덕 스님은 내 사형인데, 내가 여러 동생 중에서 가장 임의(任意)롭고, 제일 오래 시봉을 했으니까 가까웠지.

정헌열 : 법호 내리실 때 어떤 말씀하셨어요?

흥교스님 : 아주간단해. 하루는 광덕 스님한테 편지가 하나왔어. 뜯어 보니까 다른 말 없어. ‘니 법호는 서해다.’그거뿐이야.

정헌열 : 그거 받고 어떻게 하셨어요?

흥교스님 :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내 책상에 넣어놨지. 친필로 다 써 보냈어. 그것도 사인펜으로 착착 써서 보냈어. 스님 글씨가 아주 악필 이라 얼른 봐서는 잘 몰라. 나중에 만나 가지고 “스님, 잘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그렇게살아.”그러더라고. 오고 간말이 그뿐이야.

서재영 : 광덕 스님께서는 출가자들에게 주로 어떤 것을 강조하셨 나요?

흥교스님 : 계행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어. 상좌들도 전부 그것만 이 야기하지. 계행 철저히 해라, 계행 철저히 해라. 우리한테도 그러고. 근데 요새 뭐 말 잘듣는 사람이 있나?

서재영 : 계행을 강조하셨던 것은 당시에 정화불사 와중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겠죠?

흥교 스님: 정화 때 많이 느꼈지. 대처승들 전부 자식들 있는 거 보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 그 많은 재판 다 보고 그러니까 이건 아니다 그것 이었지.

서재영: 250계나 되는데 그 가운데 특별히 강조하신 부분이 있나요?

흥교 스님: 딱 하나 있지. 여자 조심해라. 그 양반 평생 죽을 때 까지 그 렇게했어.

서재영 : 그와 관련된 일화라도 있으신가요?

흥교스님 : 옛날에는 뭐 한방에 앉아서 이야기도 안 할라 했어. 옛날에는여자랑 같은 자리에도 앉지 않았어. 동국대학교 이영자 교수라고있지? 그 교수가 천태학을 했는데, 유학 갔다 와서 광덕 스님을 찾아와서 질문하고 대답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그러는 거야. 그 교수가 스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거든. 그런데 대각사에 찾아와서 문답하면서 빨리 가면 좋은데 안 가는 거야. 그때 문답을 하실 적에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 추운데 마루에 앉아서 하시는 거야. 내가 그런걸다 보고 컸어요. 대단하신 분이야.

서재영 : 방문을 열어 놓고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방에 안 들어가 셨군요?

흥교스님 : 안 들어가고 마루에 앉아서 이야기하셨지.  옛날 대각가 방사가 이렇게 기역자로 되어 있었어. (종이에 당시 방사 구조를 그린다) 여기가 대문이고, 그 다음에 뒤에 또 집이 있고, 여기가 광덕 스님방, 여기가 능가 스님 방, 여기 주지 효경 스님 방, 그리고 여기가 마루일 거야. 여기 대문옆 마루에 앉아서 이야기 허셨지. 다른 교수도 자꾸 와서 스님한테 물어가고 했지. 스님처럼 박식하게 아는 사람은 스님밖에 없으니까. 능가 스님은 『법화경』을 하셨어. 근데 우리 광덕 스님은 다방면으로 많이 알아요. 그 때 당시에 영어도 하고 일어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요.

서재영 : 광덕 스님 세미나 할 때 이영자 교수께서 오셔서 광덕 스님께서 『법화경』에도 밝으셨다고 하셨어요.

흥교스님 : 그랬을거야. 본인이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이영자교수, 송석구 등 광덕 스님에게 배운 사람이 많아요. 그때는 스님께서 송석구 교수 보고도 “야, 그것도 몰라?” 그렇게 야단치고 하셨지. 그런 사람들 은 광덕스님이  아파도 앉아서다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그랬어. 그러니까 광덕 스님은 보살, 그 때 당시 우리는 보살이라고 그러거든.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서 사는 거. 광덕 스님은 보살을 그렇게 표현해. ‘자기를 버려야 보살이된다, 나를 버리고 일체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보살이다.’ 딱 법상에 가면 그래 이야기하거든. 아주 핵심적으로 이야기하지. ‘나를 버리고 일체 중생을 따르라. 그것이 보살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광덕 스님 법문도 들어보면 가장 알아듣기 쉽게, 가장 골수로 하셔.

서재영 : 그렇게 달변이시더라고요.

흥교스님 : 말을 빨리하면 또 뭔 말인지도 몰라. 그래 굉장히 말을 잘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어디에 무슨 조문(弔問)을 가든가 뭘 하던지 그러잖아? 그럼 즉흥에서 글을 써내는 것은 아주 대단하셔. 시는 물론이고 즉흥적으로 글 쓰는 것은 광덕 스님 따라올 사람이 없어. 조사(弔詞)같은거, 또 행사때는아주 잘 써요.

서재영 : 녹음을 들어보면 청산유수로 말씀하시는데, 그냥 머릿속에 나오는거였군요?

