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석가의 마지막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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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석가의 마지막 걸음
  • 김하풍
  • 승인 2017.06.15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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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부처

1

석가모니가 제자들과 같이 마지막 여로에 오른 것이 80세 적이었다. 그 걸음에 다다른 쿠시나라 지역 두 사라나무 사이에서 적멸하신다. 『장아함경長阿含經』에 든 『유행경遊行經』은 그 걸음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는 그 여로에 많은 신도들을 만난다. 그 중에는 브라만 출신의 대신도 있고, 또 이름난 유녀도 있었다. 『유행경』은 부처가 그 걸음 속에서 제자들에게 한 설법과 신도들을 만난 이야기도 기록한다. 또 이 경에는 부처와 마라(악마)와의 대화 장면도 나온다. 바로 그 장면에서 입적할 것을 권하는 마라에게 부처는 석 달 후에 적멸한다고 선언하신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기록을 우리가 어느 정도 사실로 읽어야 하는가. 학자들이 의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유행경』을 통하여 부처의 마지막 걸음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부처가 평소에 제자나 신도들과 접한 양상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또 부처의 일상생활의 측면도 들여다 볼 수 있겠다. 독자가 꼭 모든 기록을 사실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부처가 교화의 첫걸음에 나선 것이 입멸하기 46년 전이었다. 성도하신 뒤 얼마 안 되어, 중생 제도의 걸음을 나서기에 앞서, 부처는 바라나시에서 귀의한 61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러 비구들이여, 나는 천상과 인간세계의 모든 사슬에서 풀렸다. 그대들도 천상과 인간세계의 모든 사슬에서 풀렸다. 다들 길을 걸어갈지어다. 중생이 잘 살도록, 중생의 복락을 위하여, 인간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령과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서. 혼자 갈지어다. 같은 길에 둘이 가지 말고,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진리를 설할지어다. 한결같이 완전하고 순결한 모습을 보일지어다. 세상에는 마음의 눈이 먼지에 가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다만 진리를 못 들은 탓으로 어둠에서 헤매니, 들으면 깨달으리라. 나도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로 향하겠다. 가르치기 위하여.”

 

‘천상과 인간세계의 모든 사슬’이란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신조 규범을 가리킨다. 성도함으로 온갖 사슬에서 풀렸으니, 부처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에게 귀의한 비구들도 또한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도 그런 사슬에 갇혀 고생하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큰 자비심으로, 그들의 해방을 위해 길에 나서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부처가 말하는 “중생의 복락” 혹은 “신령과 인간의 행복”이란 바로 그들이 현재하는 이 현상계에서의 참된 행복을 뜻하며, 천국과 같은 초현상계에서의 행복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불타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현세적이다. 불교에서 흔히 사바세계를 고해苦海로 비유하고, 해탈의 경지를 피안彼岸으로 말하는데, 이 피안은 우리가 현재하는 현상계 밖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불타의 가르침은 중생들로 하여금 무명無明에서 깨어남으로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온 번뇌의 근원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2

부처에게는 평소에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의 교단의 사문들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재가자들이 허다하였다. 『유행경』은 부처가 그의 마지막 걸음에 여러 사문들에게 한 설법은 물론, 이들 신도들과의 대화도 기록한다. 우리는 이 경의 기록을 통하여, 다시금 부처의 현세적인 가르침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는 무엇보다 부처의 관심이 곧 그들 제자들의 관심이었음을 말해주리라. 두 말할 것 없이 재가자의 관심사는 주로 이 세상 일이었다 하겠지만, 또 부처를 따르는 사문들의 관심 역시 깊은 의미에서 그러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사문의 수행 목적은 현상계에서의 해탈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한편 이 경을 읽는 독자는 누구나 노구를 이끌고 여로에 오른 부처의 인간적인 측면을 놓칠 수 없으리라. 여기에 『유행경』에 나오는 여남은 에피소드를 들어 중생 제도하는 석가의 모습을 엿보기로 하자. 『유행경』의 첫 장면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한동안 라자가하(왕사성)의 영취산에 계셨다. 당시 마가다 나라의 아자타삿투 왕은 밧지 족을 쳐서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그의 대신 밧사카라를 영취산에 보내어, 부처의 충고를 듣기로 한다. 부처가 밧사카라를 접견하는 동안 젊은 아난다는 뒤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부처는 아난다에게 묻는다.

“아난다여, 자네는 밧지 족이 자주 회의한다고 들었는가. 또 많이 참석한다고 들었는가?”

아난다는 답한다.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밧지 족이 자주 회의를 하고, 많이 참석하는 한, 그들은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고, 망하는 일이 없으리라. 아난다여, 자네는 밧지 족이 서로 협동하여 모이고, 협동하여 행동하며, 다 같이 할 일을 한다고 들었는가?”

“예, 들었습니다.”

“그러면, 밧지 족이 서로 협동하여 모이고, 협동하여 행동하며, 다 같이 할 일을 하는 한, 그들은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며, 망하는 일이 없으리라. 아난다여, 자네는 밧지 족이 새로운 법을 만들지 않으며, 옛 법을 버리지 않고 옛 법에 따라 행동한다고 들었는가.”

