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디에 봉은사를 내 놓은 광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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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에 봉은사를 내 놓은 광덕 스님!
  • 서재영
  • 승인 2017.07.31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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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연구원 <전법학연구> 12호에 게재

< 말 한 마디에 봉은사를 내 놓은 광덕 스님!>

흥교스님

서재영: 성철 스님, 지효 스님, 광덕 스님, 능가 스님께서 동산 스님 문하의 4대제자라고 하셨는데 지효 스님과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흥교 스님: 좋았어. 어느 정도로 좋았느냐면 광덕 스님이 봉은사 주지를 하실 때였지. 어느 날 지효 스님이 서울에 중앙선원을 하겠다고 하셨어. 한국의 중앙선원을 봉은사에다 하겠다고 걸망을 싸서 짊어지고 제자들 한 열 명 데리고 온 거야.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큰 종을 막 쳐서 대중들을 불러 모았어. 그래서 모든 대중들이 다 모였지. 한 30여 명의 대중들이 큰 방에 딱 모이니까 스님께서 “지효 사형님께서 여기서 중앙선원을 하신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절을 비워주자.” 그랬어.

다른 이야기는 일절 없어. 이것은 엄청난 이야기야! 그러니까 몇몇 스님들은 반대를 했지. 그러니까 광덕 스님께서 “그러지 마라. 여기서 생사를 걸고 자기 찾는 공부를 한다고 하고, 부처님 되는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걸림돌이여서 되겠느냐? 봉은사 이것이 무엇이라고! 그냥 주자!” 그래가지고 하루아침에 봉은사를 내줘버렸어. 그리고 나온 거야. 그것이 스님께서 봉은사에서 나온 동기가 그거야.

서재영: 지효 스님께 봉은사 드리고 나올 때 스님도 지효 스님 존경하셨을 거 같은데요?

흥교 스님: 아, 존경하지. 두 분 다 존경하지. 그걸 탁 내주고 걸망지고 초라하게 한 20명이 나올 때 정말 내 가슴이 뭉클했어. “아 이것이 중의 세계인가!” 싶더라고. 그때 생각하면 대단했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은. 나는 “우와~ 승려세계라는 것이 이런 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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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

<전법학연구> 12호에 게재된 전 범어사 주지 흥교 스님의 구술사 내용 중 일부입니다. 요즘 총무원장이 누가 되느냐를 두고 종단 안팎으로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봉은사 주지 문제를 두고 시끄러웠던 이야기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본사나 이름 난 사찰의 주지가 되기 위해 돈을 썼다는 뉴스까지 심심치 않게 접하고 사는 시대입니다.

이런 뉴스만 보고 살다가 40여전 큰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광덕 스님과 지효 스님은 모두 한국 근대불교의 큰 스승이신 동산대종사의 제자들로 두 분은 사형사제지간입니다.

지효 스님은 당시 수행에서 제일가는 분 중에 한 분이자,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던 6비구 중의 한 분입니다. 지효 스님하면 따라다니는 일화 중 하나가 정화운동을 외치며 할복한 사건입니다. 그냥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내장이 모두 쏟아져 나올 정도로 결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정법을 향한 그런 분들의 열정이 있어서 한국불교는 일제 강점기 동안 왜곡되었던 대처불교를 청산하고 다시 비구교단으로 탈바꿈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광덕 스님은 법학을 전공한 청년이었습니다. 1950년대 초 동산 스님을 찾아 범어사로 들어간 이후 무려 10년 동안 처사 신분으로 스님들과 함께 수행했습니다. 그러다가 동산 스님의 권유로 출가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덕 스님은 정화 이후 종단의 대소 소임을 맡아 어지러운 종단의 초석을 다지셨고, 산중불교에서 탈피하여 도심전법의 새로운 모범을 세운 전법보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광덕 스님께서 정화 이후 20여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봉은사 주지를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사형인 지효 스님께서 10여 명의 수행자와 함께 오셔서 봉은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해야겠다는 뜻을 밟힙니다. 그러자 광덕 스님은 곧바로 운집종을 쳐서 대중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사형의 뜻을 전달하며 절을 떠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땅히 갈 곳이 없던 20여명의 대중 중에는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강남의 노른자위 땅이 된 현재의 봉은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시에도 봉은사는 토지가 많은 절이었습니다. 코엑스가 있는 그 일대 땅 30만평이 봉은사 땅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토지로 치자면 지금보다 더 큰 규모의 사찰이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복잡한 일을 정리하고 막 정착했는데 갑자기 떠나자고 하니 반대하는 스님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 광덕 스님은 그들을 향해 “생사를 걸고 자기 찾는 공부를 한다고 하고, 부처님 되는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걸림돌이여서 되겠느냐? 봉은사 이것이 무엇이라고!”하고 타이르시며 함께 절을 떠났습니다. 이 대목에서 정말 존경심이 절로 우러납니다. “생사를 걸고 수행하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방해가 되어서야 되겠느냐?” 이 질문은 출가자라면 결코 놓아서는 안되는 질문입니다.

지효스님

당시 20대였던 흥교 스님도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술회했습니다. 진짜 출가자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승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이 정처 없이 절을 비워주고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가슴에는 오히려 뜨거운 감동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또 있습니다. 봉은사를 말 한 마디에 차지한 지효 스님 역시 봉은사에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곳에 수행자들이 수행에 전념할 도량을 건립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수행터로 여의치 않은 곳임을 깨닫고 스님은 곧 바로 도봉산 천축사로 떠나십니다. 애초에 봉은사라는 절에는 전혀 관심도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배금주의에 의해 종교가 오염된 상황에서 전설처럼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부디 이번 총무원장 선거에서도 이런 정신을 가진 분들이 많이 출현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 출처 : 불광연구원 서재영 책임연구원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uruna?fref=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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