흥교스님 : 그냥 나오는 거예요. 절대 보고 법문하는 법이 없어. 그냥 즉흥으로 하셔. 그러니까 이런 책(불광) 쓸 때도“적어라.”하시고는 자기는 말만 하거든. 그러면 교정도 안 보고 바로 인쇄소에 들어가요. 이게 들어갈 때 교정 본 일이 없어요, 바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인쇄소에서 보더니 아따 이렇게 쓸 수도 있냐고 박충일 사장이 나한테 물어. 박충일사장이 광덕 스님 찾아 다닐 때는 종로3가에서 자전차를  타고 봉은사에까지 왔어. 밥을 양푼으로 하나를 먹어요. 내가 부엌에 가서 “박사장이 오셨는데 밥 차려라. ”그러면 거기서 두 번 더 제가 담아가지고 갖다 줘요. 그거 다 자시고 한 두숨 자고 또 가시고 그랬어요.

성철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광덕스님

 

Ⅴ. 본사 주지보다 국민의 정신세계가 더 중요하다

서재영 : 광덕스님하면 무엇보다 전법이라고 생각됩니다.

흥교스님 : 광덕 스님이 불교의 큰 물줄기를 돌려놨다고 표현하면 돼요. 불교가 산중에만 머물러 있었어. 대중으로 나온 것이 광덕 스님으로 해서 나온 거야. 민중불교, 가정불교, 사회불교 이런 거 전부 다 광덕 스님 때문에 생긴 말이야. 지금은 포교당 없는 데가 별로 없는데, 그게 다 광덕 스님이 효시가 된 거지. 성철 스님하고 다툰 것도 이거 때문이야.

서재영 : 두분이 다투신적이 있나요?

흥교 스님: 광덕 스님은 “주지안 한다” 하고, 성철 스님은 해인사 주지를 맡으라고 그랬지. 두 분이 한 두어 시간 앉아서 자그락거리더라고. 그러니까 “형님 전 못 하겠습니다.”, “못 하기는 왜 못 해? 니가 이걸 해야 앞으로 방장도 하고, 조실도 하고, 한 산중거느려. 거느려야 할거아니야!”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 국민의 정신 세계입니다.” 이렇게 나가는 거야. 그래 난 옆에 가만히 있다가 잠 들었지. 일어나 보면 여전히 둘이 이야기 하는거야. 마지막으로 성철스님이 그러시는 거야. “니가 안하려면 추천이라도 하나 해라.” 그래서 도광 스님이하게 되고, 성수 스님이하게 된 거야. 해인사 주지 자리를 광덕스님이 두 차례 추천받았지. 지정 스님이 강원에 있을 때인데 스님이 지정 스님한테 갔거든. 강원 에 있었을 때 그 밑에 마을까지 차타는 곳까지 따라 나온 거야. 내려오는데 지정 스님한테 그러더라고 “강원에서 졸업하면 선방에 가거라.” 그러니까 지정 스님이 “선원하고 강원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그게 다 부처님 법이지요.” 이렇게 이야기 했어. 그 소리를 듣고 스님이 아주 기분나빴어. 시키는대로 안한다고 말이야.

서재영 : 성철 스님은 철저하게 산중에서 수행하셨고, 광덕 스님은 대 중교화를 위해 밖에 나오셔서 활동하셨는데 두 분의 생각이 달랐군요?

흥교스님 : 광덕 스님은 한국불교역사를 고치는 거고, 성철 스님은 전통불교를 주장하시는 거고. 그래도 그걸 다 이해하시는 거야. 그러니까 대학도 만들자, 승가대학도 하자 이런 거 다 했잖아. 승가대학 기초를 성철 스님하고 했잖아. 그 자료를 전부 광덕 스님이 해다 준 거야. 얼마 전에도 누가 나한테 말했어. 광덕스님한테서 자료가 나온거라고.

서재영 : 광덕 스님께서 성철 스님과 다른 방향으로 가시게 되는 계기 가있었을까요?

흥교스님 : 광덕 스님이 나와서 보니까 기독교하고 우리하고 하늘과 땅 차이거든. 지금도 마찬가지야. 교세가 팔분의 일 아니야? 교육이나 사회활동이나 복지나 정치나 경제나 전부 팔분의 일 밖에 안 돼요. 엊그 저께 통계가 나왔는데 그래. 광덕 스님은 그런 걸 미리 다 보고 있었던 거예요. 이래가지고는 불교 없어진다. 지금도 촌에는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은 사람을 못 구해서 농사를 못 지어. 이런 현실을 일찍 내다보신 거지.

서재영 : 소천 스님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측면에서 영향을받으셨는지요?

흥교스님 : 소천 스님의 국가관이지. 독립운동 하시고 청산리 싸움에도 참석하시고, 또 중국에서 대단하셨거든. 국가관에서는 광덕스님이 전부 다 이어받은 거야. 나라가 먼저다, 나라가 없으면 무슨 종교냐? 지 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사람들이 자기종교 자기집안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없잖아.

서재영 : 『금강경』운동을 같이 하셨죠?

흥교스님 : 당시 우리나라에서 『금강경』 강의를 제일 잘 한 분이 소천 스님, 백성욱 박사 두 분이었어. 백성욱 박사는 독일에서 유학하셨을 거야. 근데 우리 스님은 전문으로 종교학을 안 했잖아. 그 사람은 종교 학을 전문으로 했고.

