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만드는 영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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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만드는 영담스님
  • 불광출판사
  • 승인 2017.05.1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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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전통, 우리 절집이 이어가야죠. ”
 “한지 전통, 우리 절집이 이어가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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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담影曇스님
1981년 능가사로 출가. 운문사 승가대학 및 승가대학원 졸업. 운문사 중강 역임. 
1986년 영담 스님이 만든 종이로 정부에서 『직지』와 『왕오천축국전』을 간행. 
2008년 전주 한지축제 특별초대 및 제6회 개인전
2009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특별초대전
2010년 제8회 개인전 – 서울 인사아트센터
2011년 ‘2011 Art Live’ 초대 – 뉴욕 첼시
2012년 미국 매릴랜드주립 TOWSON대학 초청 작품전 및 한지미술 특강
2013년 주 이태리 밀라노 대한민국총영사관 초청 한지미술작품전 및 국립밀라노대학 ‘한지의 예술’ 특강
2014년 제10회 개인전 – 서울 인사동 KCDF갤러리
2015년 한미문화예술재단 초청 ‘한지 어울림 전’ - 국회의원회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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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한의원을 운영하셨다. 약탕기 아구리를 한지로 봉했고, 약봉투도 닥종이로 만들었다.  한의원에 얹혀산 맹꽁이 할아버지가 온돌방에 닥종이를 말린 후 바닥에서 뗄 때 나는 소리, 닥종이가 햇빛을 받을 때, 그 기억이 생생하다. 입산 후에도 어린 시절 한지의 경험이 이어졌다. 사찰의 자급자족에 한지만큼 적당한 것이 없었다. 경봉 노장께 직접 만든 종이를 갖다드렸다. 노장께서는 고성 옥천사 스님들이 종이 노역에 시달린 일화를 들려줬다. 옥천사뿐 아니다. 종이는 절집과 인연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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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예부터 종이는 귀했다. 문필능력이 있으면서 종이를 만드는 신분은 스님들뿐이었다. 스님들은 불경을 봉지하고 불화를 모시기 위해 종이가 필요했고, 직접 종이를 생산했다. 전통 종이의 질의 맥은 절집 스님들에게 이어져온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절집 스님들이 직접 종이를 뜨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해인사나 송광사, 큰 절에는 구지통이 있다. 통나무의 가운데를 크게 판 것인데, 이 도구가 바로 종이 뜨는 도구다. 설거지통, 밥통이 아니다. 통도사 큰 석구도 닥을 으깨는 도구다. 이렇게 절집 곳곳에 종이 뜨는 흔적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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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닥나무를 채취해 찌고, 벗기고, 삶고, 흐르는 물에 세척하고, 햇볕을 쐰다. 그런 다음 닥풀(황촉규)즙 내기를 한다. 닥풀은 뿌리에서 끈끈한 즙이 나온다. 이 즙이 전충제 역할을 한다. 이후 빻기(고해하기)를 반복한다. 이제 물질하기 위해 풀대친다. 잘 고해된 닥섬유를 지통에 넣고 물에 푸는 것을 말한다. 풀대치기가 잘 되면 본격적으로 물질한다(외발뜨기). 이 과정이 전통한지를 만드는 장인의 솜씨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과정이다. 계속 물질을 하여 보통 한 명의 장인이 하루에 250장을 뜬다. 스님은 바란다. 우리 절집에 한지를 만드는 전통이 다시 일어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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