“예, 들었습니다.”

“그러면, 밧지 족이 새로운 법을 만들지 않으며, 옛 법을 버리지 않고 옛 법에 따라 행동하는 한, 그들은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며, 망하는 일이 없으리라. 아난다여, 자네는 밧지 족이 노인을 존경하고 잘 모시며, 노인의 말씀을 중히 여긴다고 들었는가?”

“예, 들었습니다.”

“그러면, 밧지 족이 노인을 존경하고 잘 모시며, 노인의 말씀을 중히 여기는 한, 그들은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며, 망하는 일이 없으리라.”

부처는 이와 같은 문답을 아난다와 더 거듭한다.

마가다 나라의 대신 밧사카라는 그 문답을 듣고 나서 말했다.

“고오타마여, 그대는 밧지 족이 멸망하지 않을 이유 일곱 가지를 들었습니다. 하나로 족할 것입니다. 그런즉, 마가다 나라의 아자타삿투 왕이 밧지 족을 칠 길은 없겠습니다. 나라 일이 많으니, 나는 돌아가겠습니다.”

“그리하십시오, 브라만이여.”

부처는 말씀하셨다. 밧사카라는 부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이 에피소드에서 우선 전쟁을 뜻하는 마가다 왕이 부처의 충언을 구하여 대신을 그에게 보낸 것이 부처의 가르침을 아는 독자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다. 살생을 일체 금하는 부처가 아닌가. 또 얼른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부처가 한 마디도 살생의 악(그릇됨)을 말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당시 부처는 힌두 사회에서 그 전통에 비추어 그저 현명한 인간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부처 자신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교리를 설하지 않았음을 말하지 않는가. 이런 인상을 주는 에피소드가 『유행경』에는 여러 번 나온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부처가 제자들과 같이 파탈리 마을에 도착하셔서 거기서 그 마을의 신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거사들이여, 계율을 범하는 자에게는 다섯 가지 화가 올 것이다.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은 빈곤에 빠질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나쁜 평판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왕족의 모임에 가든지, 브라만의 모임에 가든지, 거사들의 모임에 가든지, 혹은 수도자들의 모임에 가든지, 무슨 모임에 가더라도, 불안스러워 조마조마할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죽음을 당할 때 정신이 착란할 것이다. 다섯째로 그들은 사후에 무서운 곳에 가며,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거사들이여, 계율을 지키는 자에게는 다섯 가지 복이 올 것이다.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은 번성할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좋은 평판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왕족의 모임에 가든지, 브라만의 모임에 가든지, 거사들의 모임에 가든지, 혹은 수도자들의 모임에 가든지, 무슨 모임에 가더라도, 태연하여 조마조마할 일이 없을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죽을 때 정신이 착란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로, 그들은 사후에 좋은 곳에 가며,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부처는 밤늦도록 거사들을 가르치시고, 격려하시며 기껍게 하셨다.

이 에피소드에서 하시는 부처의 말씀도 역시 우리가 아는 바 불교의 가르침과는 꼭 관계가 없는 말씀이 아닌가. 그의 말씀은 대체로 힌두 전통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과연 그렇다면, 부처는 재가자에게 그가 깨달은 진리, 예컨대 사성제四聖諦나 십이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을 설하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사실 이 에피소드 끝에서 『유행경』은 “부처는 밤늦도록 거사들을 가르치시고, 격려하시며, 기껍게 하셨다.”고 할 뿐,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그 내용을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 그저 당시 사회의 도덕관에 비추어 가르치신 것이 아닌가. 이 사실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의 기록과 매우 대조적이다. 그런 기록에서는 아래에 보는 바와 같이 『유행경』은 반드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그 내용인즉 우리가 아는 바, 부처의 가르침이다.

이 대조는 역시 부처가 재가자들에게는 그가 깨들은 바 진리를 가볍게 논하기를 꺼려하신 탓이 아닐까. 여기서 하나 유의할 것은 이 에피소드 끝에 나오는 글과 같은 혹은 비슷한 표현이 부처가 또 다른 신도들과 만난 에피소드의 끝에도 나온다는 사실이다. 역시 내용을 쓰지 않는다. 즉, 부처는 당시 힌두 사회의 윤리관에 따라 “가르치시고, 격려하시며, 기껍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유행경』은 사문들에게 하신 부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고한다. 다음 말씀은 그가 제자들과 같이 코티 마을에 도착하셨을 때 하신 설법이다.

“비구들이여, 우리가 네 가지 진리(四聖諦)를 모르고 깨닫지 못한 탓으로, 그대들과 나도 윤회하여 왔다. 무엇인가.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의 근원의 진리, 괴로움을 멸하는 진리, 괴로움을 멸하는 길의 진리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 네 가지 진리를 알고 깨달음으로 생존에 대한 집착이 근절되었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무명으로 인한 생존에 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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