서재영 : 백성욱 박사님의 흐름은 ‘금강경독송회’로 계승되고, 소천 스님의 흐름은 광덕스님을 거쳐 불광에서 계승하고 있군요?

흥교스님 : 다른 스님들은 참선해가지고 도통 한다는 이야기만 하지 국가관이나 이런 건 없잖아. 소천 스님은 자기가 청산리 싸움 같은 거, 또 2차 세계대전 같은 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니까 나라가 중요하단 걸알아. 광덕스님께서 그 강의에 많은 감동을 받았어.

서재영 : 동산 큰스님 한테는 수행관 이런 영향을 받으셨죠?

흥교스님 : 그렇지. 동산 큰스님밑에 기라성같은 상좌들이 네분이 있어. 성철 스님, 지효 스님, 광덕 스님, 능가 스님이지. 거기서 제일 현실 적으로 사는 분이 광덕스님이야. 능가 스님은 동경대 나와서 학문적으로 훌륭하지만 중간에 나갔다 돌아온 것 때문에 광덕스님에게 밀렸지. 지효 스님도 정진으로는 최고였지만 성철 스님한테 밀렸어. 그래서 광덕스님하고 성철스님은 빛을 봤지만 두 분이 빛을 못봤지.

서재영 : 동산 스님, 소천 스님, 용성 스님 이 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으 셨군요?

흥교스님 : 광덕스님이 그분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

 

Ⅵ. 삼학을 두루 겸비한 대 선지식

서재영 : 교학적으로 광덕 스님께서 어떤 경전에 영향을 받으셨다고 보시는지요?

흥교 스님: 제일 감동받은 경전은 『금강경』 아닌가 싶어. 소천 스님한테받았으니까. 다른 경전을 안 본 건 아무것도 없이다 봤어. 그것도 일본말로 된 신수대장경을 다 봤어. 평생 책 들고 있는 모습밖에 눈에 안 띄어. 『생명의 실상』(주: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 저, 총 40권)이라는 일본 원전이 있어.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그 원전이 광덕 스님한테 있을거야. 광덕스님이 나한테도 한질보냈지.

서재영 : 『생명의 실상』을 처음 접하신지가 언제신가요?

흥교스님 : 내가 한 35, 6세쯤 됐을 땐데 지금 내가 75세야. 《불광》창간 하기 전이지. 스님은 그 전부터 그걸 다 보셨고, 그밖에도 좋은 책은 많 이봤어. 철학서적은 어지간한 거 안 본것이 없어. 스님께서 존경하던 대학 스승이 계셨어. 한관섭 교수라고 봉은사에 있을 때 한 번씩 찾아오고 그랬어. 그 어른이 오시면 “광덕아!” 그렇게 불렀어. 위 아래 옷을 하얗게 입고 수염을 기르고 잘 생겼지. 그럼 광덕 스님이 나더러 “삼배해” 그래. 내가 속인한테 삼배했어. 스님이 허라니까 하는 거야. 그 교수님이 추천서를 써서 광덕 스님이 범어사 오게 됐지.

서재영 : 광덕 스님께서 정화운동에 동참하셨던 계기는 어떤 것이 었나요?

흥교스님 : 오세창 스님이 동산 스님이 큰 아버진가 그럴 거야 아마. 외가 형님 동생이야. 그런데 동산 스님이 청와대 들어갈 때 제지를 당 거든. 그래서 못 가고 그냥 자기 형수씨 집인가? 거기 가서 쉬고 있었 지. 그때 오세창 스님 부인이 동산 스님한테 “왜 그렇게 한숨을 쉬고 계시냐? 무슨 걱정이있으시냐?”고 물었어. 그래 청와대 들어가려다가 못 들어 간 것을 말했지. 그러니까 “아, 막내하고 같이 들어가세요. 이승만 박사의 비서실장 아십니까?” 이래 된 거야.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 바로 왔다갔다 했어. 그때부터 정화가 시작된거야.

서재영 : 동산스님이 불을 지피신거네요?

흥교스님 : 그렇지. 정화를 동산 스님이 시작하고, 대통령 담화 발표한 것도 원고써서 주면 그대로 발표하고 그랬지.

정헌열 : 대통령의 담화문을 동산스님께서 쓰신 건가요?

흥교스님 : 동산스님이 아마 쓴걸로 생각해. 우리는 눈으로 보지않았지만. 그러니까 정화의 시초는 역시 동산 스님이야. 그 때 종정으로 계 셨거든. 그리고 오세창 스님의 아들 때문에 청와대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어. 그 분은 동산스님의 조카였지.

서재영 : 정화의 필요성을 동산스님께서 청와대에 요청한 거 였군요?

흥교스님 : 그렇지. 그걸 받아들여 유시가 나오고, 그래가지고 전쟁이 일어난거지.

서재영 : 소천스님은 정화에서 어떤 입장이셨는지요?

흥교스님 : 정화에는 참석을 많이 안했어요. 정화를 별로 않으시고, 중국서 언제 나오셨는지 모르겠어. 소천스님이 고집도 세고 보통 외곬수가 아니야. 한 번 한다면 끝나는 거야. 예를 들면 인천 보각사가 소천스님 살던 절이거든. 근데 그 절 밑에다가 누가 한 5천 평땅을 준 거야. 그 게 삼일중고등학교야. 그 땅을 줬는데 조계종에서 정화하느라고 그 땅을 팔았어. 소천 스님은 그걸 가지고 시비를 한 거야. “왜 팔았냐?” 그래 서 몇 몇 사람이 감옥에 가게 됐어. 그걸 중간에서 푼 사람이 광덕 스님 이야.

