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마음을 저버리고 ‘대중과 소통’을 외면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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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마음을 저버리고 ‘대중과 소통’을 외면한 불교
  • 이병두
  • 승인 2017.04.26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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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들과 편안한 대화를 나누었다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들과 편안한 대화를 나누셨다. 심지어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들과 길거리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왕공 귀족에서부터 대재벌 아나타핀디카(給孤獨長者), 장군 시하, 의사 지바카, 기녀 암바팔리 등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부처님의 재가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집안’ 출신이라고 자처하던 비구들 중에는 이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요즈음 학력學歷이 높은 사람들 중 일반 대중들이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를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는 심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남전 율장(南傳律藏; Vinaya)》 <소품(小品; Culla Vagga)>에는 브라만 출신 형제인 야메루(Yamelu)와 테쿠라(Tekula)라는 제자가 어느 날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멋지고 고급스런 말로 정리하고 싶다”는 뜻을 말씀드렸다가 크게 혼나는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리석은 사람아, 그렇게 하면 오히려 믿지 않던 사람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이미 불법을 믿는 사람에게도 그 믿음을 단단하게 해주지 못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대중과 유리된 고급스런 운율로 정리하면 안 되니, 누구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악작(惡作)을 범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각자 사용하는 언어로 배우게 해야 한다.”(《Vinaya》 <Culla Vagga>, 5:33)
 
 
2. 가톨릭의 반성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는 라틴어로 미사 집전을 하였다. 내가 그 광경을 대해보진 않았지만, 참으로 장엄莊嚴스러웠을 것이다. 본래 누구든지 다 알아듣는 말로 하는 의식에 비해, 일반 대중들이 알지 못하는 고전어古典語로 진행하는 의식이 신비감을 자아내고 훨씬 장중하게 보이는 법이다.(스님들이 한문으로 된 의식을 버리지 않고 고집하는 배경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오던 가톨릭에서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미사 집행 언어를 각 나라의 ‘현지 언어’'로 바꾸게 하였고 이제 그것을 ‘지극히 당연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 가톨릭에서는 아직도 “한국 가톨릭이 토착화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 시대의 대중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교육 사업에 대한 투자가 인색하였다”며 반성하고 있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펼치고 있다. (우리신학연구소 편, 서광사 간, 《한국 가톨릭 어디로 갈 것인가》 참조) 이미 오래 전에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말로 모두 번역해낸 쪽에서는 “이 시대 대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였다”는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런데 불교는 대중들과 멀어지는 쪽을 고집하였다
 
그런데 불교계는 알아듣는 이 하나 없는 말을 토해내고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수행이 부족하다”며 윽박지르고 “진리는 본래 어려운 것”이라고 주장하여, 대중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앞장서서 막아버린다. 말하는 사람도 모르는 한문 경전 구절을 웅얼거리며 전하고, 법문을 듣는 대중들도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채 그냥 따라 읽기만 한다.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듯이,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만든 이후 처음 그 글자를 이용해서 한 작업이 왕실 계보를 찬양하는 《용비어천가》와 함께 부처님을 찬탄하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석보상절(釋譜詳節)》(이 둘을 합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로 간행)을 지어 널리 배포하는 일이었고, 불교와 한글의 각별한 인연은 그 뒤로 《원각경》 ‧ 《능엄경》 등 여러 경전의 한글 번역(諺解)과 출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글(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에는 혜각 존자 ‧ 신미 대사 등 불교계가 많은 역할을 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어서, ‘불교와 한글 사이의 특별한 인연’을 소홀하게 여길 수 없으며, 실제로 조계종 교육원에서 ‘한글 창제와 불교’ 관련 연구에 착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는 2016년 나녹에서 나온 박해진의 책 《훈민정음의 길: 혜각 존자 ‧ 신미 평전》이 촉매제가 되었다.)
 
