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방랑기] 경남 하동 칠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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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방랑기] 경남 하동 칠불사
  • 이광이
  • 승인 2017.05.1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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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하안거 스님들은 삼매에 드시고 멧돼지 가족은 공양을 드시고
지리산 하안거  스님들은 삼매에 드시고
멧돼지 가족은 공양을 드시고
 
경남 하동 칠불사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 소식’ 
담배 한 숨의 길이도 안 되는 저 짧은 시는 그러나 얼마나 긴 생을 담고 있는지. 봄 밤, 꽃 같은 처와 새처럼 짹짹거리는 어린 것들을 두고 산으로 올라가는 어느 사내의 등이 보이는 듯하다. 의신마을에서 누가 떠났다는 그 소식 이후의 소식이 아직 없다. 70년이 흘렀으니, 나는 칠불사에서 그 이후의 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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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에서 동남방으로 내려오면 배꼽쯤에 칠불사가 있다. 까마득한 옛날 황금 알에서 나와 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여기서 정진 성불했다 하여 칠불사다. 칠불의 어머니는 갠지스 강변 아유다국의 공주(許黃玉)이고, 그의 오빠는 인도승려(長遊寶玉)이며, 그때가 서기 103년이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불교는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중국을 통해 걸어 온 것보다 270년 빠른 이른바 ‘남방전래설’이다. 칠불사는 인도에서 뱃길로 왔다는 가야불교의 시원인 셈이다. 허구적 신화였던 3,000년 전 트로이와 미케네의 ‘잃어버린 세계’가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한 고고학자의 집념 덕분에 오늘날 살아 있는 역사로 환생하지 않았던가. 가야불교가 그처럼 온전히 옛 기억을 되찾게 되기를 소망하며 스님들은 ‘해동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을 달아 놓았다. 
 
칠불사는 여름 안거 중이었다. 스님들은 삼매에 들었고, 공양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우리를 먼저 반겨 준 것은 멧돼지 떼였다. 무와 감자 껍질, 시래기 따위가 가득 든 소쿠리를 내어놓자 새끼가 여덟 마리나 되는 멧돼지 가족이 우르르 몰려왔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우리를 힐끗 보더니 열 식구는 정신없이 먹어치운다. 멀리 대중공양을 다녀온 주지 도응 스님은 “저녁 5시만 되면 목탁을 안 쳐도 공양시간을 알고 어김없이 내려온다.”면서 “음식 찌꺼기를 따로 묻어야 하는 수고도 없고, 서로 공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이 “어떻게 하면 멧돼지와 말이 통할까 연구 중”이라고 해서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산삼을 좀 캐오라고 시키려고.” 그래서 한바탕 웃었다. 
 
아자방亞字房은 구들 공사 중이었다. 방의 네 귀를 무릎 정도 높게 돋아서 좌선 공간을 만들면 가운데로 십자의 회랑이 생기는데, 천장에서 내려다보면 버금 아亞 자 형상이어서 아자방이다. 9세기 신라 효공왕 때 담공 선사가 구들을 놓았는데 땔감 지게를 지고 들어갈 만큼 아궁이가 컸고, 한번 불을 때면 49일 동안 온기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고승대덕이 아자방을 거쳐 갔고, 당나라에까지 유명했다고 전한다. 
 
“스님, 방이 따뜻하면, 졸음이 오지 않을까요?”
 
“맞아요. 아자방 하면 회자되는 것이 하동 사또 얘깁니다. 점심 공양하고 식곤증이 올 무렵에 사또가 아자방을 찾았는데 스님들이 졸고 있었지요. 그래서 동승童僧과 문답을 합니다. 천장을 쳐다보며 졸고 있는 것이 무슨 공부냐고 묻지요. 동승이 그것은 앙천성숙관仰天星宿觀으로, 하늘의 별을 보고 상통천문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고 답하지요. 그럼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졸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수행이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으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되는데 그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것도 수행이냐고 물어요. 그것은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이라 하는데, 있음과 없음에 집착해도 안 되며 전후좌우 어느 것에도 걸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무애의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앉아서 방귀를 뽕뽕 뀌는 것은 무엇이냐고 다그치듯 묻자, 그것은 타파칠통관打破漆桶觀으로 우매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공부라고 답합니다. 동승의 답이 청산유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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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입으로 전해오던 얘기들로 출처를 몰랐는데, 창원 성주사 개금불사 때 부처님 복장에서 나온 기록에서 확인되었다고 스님은 들려주었다. 등장인물은 사또가 아니라 어사 박문수이며, 동승은 문수보살의 화현이라고 했다. 
 
아자방은 수행처로 이름 높은 곳이라 수좌라면 누구나 한 철 살고 싶어 방부를 들인다. “입방 기준이 있습니까?” 물었더니, “인연이 닿으면 들어온다.”고 했다. 청산靑山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뒤에 청산이라고 쓰인 자리는 주인이 앉고, 백운白雲은 떠다니는 것이니 그 자리는 운수납자가 앉는다고 한다. 아자방은 구들돌이 하나 내려 앉아 보수공사를 시작했는데, 이참에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 1년째 공사 중이다. 
 
칠불사는 1948년 여순항쟁 당시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국군이 불을 질러 전소됐다. 칠불사 아래 의신마을이 여순 병력과 군경 토벌대가 최후 충돌한 혁명과 전란의 현장이고, 마을 위쪽 빗점골은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었으니. 칠불사는 법당과 10여동의 당우들, 그리고 아자방까지 한 점 남김없이 불타 사라졌고 스님들은 소개疏開 처리됐던 역사의 상처가 깊은 곳이다. 그 후 30년 동안 아자방의 구들만 함석으로 덮여진 채로 칠불사는 잡초 무성한 폐허였다. 1978년 제월통광 선사가 20여 년에 걸친 복원 불사를 일으킴으로써 칠불사는 오늘에 이른다. 선사의 상좌인 스님에게 빨치산 얘기를 부탁했더니, 한참 말이 없다. 스님은 “광주 사람들 80년 광주 얘기 안 하듯이, 여기 사람들 지리산 얘기 안 한다.”면서 “같은 날 제사 지내는 집이 많은 것 같더라.”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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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운상선원雲上禪院은 말 그대로 구름 위에 있었다. 푸른 산맥들 사이로 멀리 광양 백운산이 굽어보이고, 봉우리에 걸려 있는 구름들은 발에 밟힐 듯하다. 거침없이 뻗어가는 맑은 기운들, 모르는 눈으로 봐도 명당이다. 우리는 주지스님으로부터 선방스님들이 아침 공양을 하러 비우는 시간, 6시부터 딱 15분 동안 선원을 둘러보아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좌복이 17개, 금방 일어난 흔적이 남아 있는 선방에는 까닭 모를 서기瑞氣가 느껴진다. 
 
‘진정한 말후일구末後一句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불기 2550년 종정스님의 하안거 결제법어는 깨어져 나갔을까? 새벽녘에 누군가 갑자기 목탁을 치고 대중을 불러 모아 어느 먼 곳에서 들려온 소식 하나를 전하지는 않았을까? 오랜 시간 거기 앉아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를 길어오는 삼매, 나는 선원을 내려오면서 간절하게 참구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이광이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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