정헌열 : 그래도 관계는 계속 유지가 되신건가요?

흥교 스님: 소천 스님도 광덕스님밖에 모르고, 광덕스님도 소천 스님 밖에 몰라. 동산 스님 찾아다닌 것 보다 광덕 스님이 소천 스님 찾아다닌게더많아.

서재영 : 오랫동안 광덕스님을 지켜보시면서 출가자로서 광덕스님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흥교스님 : 광덕 스님은 그대로 성자지. 자기를 위해서 뭐 이만큼도 뭐 한 일이없어. 남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살았지, 자기 위해서 산 거 없어. 그러니까 지금은 보살이라고 그러잖아. ‘보살은 자기를 버리고 일체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을 보살이라 그런다.’  광덕 스님이 입에 서나온이야기야.

서재영 : 오늘날 출가자들은 광덕스님의  어떤 면을 본받아야 할까요?

흥교스님 : 보살행이지. 지금 다 광덕스님은 대부분이다 보살로 알잖아. 지금 보면 광덕 스님만큼 행한 사람도 없어. 계행 철저하지, 생각 바르지 그 이상 뭐있어?

서재영 : 계정혜 삼학을 두루 겸비하셨군요?

흥교스님 : 그랬지. 나는 동산 스님한테 출가했어도 중노릇은 광덕 스님한테배웠어.

서재영 : 그 중노릇의 내용이 어떤 걸까요?

흥교스님 : 일상생활을 그대로 배운 거야. 중노릇이 다른 게 있겠어? 율사가 보면 계율 이야기 하는 거고, 참선한 사람이 보면 화두이야기 하는거야. 생각 생각이 다다르지. 뭐라고 정의를 내릴 순 없어.

서재영 : 출가자내에서 광덕스님에 대한 평가는 많지 않지 않습니까?  

흥교 스님 : 참선한 사람이 중이고, 참선 안하고 다른 거 하는 사람은 중 취급을 잘못받는 시대지. 며칠 전에 중돼가지고 선방에 한 두어 철나고 와서 돈오(頓悟)라 해 쌌고, 평생 보살행한 사람은 쳐다도 안 보고 그래. 뭐가 잘못된거야.

서재영 : 수행과 행이 겸비돼야 하지요.

흥교스님 : 겸비돼야지. 그러니까 우리가 볼 때는 우습지. 범어사에 처 음 출가하셨을 때 동산 스님으로부터 화두도 받으시고, 기장 앞바다에서 고생할 때야. 죽도인가 무슨 섬이있는데 거기서 생사를 걸고 한 2년 동안 정진했어. 그 때 공부한 내용을 본 사람이 고산 스님이랑 몇 몇 스 님들이계셔. 그 스님들한테 들은 이야긴데 대단히 고생하며 열심히 정진했다고 그래. 그곳에는 사람이 없으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때로는 미역 같은 것을 건져 먹기도 하고 그랬다고 해. 사람들이 양식도 갖다 주기도 하고 그랬다고 해. 나한테도 “내가 죽도에 있을 때 공부 제대로 했어!”라고 자주 말씀했지.

서재영 : 그때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흥교스님 : 참선했지. 참선한거야.

서재영 : 본인은 간화선하셨는데 불광사에서는 바라밀염송을 가르치셨는데 간화선이 어렵다고 생각해서그러신걸까요?

흥교 스님: 쉬운 거부터, 만질 수 있는 거부터 해야지. 먼 데 있는 거 보이지않는 거 그거 백날이야기하면 뭐하겠어? 만질 수 있는 거, 눈에 보이는 거, 요즘 사람들에게는 그게 중요한 거야. 하늘에 있는 거, 보이지 않는 거, 그걸 이야기해서 뭐 어떻게 알겠어? 환상이지. 환상이라는 스님의 법문이 있더라고.

서재영 : 스님께서 쓰신 비문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에있나요?

흥교스님 : 부산은 한 몇 군데 있어. 무불 스님 행적비기 있을 거야. 그 러고 또 대성암 상량문이 있어. 비문하고 상량문 하고 전부 수집해야 돼. 신문에 광고 한 번 내면 돼. 비문도 많이 썼고, 상량문도 많이 썼어. 상량문이 별지 큰 거 하나씩 되잖아. 그 두루마리를 대들보를 파고 그 안에넣잖아. 여러 군데 쓴걸로알고있어.

서재영 : 상량문은 보 안에 넣어버리면 해체하기 전까지는 모르잖습니까?

흥교스님 : 몇 백 년 후에 나오는 거지. 근데 대부분이 다 복사해놔. 스님이 마음이 약해서 요청받으면 몸이 아파 누워 있으면서도 쓰는 거야. 누워서 써도 그런 문장이 되는 거야 스님이 쓴 것은. 또 비문은 나주 다보사에 가면 하나 있을 거야. 다보사에 가면은 우화 선사라고 유명한 선사가 있어. 그 선사의 비문을 아마 광덕스님이 쓴 걸로 알고 있어. 지 나가다 비릉이 있어보니까 광덕스님이 썼더라고.