 
4. 한국에서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한 배경에는 ‘기독경’의 한글 번역이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넓게 퍼지게 된 점에 대해서는 서양 기독교인들도 놀랐던 모양이다. 《기독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한글 문법책을 쓰기도 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e)*은 그 이유와 배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시아에서는 기독교 전파가 쉽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일반 대중이 대부분 문맹이라 성경을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은 문자는 있지만 문자 자체가 배우기 힘든 인도 등의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이야말로 제일 안 좋은 경우인데, 지배층에서는 고고한 문화를 논하며 편안히 지내는 동안, 대중은 일자무식으로 소문, 귀동냥, 그리고 미신만 믿으면서 살아왔다. 극동에서 한국은 유일한 예외인데, 그들에게는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자가 있었다. 어떤 선구자적인 본능이 작용했는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460년 전에 간단한 표음문자가 발명되었다. 따라서 남녀노소, 빈부의 차이, 직업의 고하, 생계의 방법을 막론하고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요즘 교회 일을 보는 한국인들 중에는 평생 학교를 가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많다. 선교사들은 세종대왕이 발명한 한글로 성경을 번역했고 그리하여 이 은둔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곧 에덴동산에서 갈릴리 바다에 이르기까지 성경 이야기를 훤히 알게 되었다. 또 한국에는 이미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있어서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유일신唯一神 개념을 쉽게 전할 수가 있었고,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어떻게 주관하는지 이해시킬 수 있었다. 한글은 복음 전파의 선교활동을 아주 쉽게 해 주었다. 이에 비해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은 유일신 개념이 전혀 없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엘리자베스 키스 ‧ 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 지음, 송영달 옮김, 책과 함께. 77쪽에서)
 
 
5. ‘세종대왕 한글 창제의 덕을 본 기독교’ vs ‘한글 창제의 공로 ‧ 수혜자에서 외면外面자로 돌아선 불교’
 
최근 ‘불자 인구 수백만 명 감소’라는 통계 조사 결과를 놓고 조계종단 일각에서 “반성한다”면서 “대중과 소통하겠다”는 뜻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반성’과 ‘소통’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잘못하면 여론의 비판을 피해 도망가려는 ‘술수(術數)’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불교에 비하여 1500년 이상 늦게 이 땅에 들어왔어도 한글의 가치에 주목하고 일찍부터 경전을 한글로 옮겨서 세종대왕 한글 창제의 덕을 크게 보았다. 이에 비하여 불교는 한글 창제 작업에 참여하고, 그 한글로 지은 최초의 책이 불교 서적이었으며 ‘억불抑佛’ 정책을 강하게 펴던 조선시대에 여러 불경의 한글 번역이 이루어졌었는데도 그 전통을 이어가지 못하고 수백 년을 후퇴하고 있었다. 그나마 대장경의 한글 번역도 정부의 예산 지원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것이 우리 현실이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정부의 지원 없이 경전 번역에 앞장 서는 이들이 있어 희망을 갖게 하고 있다.)
 
우리말 경전이 미흡할 뿐 아니라, 위로는 조계종 종정에서부터 젊은 스님들에 이르기까지 전국 본말사의 법회 현장에서 전하는 법문은 아직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다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옛 한문 투’에 그치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 “대중과 소통하겠다”는 말을 아무리 자주 한들 그 효과가 있겠는가. 수백만 명 감소했다는 불교인 숫자가 회복되겠는가.
 
소통과 전법의 첫 걸음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언어’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전하는 일이다.

*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년. 선교사 ‧ 신학 박사 ‧ 한국어 학자. 1888년 캐나다 토론토(Toronto)대학 졸업. 토론토대학 학생 기독교청년회의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부산 · 서울 등지에서 선교 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 편집 위원으로 아펜젤러(H.G. Appenzeller) 등과 함께 한국어로 성서를 번역, 1893년 국어 문법서인 〈사과지남(辭課指南)을 저술했고, 1895년 〈천로역정(天路歷程)〉을 최초로 우리 한글로 옮겼으며 1897년 양시영 · 양기탁 부자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 Korean-English Dictionary》를 편찬 발행하는 등 저술도 많이 남겼다. 《Korea in Transition》 · 《A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 《한국근대사》 · 《한국풍속지》 · 《한양지(漢陽誌)》 · 《한국결혼고(韓國結婚考)》 · 《파고다 공원고(公園考)》 · 《금강산지》 등 저서와 《유몽천자(牖蒙千字)》(4책 1903~1909)를 비롯한 국어학 관계 논저가 있다.

[출처] http://www.mediabuddha.net/m/news/view.php?number=21211

세종대왕의 마음을 저버리고 ‘대중과 소통’을 외면한 불교 | 작성자 향산 이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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