서재영 : 무불스님 행장비는어디있습니까?

 흥교 스님: 거제리 금룡암에 있어. 범어사 안에 있는 대성암 상량문 도 있어. 지금 있는 사람들은 모를 거야. 비문은 여러 군데 있을 텐데, 그것이 중요한 거야. 그걸 모아야해 돼. 서울에는 동암성수(東庵性洙, 1904~1969)노스님 비문을 아마 광덕스님이 썼지 싶어.

서재영 : 이 비석은 어디있습니까?

흥교스님 : 오봉산 석굴암 주지스님(주: 초안스님)한테 전화해봐. 조계종 봉선사 말사야. 그곳이 양주야. 군부대 지나서 절에 들어가더라고. 내가 법문하러 두 번 갔어. 거기 주지스님한테 물어봐서 그 비문을 누 가 썼는가 물어봐. 그러고 (광덕)스님이 여기저기 글을 많이 썼어요.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비문 같은 것도 이런 것, 이런 것들은 다 기본인데 그거 쓸때. 그 문집에는 그게 하나도 안나와.

서재영 : 오늘 말씀해주신 것부터 저희가 찾아보겠습니다.

 

Ⅶ. 승가정신의 모범을 보인 광덕 스님

정헌열 : 광덕 스님께서 범어사에서 열중 소임을 맡고 계실 때 스님들이 많이 따랐다고 하더군요?

흥교스님 : 스님은 자비스러우니까 누구말이든지 경청해주었지. 광덕 스님은 “이놈!” 그런 법이 없어. 누구 말이든지 들어주는 거야. 요즘의 말로는 카운슬러 아니야? 성직자, 카운슬러인데, 스님은 누구 말이든 지 아무리 하찮은 사람 말이라도 들어줘. 그리고 대답해줘. 그게 그 양반이 우리 종단에서 최고야. 그걸 하심(下心)이라 하지. 그리고 같이 더불어사는거야. 그런데 차별 안두는거야.

서재영 : 수행하시는 스님들이 수행해가다 막히면 광덕스님한테 질문도 하셨겠군요?

흥교스님 : 질문하면 스님이 또 대답해주었지. 그것도 보통 대답이 아니야. 틀림없이 심장을 찔러서 대답을 해주지. 그렇다고 해서야단치는 것도아니고.

서재영 : 성철 스님, 지효 스님, 광덕 스님, 능가 스님께서 동산 스님 문하의 사대제자라고 하셨는데 지효스님과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흥교스님 : 좋았어. 어느 정도로 좋았느냐면 광덕 스님이 봉은사 주지를 하실 때 였지. 어느 날 지효 스님이 서울에 중앙선원을 하겠다고 하 셨어. 한국의 중앙선원을 봉은사에다 하겠다고 걸망을 싸서 짊어지고 제자들 한 열 명 데리고 온 거야. 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큰 종을 막 쳐서 대중들을 불러 모았어. 그래서 모든 대중들이 다 모였지. 한 30여 명의 대중들이 큰 방에 딱 모이니까 스님께서 “지효 사형님께서 여기서 중앙선원을 하신다고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절을 비워주자.” 그랬어. 다른 이야기는 일절없어. 이것은 엄청난 이야기야! 그러니까 몇 몇 스님들은 반대를 했지. 그러니까 광덕 스님께서 “그러지 마라. 여기서 생사를 걸고 자기 찾는 공부를 한다고 하고, 부처님 되는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걸림돌이여서되겠느냐? 봉은사 이것이 무엇이라고! 그냥 주자!” 그래 가지고 하루 아침에 봉은사를 내줘버렸어. 그리고 나온 거야. 그것이 스님께서 봉은사에서 나온 동기가 그거야.

서재영 :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흥교스님 : 그거 무지무지한 이야기야. 물어보니까 내가 대답하게 되네.

서재영 : 어떤 스님이 절을 바꾸자고해서 나오셨다는 설도 있더군요?

흥교스님 : 그건 그 다음 이야기야. 그래 가지고 스님이 절을 드리고 우리는 다 나왔지. 나는 범어사로 오고, 한 20명 되던 대중들은 다 뿔뿔이 흩어진 거야. 광덕 스님은 대각사 뒷방으로 다시 가시고. 다 흩어졌는 데 지효 스님이 그 절을 또 바꿔갔어. 어디로 바꿔 갔냐면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10년살았어.

서재영 : 무문관 가시면 봉은사는요?

흥교스님 : 무문관에 있는 스님들에게 봉은사를 주고, 이 양반은 무문 관으로 들어가셨지. 무문관에 들어가서 기라성 같은 노스님들이 한 열 댓명이 모여서 한 10년 살았지. 다 돌아가셨지만 관응 스님 같은 분도 그곳에 사셨지. 그밖에도 몇몇 스님들이 계셔. 무문관으로 가실 때 봉은사하고 바꿔서 간거야 지효스님이. 그러니까 광덕스님이 바꿔간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잘 몰라서 오해하고 있어.

서재영 : 오늘 중요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흥교스님 : 그렇지. 그때 나도 슬펐어. 갈 데가 없는 거야. 그래도 봉은사 내놓고 그냥 나왔어. 그러니까 봉은사는 지효 스님이 들어가서 한 1 년 살았어. 그리고 천축사로 바로 바꿔서 무문관으로 가셨지. 그게 봉 은사를 나온 동기야. 지효 스님한테 그 절을 준 거야. 그만큼 형제간에 돈독했던거야. 형제지간이 되려면 그런 정도는 되어야 하는거야. 누가 그러겠어? 고광덕이나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다른 어떤 사람이 감히 그렇게 하겠어? 아무말도 하지않고 그냥 “형님 그렇게 하십시오!”그러면서 절을  내준거야.

서재영 : 지효 스님께 봉은사 드리고 나올 때 스님도 지효 스님 존경하 셨을거같은데요?

흥교스님 : 아, 존경하지. 두 분 다 존경하지. 그걸 탁 내주고 걸망지고 초라하게 한 20명이 나올 때 정말 내 가슴이 뭉클했어. “아 이것이 중의 세계인가!” 싶더라고. 그때 생각하면 대단했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은. 나는 “우와~ 승려세계라는 것이 이 런 건가보다.”

서재영 : 그때 반대하셨던 분들은 논리가 뭐였습니까?

흥교스님 : 우선 우리가 편안하게 잘 살려면 안 된다는 거지. 그 때는 살만한 것이 가을에 쌀 많이 들어오고, 그 때는 배부르면 되니까. 그 고 또 경제적으로도 절에 신도들도 많고 윤택했고 그랬지. 그니까 한 서너 사람이 그랬어. 그 때 반대했던 그 사람들 다 속퇴하고 없어. 그 때  양익 스님도 계셨는데 한 마디도 반대 하지 않았지. 양익 스님도 광덕 스님말이라면 껌뻑했어.

서재영 : 그러면 대학생 수도원은 어떻게 됐습니까?

흥교스님 : 수도원은 그대로 그냥 다 존중하고 그랬어. 그래도 광덕스님 있을 때 만큼은 안돼지. 그래서 그때는 이한상씨가 돈을 쭉댔지. 광덕스님이 댄 게아니고. 이한상 씨가 광덕스님보고 돈을 준 거야. 이한 상 씨가 누구냐면 풍전건설이라고 팔당댐을 막은 사람이야. 그리고 현재 정부 중앙청사를 지은 사람이야. 그러고 또 몇 개 더 지었어. 팔당댐 막을 때 광덕 스님하고 둘이 가서 고사를 지냈어. 지프차 타고 가서 강 바닥에서 지냈지.

서재영 : 그것도 처음 듣는 이야깁니다.

흥교스님 : 광덕스님하고 나하고 둘이 갔지. 나는 광덕스님 걸망 짊어 지고 요령하고 목탁하고 장삼하고 챙겨서 지프차 타고 따라갔지. 자갈 밭에가서 재상을 채려놓고 고사를 지내고 팔당댐을 쌓았어.

서재영 : 이후락 씨랑 중앙신도회 회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셨던 분이 잖아요?

흥교스님 : 그건 다음 이야기이야. 아무튼 이후에 그 양반이 미국으로 쫓겨 간 거야. 그 사람이 살았으면 불교가 굉장히 발전했지. 대학생들도 많이 키우고, 불교신문이 그 사람이 만든 거야. 그러니까 광덕 스님이 코치하고 그래 만든 거야. 그 사람이 광덕 스님밖에 모르는 분 이었어.

서재영 : 그래서 광덕스님 주필을 하셨군요?

흥교스님 : 그렇지 주필도 하셨지. 광덕 스님이 이한상 씨한테 우리 신문 만들자 그래 가지고 그 양반이 돈을 대고 광덕스님이 한거야. 이한상 씨는 미국 가서 고생하셨어요. 근데 이한상이란 책이 이번에 나왔더라고. 이용부랑 그 사람들이낸 거야. 이한상도 나오고 서경수도 나오고 몇 개 했어. 그리고 “광덕 스님 것도 언제 나오나” 하니까 따로 한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광덕 스님 것을 해야지!” 내가 그랬지. 그 게 봉은사를 나온 동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형님한테 드린 거야 그 절을.  어느 형제간에 그러겠어? 피를 나눈 형제간도 그거 어렵지.

서재영 : 정화할 때 지효스님이 할복한 육비구중에 한 분이셨잖아요?

흥교스님 : 육비구중에 한분인데, 창자가 밖으로 다 이렇게 나와서 큰 다라이에 쏟아진 창자를 씻겼다는 말도 있어. 누가 씻겼냐면 혜춘이라는 비구니스님이 있었어. 간호원 출신이었는데 그 비구니회장도 하고 그러셨지.  

서재영: 그때는 광덕스님은 외부에서 지원하시고요?

흥교스님 : 광덕스님은 법을 많이아니까. 재판소 다니기 바쁘지. 능가 스님도그러고.

서재영 : 사형사제로서 우애가 깊으신거군요?

흥교스님 : 형님이라고 깍듯이 대접했어. 광덕 스님이 어른한테는 잘 합니다. 누구한테든지. 그러니까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그 큰 재 산을 딱 드리겠습니까? 광덕 스님이니까 지효 스님한테 그래 줬어 요. 역사가 그래. 

 

Ⅷ. 직위와 명예 버리고 대중포교에 전념하다

흥교스님 : 그러니까 광덕 스님이라는 어른은 재력에 탐을 낸다거나 명예에 탐낸 사람 아니야. 그거 보면알잖아. 봉은사 두 말 안 하고 주잖 아. 누가그래하겠어? 광덕스님이니까하지. 대단한거야.

서재영 : 지효 스님께서 천축사를 요구하셨을 때, 그쪽에서 무문관을 흔쾌히내줬습니까?

흥교스님 : 내줬어. 지효 스님이니까 거기서도 내줬어. 안 줄라고 했어. 근데 지효스님이 달라니까. 또 육비구이기도 하고 정진이 최고에요. 우리나라 불교에서 정진으로 치자면 성철 스님, 지효 스님 그랬잖아요. 두 분이 법형제 지간이잖아. 그 밑에 광덕 스님이 있지. 그러니까 광덕 스님은 평생에 지효 스님 제자들이나 성철 스님 제자들한테서 대접받고 있어. 원택 스님을 비롯해 성철 스님 제자들도 광덕 스님 앞에 가면 전부 무릎 꿇잖아. 지효 스님 상좌들도 그렇고. 남들은 뭐 보살행이니 뭐니하고이야기해도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 수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기가 어려워.

서재영 : 성철 스님이나 지효 스님 다 동산 스님 문하의 큰 제자들인데 본인만 나와서 전법하시겠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흥교스님 : 많이 어렵지. 또 화엄사든지 아니면 어느 절에든지 한 고을 을 딱 가서 대장 하지. 그걸 버린 거야. 명예도 버리고, 돈도 버리고 또 이런 거 다 버렸어. 총무원장하라고 몇 번 해도 안 했잖아. 해인사 주지 하라 해도 안 했잖아. 봉은사 주지도 아낌없이 내놨지.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요새는 뭐 줄을 서서 야단인데. 광덕 스님은 총무원장 같은 거는 우습게 알았어요. 그거 다 딱 끊으셨지. 예를 들어서 옛날에 여의도  광장에 한 백만 명이 모였잖아. 다른 사람 다 단상에 올라갔어. 그런데 광덕스님은 군중속에 앉아 있었어.

서재영 : 종단의 활동 접고 불광을 창건하고 잠실 법당을 만드신 것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흥교스님 : 광덕 스님이아니면 현대불교가 지금 없어. 그 큰 물줄기를 돌려놨잖아. 생활불교, 현대불교, 도심불교로. 이런 것을 광덕 스님이 만든거지. 법상에 앉으면 막 고함도 지르고, 젊었을때는 고함도 컸어.

서재영 : 잠실 땅보러 갔을때는 어떠셨습니까?

흥교스님 : 희망이 대단했지. 그 때만해도 총무원장 서로 할라 그러고 막 싸우고 그럴 때거든. 노장은 그런 것 보기 싫다 이거야. 종단 현실에 대한 그 좌절도 많았지. “보기 싫다. 안 한다. 나는 그저 신도 포교나 할 란다.”그랬지. 잠실 땅보러가서 자기는잠실 불광법당을 할테니, 나보고는 인천에 가서 전법을 맡으라고 했어. 인천에 제일 큰 절이 보각사야. 그래서 보 각사 주지를 내가 맡았어. 스님은 잠실에 머무시고. 근데 인천에 있다 보니 범어사에서 날 가만 안 두고 끌어 내렸어. 그래서 내가 범어사로 다시내려온거야.

서재영 : 잠실에 땅보러 가셨을 때 허허벌판이었나요?

흥교스님 : 아무 것도 없었어. 비석만 봤다니까. 근데 스님이 그랬어. “하, 오백평만 더 샀으면 좋겠는데!”그랬지.

서재영 : 그때 오백평 더 샀으면 천평 정도 되었겠군요?

흥교스님 : 그렇지. 그 때는 돈이 얼마 안 되니까. 요새는 중흥사서 새로 중창한다고 그러대? 중흥사가 우리나라에서 최고 가는 절이야. 거기가 대단한 곳이야. 근데 그게 대처승들이 갖고 있다가 지홍 스님이 그걸 인수했는데 잘한 거야. 지홍 스님아니면 그 못 해. 지금 불광 중창불사도 지홍스님이니까 그거 해낸거야.

정헌열 : 광덕 스님께서 제자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따로 있으셨던 가요?

흥교스님 : 스님은 사람을 가리고 그러지는 않았어. 인연 닿는 대로 하 셨지. 그래서 당시에 외국인 제자도 받아서 범어사에서 계를 받았지. 독일 사람인데, 저녁에 스님하고 대화를 오래 했어. 스님이 영어가 돼. 아 주 안 된 거아니야. 일본말은 아주 잘 되고. 어렵고 무슨 심오한 문제가 나오면 성철 스님한테보내는 거야. 그러면 내가 데리고 해인사까지하 루 종일 데리고 간 거야. 해인사에서 노장님이 데리고 이틀이고 3일이고 대화를 하셨어. 그러다가 또 범어사로 보내고 했지.

서재영 : 외국인 제자가 쉬운 케이스가 아닐 텐데요?

흥교스님 :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야. 그 때는 숭산 스님도 외국에나가 기 전이야. 최초의 외국인 출가자가 바로 그 캐리 올슨이야. 그래서 사 람들이 와서 보고 굿(good)이야 라고 했지. 캐리 올슨이 가사 장삼입고 이렇게 서 있는 거 보면 마당에서 그 사람 보느라고 보살들이 정신이 없었어. 그때는 그게 굿이었고 좋은 그림이었지. 그런데 그 스님을 내가 골탕을 좀 먹였지. 한번은 비빔냉면을 사 먹 였거든. 홀딱 홀딱 뛰어. 그걸 또 광덕 스님한테 갖다 일렀어. 광덕 스님이 다른 이야기안 하시지. “오늘 뭐 캐리 데리고 가서 맛있는 거 사줬다고?” 이러고 말았어. 다른 사람이라면 뭐라 그랬겠지. “맛있는 거 사줬다고?” 그 말로 다 한 거야. 참 대단한 어른이지. 캐리는 또 처음 먹어봤다고, 지금도 입이 알알하다고. 그 친구가 또 힘이 좋았어. 관세음보살 괘불대를 불끈 들었어. 보통 20명, 30명 드는데 그 사람은 덜컹 들더라 고. 힘도좋고, 키도 컸는데 광덕스님 쫄쫄 따라  다니고그랬어.

서재영 : 소통이 되는분이 광덕스님 밖에 없어서 였군요?

흥교스님 : 광덕 스님밖에 없고, 영어되는 사람이 없었어. 홍교 스님이 되긴 되는데, 홍교 스님이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를 나왔을 거야. 근데 대우 김우중 회장이랑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같은 한 책상에서 공부한 사람이야. 회사가 어려우니까 데려 가버렸어. 그래서 승복을 벗은거야. 내가 “형님, 형님”이러고 졸졸 따라 다녔거든. 영어 잘 하지, 일어 잘 하지뭐 실력좋고 그러니까 회사로 갔어. 홍교스님 하면 잊혀지지않는 것이 하나있어. 내가 영화 안보여준다고 졸랐거든. 그러니까 여섯시에 밥 먹고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갔거든. 그랬더니 하루에 네 군데를 가더라고. 단성사 가고, 스카라 극장가고, 대한극장 가고, 피카디리에 갔지. 그런데 저녁 먹고 다시 가자고 하는 거야.

서재영 : 아주 뿌리를 뽑으셨네요?

흥교스님 : 내가 그 뒤로는 다시는 “영화 보러 안 갈래?” 그러면은 “아,  안 갑니다.” 그랬지. 아주 뿌리를 다 뽑았어. 그 형님이 뿌리를 뽑았어. 바둑도 광덕스님이 뿌리 뽑고. 하, 바둑 뽑을 때는 처참했어. 무릎 차악 꿇고 앉아 가지고 고개도 못 들고. “내일부터는 바둑 두지말고, 음악 듣지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책봐.”그거. 그말뿐이야.

정헌열 : 광덕 스님은 어떤 안 좋은 상황이 있더라도 화를 내지 않으셨 군요?

흥교스님 : 얼굴이 벌게졌지. 재판하면서 재판소에 들어가잖아. 나는 검찰청 밖에서 기다리고. 그러면 세시간후에 나오면 얼굴이 벌게 가지고 나왔어.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졸졸 따르고 그랬지. 그때는 내가 스님 쪼랭이들고 뒤에 따라 다니는 사람이니까.

서재영 : 광덕 스님 책을 많이 내셨잖아요? 광덕 스님 책 중에 어떤 책을 제일 평가하세요?

흥교스님 : 『보현행원품 강의』가 참 좋아. 내가 본 책 중에는 『보현행원 강의』가 좋았어. 서문도 성철 스님이 썼어. 서문이 아주 명문이잖아. 대각사에서 앉아 가지고 그 서문을 보다가 “성철 스님도 뭐 아네?” 내가 그랬지. 그러니까 스님이 “에이, 이놈의 자식” 그랬지. 그 서문이 아주 명문이야.

서재영 : 두분은 길은 달랐지만 서로 믿고 신뢰하셨군요?

흥교스님 : 성철스님이 남의 서문 써주고, 글 써주고 그런 사람 아니거든. 그래도 광덕 스님 것은 써줬어. 광덕스님 웬만한 책은 다 서문이 성철스님껍니다. 

서재영 : 바쁘신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 내용 잘 정리해서 광덕 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 자료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불광관리자 2017-11-08 14:41:22
네 필자에게 의견전달하고, 사실관계는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_()_

글을 읽고.. 2017-11-08 13:24:57
인터뷰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어 글을 남깁니다. 1.<구산스님 단지> <지효 스님 할복>이 일어나고 그 후에 발생한 < 대법원6비구 사건>은서로 다른 내용이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2.구술을 기록으로 남길 때는 직접 목격한 내용인지 누구에게 전해 들은 내용인지를 꼭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3.아무튼 광덕 스님의 열정을 생각하니 잠자던 신심이 깨어나고 원력이 생겨나는 듯합니다.^^

ㅇㅇ 2017-08-08 23:07:07
감사히 잘읽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